주일예배

비전의 사람 바울

Author
Myung Myung
Date
2020-08-30 13:58
Views
429

살다보면 자기의 뜻과 상관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일이 진행될 때가 있습니다. 더구나 그 상황이 우리에게 육체적인 괴로움을 더하거나 어떤 손해를 준다면 그로 인한 실망이나 불평은 더해질 것입니다. 더구나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어려운 상황은 참기 어려운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왜 갇혀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인하여 불평하거나 비관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리스도가 전파되기만 하면 자기는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만 하면 만족해 합니다. 바울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그의 생각에 일대 전환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COVID-19이 우리의 삶을 짧은 기간에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바울이 현재 우리와 같은 상황에 있다면 기뻐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한 바울인지라 여전히 기뻐하며 복음 전파를 위해 수고할 것입니다. 기쁨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할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을 통하여 고난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에 대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비전의 사람이 된 바울
우리가 보통 ‘비전’을 말할 때 그 비전은 보통은 자기의 꿈 내지는 목표를 말합니다. 비전의 사람 시리즈 설교를 할 때 비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존’이고, 그 뜻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라 하였습니다. 비전의 사람은 계시나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을 대면하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결과 자기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비전을 알게 됩니다. 그 비전에 이끌리어 나가는 사람이 비전의 사람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바울은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자였으나 강렬한 빛과 함께 들린 주님의 음성은 바울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았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그 말씀은 바울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깊게 파고드는 살아 있는 능력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계속하여 바울의 귓전을 울리며 그의 마음을 찔렀을 것입니다. 자기 딴에는 하나님을 위한다는 열심으로 한 행동이었는데 실상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만남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계기가 되었고, 바울이 회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가졌던 인생관이 바뀌고 삶의 목표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율법에 대한 열심을 자랑하던 교회의 핍박자였으나,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 복음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의 비전은 이방인의 사도로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주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그의 온 생애를 바치며 나아갈 때 바울은 비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매일 수 없는 복음(12-18절)  
빌립보교회와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한 바울은 이제 자신이 옥에 갇힌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매였지만 복음은 결코 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담대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비전에 따라 복음을 전하기만 한다면 자신은 어떤 상황에 있을지라도 감사하며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 바울의 매임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됨
‘야구는 9회 말 투아웃부터’라는 말이 있습니다. 경기에 지다가 9회 말 투아웃 마지막 타석에서 때린 안타로 인하여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는 경우가 가끔 나오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역전적인 삶을 기술합니다. 자신이 비록 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오히려 복음 전파에 진전을 가져왔음을 언급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는 것은 그들을 믿음 안에서 연결된 영적 가족으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당한 일’이란 투옥된 것을 말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그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투옥된 것이 복음 전파의 또 다른 기회를 제공했다고 하며 그들을 위로합니다. 바울을 지키던 시위대는 왕궁을 지키는 엘리트 로마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보통 하루에 네 차례씩 교대로 죄수를 지켰습니다. 바울이 직접 찾아다니지 않아도 교대 시간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를 지키는 군인들과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믿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3장을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2년이나 감금되었습니다(행 24:27). 많은 사람들은 그의 사역이 끝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헤롯 궁의 친위대 병사들과 군대 장교들과 총독들(벨릭스와 베스도)과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와 아그립바 왕과 그의 아내 버니게와 가이사랴 성의 높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왕, 총독, 고관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매임조차도 복음 전파를 위한 기회와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안 믿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고 믿는 자들에게는 전도의 도전을 주니 바울은 일석이조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 복음을 전하는 두 가지 동기
그 결과 주님 안에 있는 형제들 중 다수가 바울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확신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전도하는 동기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동기에 따라 전도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눕니다. 
1) 투기와 분쟁으로 전하는 자들
바울의 사역에 나타나는 많은 열매를 자신들의 것과 비교하면서 공연히 열등감을 느끼고 바울의 사역을 의도적으로 낮추거나 무시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 것을 시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시위대 안에 있는 감옥으로 이송되는 것을 보고 이때야말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시킬 기회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복음 전파 방식이 옥에 갇힌 바울에게 괴로움을 더하게 할 것으로 생각하며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투기와 분쟁으로”가 17절에는 “다툼으로”, 18절에서는 “외모로 하나”로 표현됩니다. ‘다툼’을 의미하는 헬라어는 단순한 의견의 충돌이나 언쟁보다는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고 당을 짓는 세력 다툼을 뜻합니다. 바울을 비방하거나 혹은 자기들이 바울보다 낫다는 우월감을 과시하며 자기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다니며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시역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이었을 것입니다. 
2) 착한 뜻으로 전하는 자들
반면에 하나님께서 복음의 변증을 위해 바울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옥에 갇힌 그를 대신하여 힘써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착한 뜻으로”가 16절에서는 “사랑으로”, 18절에서는 “참으로”표현됩니다. 이들은 바울을 본받아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구원받기를 원하는 순수한 동기로 사랑으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 바울의 평가
바울은 ‘착한 뜻’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이 ‘진실함으로’복음을 전한다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다툼’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겉치레’로 한다고 평가합니다. 이기심으로 복음을 전하기에 겉으로는 복음을 전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착한 뜻’으로나 ‘사랑으로’복음을 전하든, 아니면 ‘투기와 분쟁’이나 ‘이기심으로’복음을 전하든, 그리스도가 전해지기만 한다면 지금도 기뻐하고, 앞으로도 계속 기뻐할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언급하는 ‘기쁨’은 현상적인 표현이 아니라 의지적인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기뻐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기쁨을 서술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도 의지적으로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시기와 분쟁이 아니라 협력과 조화, 평화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뻐하는 두 가지 이유(19-21절) 
바울은 자기가 기뻐하는 두 가지 이유를 언급합니다. 그 하나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중보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석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간구가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또한 성령께서 자신에게 힘과 지혜를 주시며 재판을 담당한 주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가 기뻐하는 두 번째 이유는 자신에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조차도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깨달은 것은 성공적인 삶이란 단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울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이 영원히 그와 함께하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죽음조차도 예수님과 자신을 갈라놓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기에, 바울은 그의 죽음조차도 유익하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바울의 소망(22-26절) 
모든 인생은 생명과 죽음 사이에 끼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살아있으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야 합니다. 바울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후에 있을 영생을 믿었으며,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참된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삶과 죽음 사이에 끼여 있다고 말할 만큼 긴박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은 영원한 단절이나 이별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누리는 행복을 의미했기에, 바울은 차라리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자신에게 더 낫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그를 믿어 그와 연합된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바울은 개인적으로는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하면서도, 육신에 머물러 활동하는 것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위해 더 유익한 일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떠나”에서 ‘떠나’라는 표현은 군대가 막사를 거두고 이동하는 것, 배가 닻을 올리고 출항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빨리 그리스도 곁으로 가기를 원하지만, 그에게는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유럽에서 처음 익은 열매들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더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영적 아비가 되었고, 그들 안에서 새 생명이 잉태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들에 대한 사랑이 바울로 하여금 삶에 대한 애착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들을 사랑으로 양육하고 격려하기 위해, 그들의 믿음의 진보를 위해 바울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더한 고통도 견딜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랑은 죽음의 두려움도, 삶이 고통도 사라지게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무엇이든 견딜 수 있으며, 어떤 상황이든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감옥 속에서 기쁨의 편지인 빌립보서를 쓸 수 있었던 까닭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있었기에 삶과 죽음을 넘어서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서 계속 육신으로 거하면서 복음에 대한 봉사의 임무를 다할 것을 확신합니다. 그들과 함께 거하며 그들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자랑이 더욱 풍성해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살아야 하는 이유 없이 하루하루를 산다면 세월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분명한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목적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을 장성한 사람으로 이끌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생명은 생명을 낳습니다.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보다 더 귀한 일은 없습니다. 

* 본문이 제시하는 성도의 삶
바울의 관심사는 복음과 교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마땅한 삶입니까?  
-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삶
바울에게 있어 삶의 목표는 복음을 전하고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자기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만 하면 누가 복음을 전하든, 어떠한 자세로 복음을 전하든, 그로 인하여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상관 않습니다. 바울은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니 기뻐하고, 살아 있으면 복음을 전하고 믿음의 성도들을 섬기며 교회의 유익과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를 돕게 되니 기뻐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신앙’을 유지하기 위하여 바울에게 필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교우들의 간구입니다. 그 중보 기도를 인하여 바울은 힘을 얻어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고난을 당할지라도 감당할 만한 지혜와 능력을 주시며 구체적인 도움을 주시기에 복음의 열매를 거두어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교우들의 기도와 때로 무엇을 구할지 모르는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 성도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한 삶
바울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빌립보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수고함으로 그들의 삶이 주 안에서 풍성하여진다면 그것을 인하여 빌립보 교인들이 주님 앞에 바울을 자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교회와 성도의 유익과 믿음의 진보를 위해 자신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목사와 교인들이 서로의 존재, 서로의 섬김, 서로의 사랑을 인하여 믿음 생활이 풍성해지고 서로를 자랑해야 합니다. 
-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27-30절)  
바울은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일까요? 복음에 합당한 삶은 주 안에서 한 마음을 가지고 연합하는 삶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한 마음으로 서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고, 믿음에 굳게 서서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분을 위해 고난도 감수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복음을 위하여 산다면 영적 싸움이 계속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바울을 통해 생생하게 목격해 온 것이며 지금도 바울에게 그런 싸움이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본받아 용기 있게 고난을 이겨내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나가면서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자기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을 목표로 살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비전을 가진 사람의 성숙한 믿음의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게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존심입니까? 출세욕입니까? 인기입니까? 재물입니까? 바울은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서 언제 어디서 어떤 형편과 처지에 거하든지 담대했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이루어지기만 하면 크게 기뻐할 일이 무엇입니까? 나의 생애 모든 것을 투자하여도 그것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에 합당한 삶은 주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으로 연합하는 삶입니다. 서로 세우고 서로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도 달게 받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이 있습니다. 바울처럼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고 싶은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교인들이 몇 사람만 있으면 그 교회의 역사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이 가는 곳마다 놀라운 변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에는 죽음을 초월한 신앙,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간절함, 성도에 대한 깊은 사랑이 담겨 있었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에 있던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니 그들이 일어나 하나님의 큰 군대를 이루었던 것 같이 우리는 약할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강하게 하실 수 있다는 긍정적인 신앙을 가질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그로 인하여 우리의 삶에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6개월 가까이 지속되는 역병의 상황에서 때로 몸도 마음도 지치고, 때로 두렵기도 하고 때로 위축되기도 합니다. 때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 우리의 사랑이 흔들려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보다 견고합니다. 독생자까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모든 고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비전을 주시고 함께 하셔서 영광을 받으신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동일하게 일하실 것을 믿습니다. 임마누엘 주님과 함께 걸으며 바울과 같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소망하면서 신앙의 열심과 열정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각자에게 맡기신 일을 온전히 감당함으로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믿음의 형제들에게는 유익을 끼치는 믿음의 성도, 범사에 기쁨이 충만한 성도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