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비전의 사람 사무엘

Author
Myung Myung
Date
2020-07-21 21:48
Views
330

최근 COVID-19 확진자의 수가 급증하다보니 지난 주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다시 행정 명령을 내려 non-essential로 규정된 업종은 문을 닫도록 했습니다. 활동이 위축되다 보니 잠시 반짝 하던 사업이 다시 어려움에 빠진 교우들이 있습니다. 사회적 격리가 길어지다 보니 우울증에 빠진 교우들도 있습니다. 교회당에서 드리는 예배도 non-essential로 규정되어 지난 5월처럼 온라인 예배를 드리기 위한 최소의 인원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지난 창립주일을 은혜 가운데 잘 드린 후에 행정 명령이 내린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나눈 것을 그리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코로나 사태 이전과 이후의 삶이 너무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현 상황을 지혜롭게 극복해야겠습니다. 
 
오늘은 비전의 사람 시리즈 6번째 시간으로 사무엘을 다룹니다. 사무엘이 살던 사사 시대 말기는 요즘처럼 혼돈과 격변의 시대였습니다. 사사 시대에 모세와 여호수아를 사로잡았던 강력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약해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무엘은 왕정 시대의 초석을 놓으며 쇠잔해가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비전의 사람으로 활약했는지 살펴보면서 그의 삶을 통하여 혼돈과 격변의 시대를 헤쳐 나가는 비결을 얻고자 합니다. 

사사 사무엘(7장) 
사무엘은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옮겨가는 전환기에 마지막 사사로서 활동했습니다. 왕정을 세우는 역할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그를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드리는 기도에서 이미 예언됐습니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2:10). 사무엘은 왕정을 통해 세우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선택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삼상 7장을 보면 선지자 겸 사사로서의 사무엘이 통치한 시대를 그리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블레셋의 위협 속에서 미스바 성회를 통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중재자로서 백성의 간구를 여호와께 전달하고 여호와의 응답을 백성에게 전함으로 선지자의 역할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의 침입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사사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정 요구 
그런데 삼상 8장은 사무엘의 중재와 여호와의 도움으로 블레셋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안전하게 살 수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 제도를 거부하고 주변 나라들의 경우처럼 세습적인 왕정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신정적 사사정치를 훌륭하게 실천하는 7장을 백성들이 왕정을 요구하는 이야기 앞에 위치시킴으로 이스라엘이 왕정을 요청할 만한 정당성이 없음을 보여 줍니다. 열방 중 지극히 미미한 존재였던 이스라엘을 여호와께서 열방으로부터 구별함으로 지금의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세속적인 정치적인 집단으로의 변화를 시도합니다. 

- 사무엘의 아들들의 비행(8:1-3) 
사무엘이 연로하게 되자,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삼게 됩니다. 사사직은 제사장직과 달리 세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무엘이 자신의 아들들을 사사로 세운 것은 이례적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무엘과 다르게 뇌물을 받고 정직하게 판결하지 않아 백성의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을 연상케 합니다. 사무엘이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아들들의 비행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비행은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는 동기로 작용합니다. 아니러니 하게도 왕정도입을 반대한 사무엘이 간접적이지만 왕정을 시작하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 왕을 요구하는 장로들(8:4-5)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와 왕을 세워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들은 사무엘이 늙었다는 것과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무엘과 달리 사사직을 온전하게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듭니다. 그런데 장로들의 말을 살펴보면 다른 나라들을 부러워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비조직적인 사사직의 비효율성에 비해 왕정이 갖고 있는 중앙집권적인 효율성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열방과 같이’되기를 원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태도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많은 민족 가운데 구별하셔서 그분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직접 통치하시는 민족입니다. 열방과 같아지려는 이스라엘의 욕망은 출애굽의 구원 사건을 통해 맺어진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구문을 직역하면 ‘그것은 사무엘의 눈에 악한 것이어서’가 됩니다. 인간 왕의 다스림을 받게 해 달라는 부탁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것이기에 사무엘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이 문제로 여호와께 기도하자,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구한 것을 다 들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의 요청을 기뻐하셔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의도를 정확하게 지적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지금까지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사사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통치해 오셨습니다. 왕정 요구는 정치적인 독립선언과 같은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여호와께 대한 배반의 성격을 지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계속적인 불순종과 배교의 모습을 보여 왔는데 이제는 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왕정은 이미 예고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에는 왕정의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창 17:6) 야곱은 유다 지파의 탁월성과 다윗의 왕조 언약을 예언했습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발람조차도 이스라엘 왕의 탁월성을 예언했습니다(민 24:7). 신 17:14-20은 이스라엘의 왕정을 예상하며 왕의 자격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어떤 왕도 진정한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대리자일 뿐입니다. 왕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선택된 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백성 앞에 겸손하며, 물질에 대해 절제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왕정에 대해 계속 언급되었는데 왕을 요구한 일이 왜 잘못입니까? 그들이 왕을 요구한 근본적 이유는 ‘모든 나라와 같이’, ‘다른 나라들같이’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삼상 8:5,2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와 같이 왕을 세워 달라고 하면 이방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과 ‘제사장의 나라’의 비전이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8:9에서 ‘그러므로’는 ‘이스라엘이 계속하여 불순종하고 배신하므로’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백성의 요구에 따라 왕을 세우되 왕의 제도에 관해 엄히 경고하고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은 왕에 대한 기본적인 이미지를 ‘취하는 자’로 묘사합니다. 왕은 세금, 압수, 징병 등을 통하여 백성들로부터 끊임없이 ‘취하게’될 것임을 경고합니다. 이제 이스라엘도 주변 나라들과 동일하게 왕권에 정치적-사회적 예속을 당해야만 합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스라엘은 자기 소유의 상당 부분과 권리를 왕에게 양도해야만 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경작한 땅에서 낸 소출을 누리며, 집안의 일들에 대해 독립적인 결정을 할 수 있었던 이스라엘이 자유인의 지위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종’의 신분에서 왕의 종으로 바뀌게 됩니다. 세습적인 왕정이 내포하는 남용과 부패의 가능성은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제한된 사사 직분의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정이 걸어온 역사는 사무엘의 경고가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을 세운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8:18).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의 가장 기본적인 메커니즘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과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이 메커니즘이 이상적으로 작동되었을 때가 사사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부르짖을 때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는 메커니즘이 더 이상 작동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왕의 지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는 왕이 이스라엘을 구원해야만 합니다. 만약 왕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못할지라도 더 이상 하나님의 도움을 바랄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허락(8:19-22) 
사무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백성들까지 나서서 왕정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좀 더 완강합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여기에서 백성들이 말하는 ‘싸움’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우리’라는 표현이 특별히 강조되는데, 이는 여호와의 왕권에 대한 거부를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했던 전쟁은 여호와께서 앞장서서 싸우시는 ‘여호와의 전쟁’(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라는 말은 이제는 다른 나라들과 같이 자신들이 세운 왕을 앞장 세워 전투를 치르겠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요구가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왕권에 대한 거절임을 알면서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들의 요청이 뿌리 깊은 죄성, 곧 여호와께 대한 불순종과 반역에 기인하고 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평강과 은혜의 다스리심이 없을 때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참한지를 맛보고 경험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다시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에 갈급함을 느끼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왕권의 남용이 가져오는 폐해로 인한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모두 ‘하나님의 응답’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정 요구는 본질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거부이며 이스라엘의 뿌리 깊은 불신앙의 표현입니다. 사울을 통해서 시작되는 이스라엘 왕정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새로이 형성될 왕정 제도와 시내산 언약은 과연 공존하는 관계로 이룩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왕정 제도가 시내산 언약을 대치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야기합니다. 사무엘상 기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 삼상 12:14-15을 중심으로 그의 논리를 전개합니다. “너희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의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며 또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면 좋겠지마는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이스라엘의 왕정 도입을 언약 파기 행위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왕을 이스라엘의 언약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즉 구 제도(신정)가 신 체제(왕정)를 수용할 뿐 아니라 과거의 언약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통치를 거부하고 반역하는 백성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며 그들의 새 요구를 껴안으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사무엘의 퇴임 연설(12장)
삼상 12장은 사무엘이 가진 하나님 나라 비전이 종합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사무엘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전통적인 언약 백성의 공식에 기초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추구했습니다. 여기에 왕국의 비전이 더해집니다. 이 왕국의 비전은 이미 창세기와 민수기에서 예언되고 신명기에 규정된 비전입니다. 하나님의 왕권과 이스라엘의 왕정이 합쳐져서 신정적 왕정이 탄생합니다. 사울 왕이 세워지자 사무엘은 그동안의 자신의 시역을 돌아보며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첫째, 자신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때 압제하거나 그들을 속여 재물을 빼앗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 일에 대해 백성, 하나님,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 증인이라고 합니다. 둘째,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를 언급하며 여호와께서 왕이시라고 선포합니다. 왕이신 하나님은 은혜로우셔서 백성을 고통에서 구원하셨고, 공의로우셔서 백성이 여호와를 잊으면 대적의 손에 넘기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백성이 돌이키면 다시 구원자를 보내 고통에서 건져 내셨고, 여호와의 다스리심을 받는 백성은 평안을 누렸다고 합니다. 셋째, 신정적 왕정의 성공 조건은 왕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를 위하여 사무엘 자신도 기도와 말씀을 쉬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왕이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새롭게 시작하는 이스라엘의 왕정은 희망이 있지만, 만일 하나님만 경외하지 않으면 왕과 백성이 함께 망하리라고 경고합니다. 불행하게도 이 위험은 이후 왕정의 역사에서 자주 현실이 됩니다.  

사무엘 스토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 하나님의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사사들이 활약하던 영적 침체기에도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지속됐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약속, 기도의 응답, 사사들의 구원, 하나님의 함께하심, 여호와의 영, 죄에 대한 책망 등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에 끊임없이 개입하시고 영적인 활력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진정한 비전은 하나님 나라의 비전으로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새로운 왕정 시대를 수용한 것은 편의주의나 순응주의를 따른 것이 아니라, 신정적 왕국을 세우려는 하나님의 비전을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다. 신정의 원칙은 언약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정의 형식은 시대에 따라 변했습니다. 왕정 시대에 사사를 세울 수 없고, 사사 시대에 왕을 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언급된 것을 면밀한 신학적 검토 없이 문자적으로 따르려 한다면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 사역을 훼손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법, 정결법, 절기 등을 지금 문자 그대로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법이나 제도에 담긴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관점에서 보고 우리의 삶에 실천해야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지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킵니다. 제사를 드리지 않지만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영과 진리를 예배를 드립니다.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은 오늘날도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동참할 사람을 부르시고 그 과정에서 우리를 새롭게 빚으십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새로운 비전을 받아들이고 이를 이루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듯이 우리 또한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성도의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방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불러 내셔서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출 19:5-6). 그런데 이스라엘이 열방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적을 거스르는 행동이요, 제사장 나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행동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하여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 새로운 일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번에 내린 행정명령으로 50명 가까이 모이던 교우들이 당분간 모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행정명령의 골자를 보면 필수적인 업종만 문을 열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예배가 비필수적인 것으로 분류된 것이 우리를 씁쓸하게 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세속화의 시대에 가장자리로 밀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세상이 좋아 보이고, 효율적으로 보여 세상을 따라가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을 좇던 인생들의 결국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있으나마나 한 존재가 된다면 교회는 머지않아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열국 중의 하나가 아니듯, 그리스도인도 이 세상에 속한 백성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선포하고 이루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만이 왕이심을 분명히 아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기본적인 도리이자, 생활 원리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교회는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나 위협 속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셨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과 소금과 빛이요 산위의 도성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때마다 구원으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면 인간은 할 것이 없지 않겠는가,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순종을 배제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순종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백성의 순종을 통해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백성이 그 나라의 왕이신 주님께 순종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믿음과 순종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순종이라는 열매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선하고 의로운 길을 가르치겠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선하고 의로운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그 가르침에 집중해서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서 주님만이 주시는 참된 평강과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나가는 말
사무엘은 혼돈과 위험 속에서 하나님의 비전에 이끌려 살며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무엘은 사사로서 나라를 구원하였고,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왕을 세우는 ‘킹 메이커’이면서 동시에 폐위도 시키는 ‘킹 브레이커’의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경건한 어머니의 기도로 태어난 사무엘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점도 없이 흠도 없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며 아름다운 마무리를 지은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회적 격리로 인해 달라진 환경에서 자칫하면 침체된 삶을 살기 쉽습니다. 혹시 삶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마치 주님이 떠나신 것 같은 메마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삶 속에 은혜와 평강과 기쁨이 없고 곤고한 삶이 지속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다시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생수의 근원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사인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라고 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를 의지하며 하나님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무엘 때와 같이 영적 침체기와 과도기적인 성격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COVID-19으로 인해 우리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무엘과 함께 일하셨던 하나님이 오늘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무엘 같이 하나님 나라의 안목을 가진 비전의 사람이 되고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전에 이끌리어 각자에게 주신 사명 끝까지 잘 감당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