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교회를 생각하는 마음

Author
Myung Myung
Date
2020-08-23 13:54
Views
450

지난주까지 10주 동안 구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을 중심으로 비전의 사람 시리즈 설교를 했습니다. 한 인물에 대한 방대한 이야기를 비전이란 주제에 맞추어 1시간 설교로 하려니 준비하는데 적지 않은 노력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것을 배우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오늘부터 10주 동안은 빌립보서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5개월째 계속 되는 사회적 격리 속에서 있다 보니 어떠십니까? 갑자기 많은 쉼의 시간이 생겨서 좋으십니까? 이제는 집에 있는 것이 답답하게 여겨집니까 아니면 익숙해지셨습니까? 나름대로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내는 비결을 찾으셨나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교우들이 보고 싶나요? 감사노트는 계속 쓰고 계신가요? 샌디에고 지역은 확진자 비율이 계속 줄어들어 지난주 주정부의 watch list에서 빠졌습니다. 머지않아 대면예배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날을 맞이할 준비를 교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 해야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어디에서 썼습니까? 감옥입니다. 빌립보서는 옥중 서신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참고로,어떤 서신들이 옥중 서신입니까?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그리고 빌레몬서입니다. 빌립보서에는 ‘기쁨’이란 명사나 ‘기뻐하다’는 동사가 16번 나옵니다. 왜 기쁨을 반복하여 사용합니까? 바울은 감옥에서도 기뻐할 줄 아는 비결을 발견하였는데, 빌립보 교인들은 제대로 기뻐하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리더들 사이에 반목이 있어서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교우들이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같은 마음을 품으라’, ‘기뻐하라’하며 교우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스도를 겸손과 섬김의 모델로 삼을 때에만 성도들이 하나가 되는 기쁨을 맛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를 살펴보면서 팬데믹 상황에서도 주 안에서 아름다운 교제를 회복할 뿐 아니라 기쁨이 충만해지고 또한 그 기쁨을 서로 나누시기 바랍니다.  

문안 인사(1-2절)
제2차 선교 여행 중 바울은 계속 소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 길을 막으시고 드로아에서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나타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 16:9) 하였기에 유럽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바울을 만나 그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협조한 여성 사업가 루디아와 그 가족, 귀신들렸다가 바울에 의해 온전케 된 여종, 지진을 통해 복음을 접하게 된 빌립보간수와 그 가족들이 빌립보교회의 개척 멤버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세워진 빌립보 교회인지라 목회자인 바울과 교인들 간에 사이가 좋았습니다. 보통 바울 서신의 서두를 보면 바울의 사도직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사도직은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먼저 밝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롬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고전 1:1). 특히 유대 주의자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던 갈라디아 교회에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갈 1:1) 하면서 길게 자신을 변호합니다. 그런데 빌립보서에서는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짤막하게 소개하면서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변명이 없습니다. 종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주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 종이 되길 자청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았습니다. 

편지의 발신인으로 ‘바울과 디모데’가 나타나지만 편지 쓰는 작업을 같이 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동역자로 인식하고 있으며 두 사람의 신학과 신앙이 일치한다는 점을 반영합니다. 편지의 수신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 받아 성결하게 된 자들을 의미합니다. ‘감독들’은 교회의 영적인 문제를 관장하는 지도자들을 가리키고, ‘집사들’은 감독들을 도와 재정 문제를 관장하고 공동체 내의 약한 자들을 돌보며 때로는 말씀을 전하는 일을 감당하기도 했던 직분자들로 보입니다. 

바울은 수신인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오는 ‘은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 ‘은혜와 평강’의 출처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호칭하며 성도들이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은혜’는 본래 헬라인들이 관습적으로 사용하던 인사말이고, ‘평강’(shalom)은 히브리인들이 사용하던 인사말입니다. 바울은 이 두 개념을 복음적 관점에서 새로운 의미로 바꿔 사용합니다. 곧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의의 선물을, ‘평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관계가 끝난 상태에서 주어지는 영혼의 평안을 뜻합니다. 은혜는 평강의 원인이고, 평강은 은혜의 열매이며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감사(3-4절)  
문안 인사를 제외하면 빌립보서의 첫 마디는 “내가 감사한다”입니다. 바울이 처해 있던 어려운 형편을 생각해 볼 때 감사의 말이 나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를 오해하거나 심지어 대적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전도를 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1:15,17). 더구나 지금 바울은 감옥게 갇혀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것이 성도의 진정한 모습이며 진정한 능력입니다.  특히 바울은 “나의 하나님께”감사한다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감사하는 이유는 빌립보교회가 처음부터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했기 때문이며(5절), 그리스도 예수께서 빌립보교회를 그분의 날까지 이끌어주시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며(6절), 빌립보교회가 바울의 매임과 복음을 변호하고 견고하게 세우는 일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7절). 3-4절에는 개역성경에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지만‘모든’이라는 단어가 4번 언급됩니다.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너희에 대한 모든 기억에), “항상”(모든 때에), “간구할 때마다”(모든 간구에), “너희 무리를 위하여”(너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모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빌립보교회에 대한 감사가 그만큼 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빌립보 교회가 어떻게 개척이 되었고 어떻게 자라왔는지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전하여 준 복음을 처음 듣고 받아들인 이후로 믿음에 굳게 서서 바울의 전도 사역에 동참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상황이 되었으나 바울을 향한 그들의 사랑과 지지는 한결 같았습니다. 이는 개척 교회 목사에 대한 맹목적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바울에 대한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사역을 돕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간구’로 번역된 헬라어 ‘데에사스’는 본래 ‘결핍’을 뜻하는 말로 현재 빌립보 교인들의 부족함을 알고 그 부족한 것들을 채워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머릿속은 온통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감사의 이유(5-8절)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5절)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간구하는 이유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참여’로 번역된 헬라어가 우리가 ‘교제’로 많이 알고 있는‘코이노니아’입니다. ‘코이노니아’는 단순한 만남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물질이 오고 가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아무런 돈도 필요 없이 믿음이나 열정 하나만으로 선교가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 안의 물질적인 교류는 단순한 구제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지원하는 쪽에는 상대방의 사역을 인정하고 거기에 동참하는 의미가 있으며 받는 사람의 입장에는 그 사람들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울도 빌립보 교인들의 도움 뒤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깨닫고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두 번 이상 그의 쓸 것을 도와준 적이 있었습니다.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 이루실 줄을”(6절)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복음 사역이 그들 가운데 계속되어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세상의 시작과 끝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뜻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려는 계획을 준비하셨습니다. 사탄이 비록 성도들을 핍박하고 믿음 생활을 방해하지만, 결국 하나님 나라는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단지 믿음과 순종으로 맡겨진 사역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날에 신실한 성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착한 일을 수행한 자로 인정받을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7절)
바울이 가는 곳마다 교회를 개척하고 많은 복음의 열매를 거두었을 때 그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환호를 받을 것을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바울은 사역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다른 어떤 사도들보다 감옥에 더 많이 갇히고 더 많이 매를 맞고 더 많은 핍박을 당하였습니다. 그런 외로운 상황에서 감옥에 있는 자기에게 찾아오고 또한 필요한 것을 제공한 빌립보 교인들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사랑과 관심은 바울에게 커다란 용기를 주었습니다.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여”를 직역하면 “너희가 나를 너희의 마음에 둠이여”가 됩니다. 기독교인의 교제는 단순히 커피를 함께 마시며 대화를 나누거나 취미생활을 함께 하는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서로를 마음에 두며 동역해야 합니다. 7절에 사용된 ‘변명함’은 일반적으로 법적인 고소에 대한 변호를 뜻하는 용어이고, ‘확정함’은 ‘견고하게 서게 함’또는 ‘안전을 보증함’을 뜻하는 법적인 전문 용어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바울이 그동안 복음을 변호하고 전하는데 기울인 모든 노력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바울의 복음 전파 사역에 빌립보교회가 동참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 얼마나 사모하는지”(8절)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있는 곳에 가고 싶어집니다. 어서 그를 만나 사랑의 교제를 나눔으로 더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기가 얼마나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며 보고 싶어 하는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고 말을 합니다. 자기 심장도 아니고 예수님의 심장이라 말합니다. 그러면서 혹시라도 이 말에 과장된 느낌을 받을까 해서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고 분명히 못을 박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그가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며, 참으로 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고 그들을 위해서라면 아무 것도 아끼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심장’이란 심장, 허파, 간 등의 장기를 뜻하는 말로서, 헬라인들에게 이 용어는 감정이 집합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공감’을 가장 강하게 표현하는 용어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가졌던 compassion, 뜨거운 사랑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사모한다면서 빌립보교회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 가식이나 형식이 아니라 진실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바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과연 얼마나 교우들을 사모하는가 생각하며 큰 도전을 받습니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을 때 그 사랑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를 통해 나를 도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찬양 돌리고 감사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너무 감사한 나머지 나를 도운 사람에게 감사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려울 때 도움을 준 사람에게 사랑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그렇게 했겠지만, 그 사람이 나를 돕기 위하여 자기 쓸 것을 쓰지 않고 자기 시간을 절약에서 나를 찾아 왔고 나에게 그런 귀한 도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감사하는 표현을 많이 합니다. 점점 각박해지는 때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형제자매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바울의 기도(9-11절) 
9-11절은 빌립보교회를 위해 드린 기도의 내용으로 두 개의 목적절과 함께 전체적으로 하나의 문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9절은 “내가 기도하노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가 드린 기도의 내용을 보면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얼마나 생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연모는 중보 기도로 이어집니다. 그는 두 가지 제목으로 기도합니다.  

-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더 풍성하게 되도록(9절)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도록 기도한 것은 그들이 현재 그런 풍성함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빌립보교회에 사랑이 없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1:16). 그러나 교회 전체적으로는 사랑하는 데서 실패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다툼과 시기와 분쟁이 있었는데 그 중심에 두 여성 리더들이 있었습니다(4:2). 어떻게 하면 사랑이 풍성해질 수 있습니까? 신앙의 열심이 당연히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움 받아야 더 풍성하여 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때는 뜨거워도 이내 시들어버립니다. 나중에는 섬기는 기쁨도 잃어버립니다. 여기서 ‘지식’이라는 것은 영적 원리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의미하고, ‘총명’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안목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사랑을 알며 진리를 깨달아 영적인 안목을 가지게 될 때 신자는 참된 사랑을 알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도록(10절) 
두 번째로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기를 기도합니다. ‘지극히 선한 것’이라는 말은 구별된 것을 의미합니다. 빌립보 교회가 세속화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별된 모습을 갖기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현재에 존재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라는 종말적인 공동체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인간의 조직일 뿐 아니라 성령의 교제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비록 땅에서 살고 있으나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함으로써(3:20) 교회는 본질상 천상적인 공동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박해를 당하기도 하고 환란 가운데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항상 영적인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한 공동체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이런 교회상을 회복하도록 기도합니다.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이 흠이 없는 온전한 짐승들을 제사로 드릴 때에 그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었던 것 같이 성도들도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 때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 평강 가운데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인지 분별하여 순수하고 허물없는 삶을 살게 되어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의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둠으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이 실라와 함께 빌립보에 처음 왔을 때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고쳐 준 것을 계기로 졸지에 체포되고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차꼬에 채여 감옥에 갇혔습니다.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과 실라가 옥중에서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니 차꼬가 풀리고 옥문이 열리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로 인하여 빌립보 간수와 그의 가족이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기도와 감사는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도 기뻐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넘쳐흐르는 감사와 간구와 뜨거운 사랑으로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했습니다. 왜 다른 사람이 내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가 불평하기 전에 내가 먼저 이웃에게 사랑의 손길을 뻗치고 사랑을 베풀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눈을 돌려 이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서로를 마음에 품고 서로의 부족함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믿으며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움을 겪는 이웃에게 따뜻한 말이나 사랑의 편지, 격려의 전화를 해야 합니다. 이런 연습이 가정에서, 목장에서, 온 교회에서 있어야 합니다. 교회 밖에서도 있어야 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4:15). 함께 모여서 삶을 나누다 보면 그들이 겪는 아픔이 우리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미 겪었거나 같이 겪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 위로가 되고 다른 사람에게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위해 기도한 것처럼 팔로마 온 교우들의 사랑이 더 풍성해져서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고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하게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름으로써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며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은혜와 평강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