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비전의 사람 다니엘

Author
HG HG
Date
2020-08-16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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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

일본 제국주의가 아시아 정복이라는 야망을 가지고 무력을 증강하고 있을 때에 우리의 조상들은 당쟁을 일삼았고 우상 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무력으로 국권과 강토를 빼앗고 우리의 고유문화를 짓밟으면서 민족의 혼 자체를 말살하려고 안간힘을 쏟았습니다. 조선의 젊은이들이 그들이 일으킨 전쟁의 총알받이와 위안부로 끌려가 동남아, 태평양 그리고 중국에서 죽어갔습니다. 교회에 가해진 압박도 엄청났습니다. 교회 종탑에 있는 종들을 철거해 갔습니다. 예배 전에 일본 국기에 절하게 했고, 1943년 9월부터는 주일 밤 집회와 수요기도회를 갖지 못하게 했습니다. 신사 참배를 강요했습니다. 말과 성씨와 자유와 민족의 혼을 빼앗겼던 어두웠던 시대를 35년 동안 지냈습니다. 그런데 빼앗긴 들에도 봄이 왔습니다. 어제가 8월 15일이었습니다. 35년 동안 일제 강점기를 지내면서 수많은 피들이 뿌려진 땅에 하나님의 은혜로 광복의 햇살이 비추었고, 주권을 회복한 지 올해로 75주년이 됩니다.

지금부터 2600년 전에도 나라 잃고 낯선 땅에 끌려가 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다니엘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비전의 사람 시리즈 10번째로 다니엘을 살펴봅니다. 비전의 사람들은 모두 어려운 현실 가운데 하나님의 비전을 받았습니다.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온 힘을 다해 비전을 품고 달려갔습니다. 다니엘은 포로기에 낙심한 공동체에게 소망을 주어 포로시기를 견디게 하고 미래를 향한 종말 신앙을 심어주었습니다. 다니엘은 아브라함, 모세, 이사야처럼 하나님과 직접 대면한 후 비전의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로 결단했을 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비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시대적 상황
주전 7세기 말엽에 바벨론은 앗수르를 누르고 근동 지역의 패권을 차지했습니다. 갈그미스에서 애굽을 격파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유다 왕 여호야김이 통치하던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주전 605년 바벨론의 1차 침공 때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다니엘서는 주전 586-536년 사이의 포로 시대 및 주전 538년에 시작된 포로 귀한 시대를 역사적 배경으로 합니다. 다니엘서는 역사와 묵시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보여줌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환난을 견디게 합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유다 백성은 이국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강대한 바벨론의 백성으로 삼고, 바벨론 사람들이 섬기는 마르둑 신을 섬겨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에 끼어 살면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고, 부정한 음식은 먹지 않고 율법에 규정된 대로 사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학교에서 일본말을 가르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역사를 왜곡하며 한국의 고유문화, 한국의 정신을 말살하려고 하였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뜻을 정한 다니엘
바벨론 제국은 앗수르가 점령하고 있던 지역을 재정복하여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키고 근동의 대부분의 지역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렇게 광대한 지역을 다스리려면 능력 있는 행정 관료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명하여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끌고 온 소년들 중에 똑똑한 인재들을 발탁하여 바벨론을 위하여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3년 과정의 특별 프로그램은 바벨론 포로민의 정책의 일환으로 충성스러운 바벨론 신복의 양성, 민족적 동화와 왕권 강화 등을 목적으로 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이러한 훈련 계획에 선발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삼년동안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을 가르치며 왕이 먹는 음식을 먹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잊게 하고 완전히 바벨론에 동화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이름도 바뀌었습니다. 다니엘은‘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재판장)’라는 뜻입니다. 세 친구들의 이름에도 하나님의 이름 '엘' 또는 '야‘가 들어 있습니다. 이 전형적인 유다식 이름들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원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개명된 이름인 벨드사살은 ’벨이여 그의 생명을 보호하소서’라는 뜻이고 세 친구들의 이름에도 모두 바벨론 신의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자기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방 종교의 의미를 갖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소년’으로 소개됩니다. 이 단어는 10대 이하에서 30대 초반까지를 가리킵니다. 바사의 젊은이들은 보통 14세부터 정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다니엘도 비슷한 시기에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면 당시 나이를 14~15세 정도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특별교육을 받으며 인재로 양성되는 것을 기뻐할 텐데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으려고”뜻을 정했습니다. 문법적으로 ‘자기 스스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나타냅니다. 공급되는 왕의 음식이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인 언급은 없으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려는 경건한 자에게는 걸림돌이 되는 음식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마 모세의 율법에 금하고 있는 식물(레 11장, 신 14장)이나 피를 완전히 빼지 않은 음식이 주어졌을 것입니다(레 17:13-14). 또한 이 음식들은 바벨론 신에게 제사 드려진 후 왕에게 주어진 음식이기 때문에 우상의 제사와 연관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럽히다’라는 단어를 사용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왕의 명령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는 아주 쉬운 선택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려는 어려운 선택을 했습니다.

다니엘은 판단과 결정을 감독에게 전적으로 위임함으로써 그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열흘 동안 물과 채식을 먹으면 얼굴에 변화가 나타날 텐데 그때 가서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과 비교하여 자기들의 모습이 초췌하다면 처분대로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채식’은 직역하면 ‘씨앗’입니다. ‘씨에서 자란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채소뿐만 아니라 과일, 곡식, 빵 등을 포함합니다. 다니엘의 제안은 채식이 육식보다 건강에 좋다는 현대적 지식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우시리라는 믿음에 기초한 것입니다. ‘당신 앞에서’라는 말은 감독관이 보는 앞에서 채식을 먹겠다는 말로 어떤 술수를 쓰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시험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왕의 음식을 먹지 않고 채식을 먹은 다니엘과 세 친구의 얼굴은 오히려 아름답고 살이 윤택했습니다. ‘감독하는 자’는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었습니다. ‘제한다’는 말은 더 이상 그들에게 왕의 음식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부정한 음식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켰더니 하나님은 그들에게 당대의 모든 지식과 학문, 기술을 습득하게 하셨으며 지혜와 명철을 더하셨습니다. 때가 되어 그들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앞에 나아갔을 때, 그들을 시험한 왕은 그들의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열 배나 나았다고 말합니다.

다니엘은 고레스원년까지 바벨론에 거주했습니다. 그 해는 주전 538년으로 고레스 칙령이 발표된 해였습니다. 다음 해인 주전 537년에 유대인들이 약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종결하고 1차로 귀환을 시작하였습니다. 따라서 다니엘은 주전 605년부터 주전 538년까지 약 68년 동안 바벨론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때, 다니엘이 14-15세의 소년이었다면, 고레스 원년에는 80-90세 정도였을 것입니다.

하루 세 번의 기도
다니엘서 6장은 다니엘을 죽이려는 음모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그 당시 3명의 총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이 다른 지도자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왕은 다니엘에게 국사를 다 맡길 생각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다른 총리들과 방백들이 다니엘에게서 고소할 거리를 찾았으나 아무런 틈이나 아무런 허물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다니엘을 고소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니엘이 하나님을 믿고 또 매일 기도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에 그들은 왕 앞에 나아가서 한 법령을 정하여 시행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그 내용인즉슨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다는 것입니다. 다리오왕은 그들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성급하게 조서에 어인을 찍어 금령을 내렸습니다. 다니엘이 그 상황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집에 돌아가자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를 본 첩자들이 왕께 그 사실을 고하고 벌을 내리기를 구했습니다. 왕이 비로소 그들의 올무에 걸린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왕의 권위 때문에 어찌할 수 없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이튿날 새벽에 달려 온 왕에게 다니엘은 자기를 사자들에게서 구하심으로써 자기의 무죄함을 하나님께서 증거하셨다고 말했습니다(6:21). 왕이 다니엘을 참소한 자들과 그 가족들이 사자 굴에 던졌을 때, 그들이 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사자들은 그들의 뼈까지 부서뜨렸습니다. 사자들이 다니엘을 죽이지 않은 것은 겁먹거나 배가 불러서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에 다리오 왕은 온 나라에 조서를 내리면서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살리신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하나님’,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분’이라고 증거했습니다(6:26).

하나님이 주신 비전
다니엘이 세 친구와 다른 유다 백성과 다른 것은 바로 그가 비전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보통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꿈과 환상의 능력을 받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꿈을 해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장래의 일을 예언하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다니엘서 전반부인 1-6장은 이야기식으로 내용을 전하고 있기에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후반부인 7-12장은 묵시 문학 형태로 되어 있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후반부에서 다니엘이 본 환상이나 받은 예언은 모두 미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환상’으로 번역된 ‘하존’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즉 비전을 의미합니다. 7장에서 다니엘은 네 짐승, 하늘 보좌, 인자에 대한 환상을 봅니다. 이 환상은 어느 특정한 나라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 권력과 세상 나라의 최후에 대해 말해 준다는데 초점을 둬야 합니다. 8장에서 다니엘이 본 숫양과 숫염소와 그 짐승들의 뿔들에 관한 환상은 세상 끝에 일어날 일들을 말해줍니다. 숫염소의 큰 뿔과 그 후에 나온 네 뿔은 알렉산더와 그의 사후의 네 나라를 가리키고 그 네 뿔 가운데 나온 작은 뿔은 1차적으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지만 성경은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와 심판의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떠한 왕국도 영원할 수 없고 결국 멸망의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다니엘 당시의 이스라엘의 신실한 자들에게는 물론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환난과 어려움을 겪는 우리에게도 소망을 줍니다.

벨사살 왕의 죽음과 바벨론 왕국의 멸망을 목도한 다니엘은 9장에서 포로 기한 70년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렘 25:11-13)을 깨닫고 유다 민족의 귀환과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중보기도 합니다.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천사 가브리엘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의 해가 정하여졌음을 선포합니다. ‘칠십 이레’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이해는 다니엘 자신에게도 분명하지 않고 그 모호성을 여전히 남겨두지만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구원과 회복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10장과 11장에서 천사는 인자 환상을 보고 혼절했던 다니엘에게 앞으로 근동 지역에서 일어날 일들을 말해 줍니다. 바사 제국으로부터 시작하여 알렉산더 대왕과 헬라 제국, 그리고 그 제국의 분열 그들 사이의 갈등 등과 같이 다니엘 이후의 근동 역사를 상세히 예언하고 있습니다. 12장은 구약성경에서 처음으로 부활과 영생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이 가까워 올수록 악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질 것이며,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토라 중심의 신앙보다는 목숨을 유지하면서 신앙을 포기하는 배교의 길을 선택할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 헌신된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해와 별 같이 영원한 빛날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때와 관한 질문에 대해 ‘한 때 두 때 반 때’(12:7)이라는 불명확한 답이 주어집니다. 시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보다 이 시기를 연단과 정결함으로 준비하고 인내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다니엘의 묵시는 신약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흡사합니다.

다니엘은 장래에 있을 일들을 예언함으로써 이런 일을 당하게 될 미래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믿음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전체를 통해 면면히 흐르고 있는 주된 주제는 세상 왕국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능력입니다. 다니엘은 정한 기한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고 성도들이 박해 가운데 있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그의 나라로 성도들을 이끄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당혹케 할 수 있는 그 어떠한 일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어떠한 경우에도 소망을 버리지 말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호소합니다. 끝까지 신실하면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도 곁들이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메시지를 읽은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이방 민족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또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계시된 그리스도
사자 굴에 던져지는 다니엘은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다니엘이 자기의 잘못 없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다가 사자 굴에 던져지고 죽음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배고픈 사자의 입이 막히고 그는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고 살아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습니다. 예수님도 끝까지 하나님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까지 가게 되지만 결국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진 것은 주변 사람들의 악한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의도조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계기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도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악한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계획을 통하여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서 죽음 직전까지 갔으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큰 권능을 나타내셨습니다.

결박한 세 사람을 풀무불에 던졌는데, 결박되지 않은 네 사람이 보이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면서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했습니다. 네 번째 인물을 천사로 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 다수 복음주의 성경학자들의 견해입니다. 다니엘은 사람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하신 분이 구름을 타고 하나님께로 인도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7:13).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묘사로 구름이 많이 사용됩니다. 인자가 ‘a son of man'으로 나오는데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당신을 가리켜 언제나 ‘the son of man’즉 ‘그 인자’라고 불렀습니다. 다니엘이 예언한 인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10:5-6에서 다니엘은 세마포 옷을 입은 사람을 환상을 보는데, 요한계시록 1:12-16에 그리스도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 내용과 거의 비슷합니다.

* 다니엘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니엘은 포로로 끌려와서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지만 하나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보였습니다. 율법에 규정된 부정한 음식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는 뜻을 정하고 그 뜻을 실천한 결과 다니엘은 세 친구들과 더불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지혜와 명철을 가졌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아 총리까지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지혜와 총명을 얻기 위해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기로 뜻을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뜻을 정하였더니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다니엘은 세상의 성공이나 출세보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키고,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룩’은 ‘구별’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구별된 하나님 백성답게 만드는 두 기둥이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에 기초해 무엇이 정하고 무엇이 부정한지 분별했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살피고 그 예언의 성취가 가까움을 깨달은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의 응답으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이상이 다니엘에게 주어졌고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그 이상을 묵상하여 깨달을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묵상할 수 있는 것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분별하며 기도의 제목을 찾는 원천이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능력을 믿을 때 성도는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다니엘은 포로의 신분을 벗고 출세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신앙적으로 정결하게 지키는 것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뤄지도록, 우리도 다니엘처럼 거룩한 뜻을 품어야 합니다.

-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니엘의 꿈은 ‘높은 자리’나 ‘큰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고기 먹기를 거부한다고 망한 나라가 회복되겠습니까? 그럴 거면 아예 채소도 거부하고 단식 투쟁을 하든지, 적국의 인재가 될 수 없다고 수업 거부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총리의 자리에 오르고 다니엘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을 혁명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민족의 원수 바벨론 왕을 향해 칼을 들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멸망한 고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모임을 주도하거나 느헤미야처럼 왕의 마음을 움직여 예루살렘 재건을 위해 직접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민족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개명을 거절하지도 않았습니다. 누가 보면 하찮아 보일지 모르는 하루 세 번의 기도에 목숨을 걸었고, 율법이 금하는 음식을 먹지 않는 일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다니엘이 살던 시대는 여러 제국이 일어났다 몰락하고 군웅이 할거한 역사의 격동기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국의 흥망성쇠보다 주어진 자리에서 여호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다니엘을 주목하셨습니다. 다니엘은 비천한 자리에 있어도 신앙을 지켰고, 지체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그의 신실함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종말의 역사를 증거하는 사명을 다니엘에게 주셨습니다.

-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니엘에게 총리직은 삶의 목표도 아니고 일생의 꿈도 아니고 그저 그가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적국에 부역하는 일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리의 직무를 묵묵히 그리고 충성스럽게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은 바위보다 견고했고, 하나님을 향한 그의 우직함은 목숨을 초개같이 여길 정도였습니다.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다니엘이 보여준 삶의 자세는 나라를 잃고 이방인들 사이에서 살아가게 되었을지라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야망 때문이 아닙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있었고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같이 우리는 처한 장소와 상황에서 최선을 다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능력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다니엘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인 것과 같이 우리는 디아스포라 한국인으로 미국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는 줄 믿습니다. 다니엘의 삶의 자세가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다니엘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를 보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다니엘과 같이 거룩하고 신실해야 합니다. 다니엘과 같이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다니엘과 같이 기도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가장 감사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힘든 때를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서 이 모든 어려움을 제거하실 ‘그 때’로 돌리게 되면 소망과 인내를 갖게 될 것입니다. 젊어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운 믿음을 소유했던 다니엘을 본받아 온 교우들이 주님이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 하나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귀한 믿음의 본을 보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