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비전의 사람 이사야

Author
Myung Myung
Date
2020-08-02 14:10
Views
433

소명(召命, calling)과 사명(使命, mission)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소명은 국어사전에 의하면 ‘어떤 일이나 임무를 하도록 부르는 명령’이라고 합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소명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하시려는 사명을 깨닫습니다. 사명은 소명을 받은 자가 당연히 해야 하는 과업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에게 찾아오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다는 분명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는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소명과 사명을 주셨습니다. 소명은 헌신과 연합될 때 열매를 맺습니다. 섬김은 더 신실해집니다.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헌신의 삶을 열망할 수 있고 또 열망해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사명을 감당할 때까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은 우리가 주님의 소명을 받은 사명자임을 전제로 합니다. 오늘은 비전의 사람 시리즈 8번째로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6장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시대적 배경  
6장의 기사대로 이사야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소명을 받았다면, 주전 742년경에 사역을 시작한 것입니다. 웃시야는 악한 왕이었던 아버지 아마샤가 죽임을 당하자 16살이란 어린 나이에 왕에 올랐지만 아주 유능한 왕이었습니다. 선지자 스가랴가 그의 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재위하는 동안 주변 나라들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국방을 강화하고 광야지대를 개간하여 농산물을 많이 거두었습니다. 그 결과 나라는 매우 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역대하 26장을 보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강성하던 웃시야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짓는 웃시야로 바뀝니다.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는 것은 왕이 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었는데 웃시야는 자기가 그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제사장 아사랴가 왕을 따라 들어가 분향하지 못하게 하자 웃시야가 화를 낼 때 이마에 나병이 생겼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치시므로 웃시야가 성전에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그가 폐위되지는 않았지만 나병을 인하여 부정하였기에 별궁에서 지내다가 죽었습니다. 웃시야는 이스라엘의 번영을 이루었지만, 영적으로 이스라엘은 타락했고 정치과 경제 분야에서 불의가 팽배했습니다. 당시 국제정세도 큰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앗수르 왕으로 등극해(주전 745년) 세력을 확장시키며 제국을 형성해 갔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므나헴 왕때 앗수르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반란으로 이스라엘 왕이 된 베가는 주변 민족들과 결속해 앗수르에 대항하고자 했는데, 남 유다 왕 아하스가 동조하지 않자 아람과 동맹을 맺고 예루살렘에 쳐들어 왔습니다(주전 734년). 아하스는 이사야의 권고를 무시하고 앗수르 왕에게 원조를 요청했고, 앗수르는 주전 732년에 아람을, 주전 722년에는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앗수르가 히스기야 왕 때에 유다를 공격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주전 701년). 이사야 당대에 바벨론은 위협적인 세력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한 세기 후에 제국을 이루고 앗수르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3차에 걸쳐 유다를 침략해 멸망시키고 많은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바벨론은 메대와 페르샤 연합군에게 무너지고(주전 539년), 페르샤 제국이 새로운 강자로 등장했습니다. 페르샤 제국은 앗수르, 바벨론과 달리 각 민족의 종교와 문화 및 자율성을 인정하는 유화정책을 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을 짓고 새로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비전의 사람 이사야 
이사야는 1:1에서 자신이 누구이며, 어느 시대에 활동을 하였으며, 자신이 쓰고 있는 글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밝힙니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이사야는 자신의 글을 자신이 본 “계시”라고 밝힙니다. ‘계시’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하존’, 즉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NIV에서는 vision 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사야가 본 하나님의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계시를 받고 계시대로 순종하는 삶을 통해 이사야는 비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사야의 이름과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이 암시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사야’라는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이며 그의 한 아들인 ‘스알야숩’은 ‘남은 자’라는 의미로 약속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다른 아들인 ‘마할살랄하스바스’는 ‘부패하기 쉽고 파멸이 임박했다’는 뜻으로 유다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사야는 삶의 대부분을 예루살렘에서 보냈고, 웃시야 때부터 히스기야 때까지 4대에 걸쳐 예언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탈무드를 비롯해 유대교 전승에 따르면, 므낫세 왕 때 박해자들에 의해 톱으로 처형당한 히브리서 11:37의 주인공이 바로 이사야라고 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성전에 올라갑니다. 한편으로는 웃시야 왕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나라에 위기가 온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병에 걸린 웃시야의 죽음으로 부정의 역사가 끝나고 새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합니다. 이사야는 환상 가운데 높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보았다’는 말은 육안으로 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령한 눈으로 보았다는 뜻입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우리도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아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령한 눈으로 보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비전을 갖게 됩니다.
 
이사야가 본 환상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진짜 왕이 누구인지를 보여 줍니다. 유다를 다스리는 주체가 다윗의 보좌에 앉은 왕도 아니요 근동의 패권국가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바로 자신들의 왕임을 알아야 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것은 하나님의 왕권을 상징하며, 그것이 높이 들려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나타냅니다.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것은 그 자리에 영광스럽고 충만하게 임재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스랍들은 이곳에만 등장하는 천상적 존재로,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에 있는 그룹들과는 구별됩니다. ‘스랍’은 ‘불타다’라는 뜻의 동사 ‘사라프’에서 파생한 말로 문자적으로는 ‘불타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이들은 사람처럼 얼굴과 발을 가졌으나 여섯 날개가 있는 영적인 존재들로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주변에 있습니다. 그들은 두 날개로 날며, 다른 두 날개로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 자신들이 드러나지 않도록 겸손하게 얼굴을 가립니다. 남은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는데, 이는 제사장이 회막에서 섬길 때 하체를 가리는 것과 유사하게 하나님 앞에서 수치를 가리기 위함입니다(출 28:42). 스랍들은 서로 화답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찬양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세 번 찬송함으로 최상급을 강조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별됨 혹은 초월성을 강조하고,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합니다. 땅이 요동하고 연기가 가득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에 동반하는 전형적인 현상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운명을 결정하십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도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날수록 부정한 백성에 대한 심판은 더 강렬해질 것입니다.  

- 자신에 대한 깨달음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백성을 심판하기 위해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를 본 순간 자신의 부정함을 깨닫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6:5) 화로다(woe to me) 이제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 고어입니다. ‘저주받았다’, ‘정죄받았다’는 뜻을 가집니다. 캘리포니아에는 지진이 많습니다. 지난주에도 LA 인근에 진도 4.2의 지진이 있었습니다. 지진이 나면 건물을 검사한 후에 복구되기 힘들 정도로 부서졌으면 ‘condemned’라는 딱지를 붙입니다. ‘더 이상 살 수 없는 상태’가 바로 woe가 가지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이사야가 자신을 “입술이 부정한 사람”으로 발견한 것은 웃시야 왕이 죽은 때에 앗수르의 침입을 걱정하며 하나님에게 나라를 위해 기도하던 자신이 오히려 백성과 함께 자신도 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망하게 되었도다”의 동사는 수동태 완료형입니다. 이것은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후 완전히 파괴되어 정적만 남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사야가 자신이 앞으로 망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미 완전히 파괴되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이사야는 도대체 무슨 잘못을 범했을까요? 5절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을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입은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는 대표적 기관으로 입술의 부정은 마음의 부정과 동일시됩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선지자로서의 자격 없음과 감히 하나님에게 기도를 할 수 없는 자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라는 말은 그의 부정함이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의식에서 나왔음을 의미합니다. 부정한 물건이나 사람과 접촉하면 그 사람도 부정해지는 것처럼 이사야가 부정한 이스라엘에 속했기 때문에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그때 스랍 천사가 단에서 핀 숯을 가져와 입에 대면서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선언합니다. 이 숯불은 제물을 태운 것입니다. 희생제사에 의한 죄 사함의 효력이 발생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어야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입에 닿은 숯불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그분의 보혈이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도 깨끗케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사야가 보았던 거룩한 곳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자”(롬 3:24)가 되었습니다.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서 “의롭다 함을 얻는 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거룩, 거룩, 거룩을 외치는 그 보좌 앞에 선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자신 안에 내세울 것이 없음을 인식합니다. 우리는 매일 이 보좌를 경험해야 합니다.

- 사명에 대한 깨달음
하나님은 하늘 어전회의 결정을 이스라엘에게 전달할 메신저를 찾으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물으시니 이사야는 선뜻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답합니다. 자기는 죄를 용서받고 정결케 된 사실에 감격하여 하나님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백성에게 전해야 할 내용에 대해 알려 주십니다. 9하반절의 원문을 직역하면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가 됩니다. 심판은 이미 작정되었기에 이 심판에서 건짐 받을 수 없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면 왜 선지자를 보내십니까? 그것은 그들이 경고의 말을 듣지 못했다는 변명을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이 질문은 단순히 때에 대한 정보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빨리 종료되기를 바라는 소원이 담긴 수사적인 질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답은 비관적입니다. 성읍이 무너지고 토지가 황폐하게 되고, 사람은 칼에 죽고 포로로 잡혀갈 것이며, 십분의 일이 남았을지라도 그것마저도 삼키운 바 된다고 합니다. 철저하고 확실한 심판입니다. 십분의 일은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에스겔서에서 포로로 잡혀가 있는 그들이 얼마나 악하며, 그래서 거기서 심판을 맞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겔 2:3-7). 이스라엘의 황폐화는 산헤립의 침입부터 시작하여 바벨론의 세 번의 침입을 거쳐 마지막 멸망까지로 보아야 합니다. 이 서론적인 메시지는 이사야서 전체를 요약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책망과 거기에 따르는 징계, 그리고 회복을 앞으로 이사야서에 반복하며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 때로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소명을 받은 순간부터 머뭇거리거나 후회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구원을 얻은 신앙인이라면 이사야가 경험한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그분을 믿고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합니다. 이사야가 죄 사함과 헌신으로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처럼 성도된 우리들도 우리를 부르신 분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그것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

사명자는 예배자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은 예배가 어땠는지 평가하시고 결과를 알려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칫하면 십년 이십년 예배에 참석하였을지라도 하나님께 열납되는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을 예배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단지 주신 사명만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사람들은 예배자입니다. 예배는 문자적으로 코가 납작해질 정도로 바닥에 완전히 엎드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대상에게 자신을 완전히 낮추어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과 대면을 통하여 예배자가 되어가는 이사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사야가 환상 가운데 하나님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거룩하다’‘높이 들린 보좌’이런 표현들은 왕에게 쓰는 것들입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에게 쓰던 표현을 하나님께 사용합니다. 그분의 옷자락이 성소를 뒤덮습니다. 권능과 임재가 너무 강하여 도무지 빈틈이 없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 자신을 정죄 받은 사람으로 여깁니다.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이나 생각들이 악하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데 우리는 거룩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찬양을 하고 설교를 듣고 헌금을 합니다. 교회당 문을 나가면서 오늘 예배 잘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자신의 참 모습을 보며,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순간이 없었다면 그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회개 없는 예배를 기뻐 받지 않으십니다. 이사야가 회개할 때, 천사가 번제단에서 와서 이사야에게 용서를 베풉니다. 예배가 진정으로 느껴질 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할 때, 우리 죄성을 회개할 때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덧입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용서받은 사람으로 번제단을 떠나게 됩니다. 이사야는 예배를 통하여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웃시야 왕을 섬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영원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준비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섬길 준비가 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드릴 각오가 되었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이러한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동안 어떻게 예배를 드리셨습니까? 예배 중에 시선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까? 예배보다 더 귀한 일들을 당장 해야 할 것처럼 조급해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명자가 되기 원하십니까? 먼저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이 자리에 함께 성도들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예배자, 하나님께 통회자복하며 비워진 곳에 은혜로 채움을 받는 예배자, 죄사함의 확신을 가진 예배자,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예배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을 남기는 귀한 사명자들이 되어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나가면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왕이 죽었을 때 세상은 끝이 났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나라가 안팎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을 때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면서 철저하게 입술의 부정함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사함과 정결함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부르심은 하나님 중심의 사건입니다. 각 사람을 향한 인생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한 이사야의 응답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즉각적이고 헌신적이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부르심은 또한 특권이자 사명입니다. 이사야 6장은 이사야가 사명자로, 예배자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사야가 드린 예배를 바로 오늘 우리가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일을 해보겠다고 나서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 진정으로 통회하고 자백하는 경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사명자가 됩니다. 천국은 예배로 충만한 곳입니다. 누구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곳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지금 드리는 예배는 장차 천국에서 드릴 것을 연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온 교우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각자를 돌아보아 온전히 죄를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서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럴 때 이사야와 같이 비전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명자, 예배자가 되며 우리 교회는 새 교회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