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비전의 사람 기드온

Author
Myung Myung
Date
2020-07-12 17:19
Views
515

“꿈은 이루어진다”2002년 한국에서 World Cup 대회가 열렸을 때 많이 언급된 구호였습니다. 본선에서 1승을 거두기도 힘들어하고 16강에만 진출해도 만족하던 대표팀이 아무리 홈그라운드에서 경기를 하였더라도 강력한 스페인팀이나 이탈리아팀을 제치고 4강까지 올라간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습니다. 그야말로 꿈이 이루어진 대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통 말하는 꿈은 개인이나 단체가 가진 소원이나 목표를 뜻합니다. 성경적으로 비전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환상’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이 개인과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가지신 뜻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현재의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불가능해 보여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비전을 자기 비전으로 삼고 이를 위해 자신을 드리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럴 때 비전은 개인과 공동체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됩니다. 지난 한 달 동안 비전 시리즈 설교에서 아브라함, 요셉, 모세와 여호수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 모두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믿음으로 붙들고 하나님의 귀한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한 페이지씩을 담당했습니다.

1995년에 팔로마한인교회가 창립되었는데 벌써 25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40세에 이곳에 왔는데 이제는 은퇴를 몇 년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동안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느라 애쓰신 모든 교우들, 그리고 함께 신앙생활 하다가 다른 곳으로 떠나신 분들까지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사사들 중의 한 사람인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개입하셔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비전을 가진 삶을 살게 하셨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상황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영적 침체기에 해당합니다. 350년 동안 ‘백성의 죄 -> 이방의 억압 -> 백성의 부르짖음 -> 사사를 통한 구원’이라는 패턴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이 점점 악화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를 싫어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함으로써 총체적인 침체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와 사사를 통한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이 여전히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여기고 계심을 보여 줍니다. 드보라가 가나안 왕 야빈, 강력한 철병거를 소유한 시스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후 40년 동안 평화를 누렸지만 이스라엘은 ‘또’‘여호와의 목전에’악을 행했습니다(6:1). 이번에는 가나안 땅의 동쪽에 사는 미디안, 아말렉, 동방 사람들이 연합해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미디안 족속은 아브라함의 후처인 그두라의 자손으로 에돔의 남쪽에 살던 유목 민족이었습니다. 미디안은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게 패한 적이 있으나(민 31:1-12), 200여 년이 지난 기드온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압제자로 등장했습니다. 추수 때만 되면 떼를 지어 쳐들어와 토지소산을 강탈해 갔고, 양과 소와 나귀도 남김없이 빼앗아 갔습니다. 그들은 아예 장막을 치고 장기간 체류하면서 약탈했습니다. 그들은 ‘메뚜기 떼’와 같이 많았기에 이스라엘 땅에 남아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는 곳을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어 그곳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예 쫓아버리려는 심산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으로 피신해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만들고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지 않으니 미디안 사람들을 당할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7년 만에 비로소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 부르짖음은 침체에 빠진 언약 백성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돌파구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고 믿음으로 부르짖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버티다가 안 되니 하나님께 외쳐 보자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셨습니다. 전에는 이스라엘이 부르짖을 때에 사사를 세워 그들을 건지셨는데, 이번에는 선지자를 먼저 보내셨습니다. 그 선지자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의 큰일을 백성들에게 상기시키는 동시에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음을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건지시는 것만을 원치 않으시고 그들이 돌이켜 여호와만 섬기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기드온을 부르시는 하나님 
어느 날 여호와의 사자가 오브라에 도착합니다. 오브라가 기드온의 아버지인 요아스의 소유였다는 사실은 그 집안이 부유하고 영향력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때 기드온은 밀을 타작하고 있습니다. 보통 밀 타작은 넓은 마당에서 소가 끄는 타작기를 이용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바위를 파서 만든 좁은 포도주 틀에서 타작합니다. 더욱이 ‘타작하다’로 번역된 동사 ‘하바트’는 ‘막대기 같은 것으로 떠는’행동을 묘사합니다. 기드온의 행동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릅니다. 개역개정에는 “큰 용사여”라는 호격이 먼저 나오지만, 히브리어 본문의 순서는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는 선언 이후에 ‘큰 용사’가 나옵니다. 이러한 어순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기드온이 큰 용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포도주 틀에 숨어서 작업하는 기드온에게 ‘큰 용사’라는 타이틀이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소심한 기드온의 현재를 보신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보셨습니다. 그를 ‘큰 용사’로 부르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해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약속이요 비전입니다. ‘힘센 용사’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권능을 기드온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의 말을 듣고 기드온이 볼 멘 소리로 따집니다.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요? 그러면 왜 우리가 이 모양 이 꼴로 살아갑니까? 우리의 조상들이 걸핏하면 출애굽 사건을 떠올리며 하나님의 권능을 이야기했는데 만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그때와 같은 기적이 왜 지금은 나타나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미디안에게 이토록 시달려야 합니까? 기드온의 불평은 그 당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을 반영합니다. 기드온이나 이스라엘이 알지 못한 것은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그들을 버려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상한 아버지처럼 기드온의 원망 섞인 투정을 받아줍니다.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6:14) 기드온은 이 어려운 상황에 전과 같이 어떤 사사가 나타나서 해결해주지 않을 까 생각하였을 텐데 하나님은 미디안과 싸울 사람은 바로 기드온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이 너의 힘’이란 기드온이 현재 가진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에게 주시는 힘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그분이 주시는 힘을 의지하여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압제에서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자신이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하겠습니까? 우리 집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유력한 집안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 형제 중에 제일 별 볼일이 없는 자입니다. 힘없고 연약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임마누엘의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6:16) 믿음으로 순종의 첫발을 내디디기만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는 말입니다.  
 
표징을 구하는 기드온 
하나님의 사자가 하는 말씀을 들을 때 힘이 나는데, 눈앞에 있는 미디안을 보면 두려워집니다. 그래서 말씀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를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전부 네 번에 걸쳐 표징을 보여 주십니다. 기드온은 자기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곳을 떠나지 마시라고 요청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약속하신 다음에도 증거를 보여 달라는 믿음 없는 행동을 용납하십니까? 기드온을 하나님의 비전을 수행할 사람으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오늘도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급히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전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서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립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고기와 무교전병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쏟으라고 명령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그것들을 살랐습니다. 기드온이 놀라는 동안 여호와의 사자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이에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으니 자기가 꼼짝없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려움에 가득한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고 위로하십니다. 이에 기드온은 여호와를 위해 제단을 쌓고 ‘여호와 샬롬’, 다시 말하면 “여호와는 평강”혹은 “평강을 주시는 여호와”라고 부릅니다. 기드온은 바위에서 음식물이 불 탄 흔적과 자기가 쌓은 단을 보면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집안의 우상을 제거하는 기드온 
그날 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그의 아버지 소유의 7년 된 수소를 끌고 와서 아버지 소유의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에 있는 아세라 상을 찍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산성 꼭대기에 하나님을 위해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끌고 온 수소를 잡고,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외부의 적인 미디안을 대적하기 전에 먼저 내부의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바알의 단이 무너지기 전에는 미디안이 무너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야밤을 틈타 집안에 있는 바알의 단을 헐어 버리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 내 불태웁니다. 하나님의 단을 수축하고, 아버지 집에 있는 7년 된 수소를 가져다가, 그 나무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없앤 것은 이스라엘의 죄의 근원이 되는 우상 숭배를 없앤 것입니다. 이튿날 마을 사람들은 기드온의 소행임을 알아내고 그를 죽이려고 몰려듭니다. 비록 기드온의 아버지의 소유였지만 바알과 아세라가 마을을 지켜 주고 풍요를 준다고 믿었기에 격분한 것입니다. 이때 아버지 요아스가 뜻밖에 나섭니다.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6:31). 만일 바울이 신이면 그가 기드온을 직접 심판할 것이니 기다려 보자고 합니다. 사람들의 도움 없이 바알이 스스로를 위해 싸우는지를 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결국 바알은 아무 능력도 없는 우상이었다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납니다. 이 일을 계기로 마을 사람들은 여호와를 섬기게 되고 기드온은 ‘여룹바알’로 불리는데(6:32), 이는 바알과 다투어 이긴, 믿음과 비전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기드온은 여호와의 영이 임하자 본격적으로 미디안과 전쟁 준비를 시작합니다. 

우상을 파괴함으로 믿음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기드온이지만 아직도 두려움을 다 떨쳐 버렸던 것은 아닙니다. 기드온은 양털 뭉치를 놓고 두 번씩이나 하나님께 표징을 구합니다(6:36-40). 한번은 타작마당에 둔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주변 땅은 마르게 하시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겠다는 것이고, 그것을 목격하고 난 뒤에는 그 반대로 양털만 마르게 하고 주변 땅은 이슬에 젖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비슷한 요구를 반복하는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요구대로 두 번째와 세 번째 표징을 행하십니다.  

기드온과 300
두 번의 양털 시험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얻은 기드온은 아침 일찍 그와 함께하는 자들과 하롯 샘에 진을 칩니다. 미디안 연합군의 규모는 13만 5천명이었습니다(8:10). 반면에 기드온과 함께 한 이스라엘 군대의 규모는 3만 2천 명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백성이 너무 많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슬러 자신들의 힘으로 미디안을 이겼다고 자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기드온과 함께 있는 백성 중에서 두려워 떠는 자들을 돌려보내게 하십니다. ‘떨림’이라는 뜻의 하롯 샘에서 두려워 떠는 자들을 돌려보내자 군대의 수는 1만 명으로 줄어듭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아직도 많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드온과 함께 갈 사람들을 친히 추리시겠다고 하시며 백성을 데리고 물가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7:5에 의하면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로 구별합니다. 물을 마신 자세를 두고 300명이 선택된 이유를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본문이 말하는 본질을 놓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앞을 보고 물을 핥는 것은 싸울 준비가 된 것이기에 뽑았다고 그럴듯하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을 구별한 목적은 사람 수를 충분히 줄여서 이스라엘이 오직 여호와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3백 명을 추리되 자질이나 능력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선택하셨습니다. 만약 무릎을 꿇고 정신없이 물을 마신 자들이 300명이였다면 하나님은 아마 그들을 선택하셨을 것입니다. 결국 모였던 최초 병력의 1%도 남지 않았습니다. 미디안 연합군과 비교하면 4:1에서 450:1로 바뀌었으니 숫자상 절대 열세입니다. 하나님은 전쟁의 승패가 숫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깨뜨리시길 원하셨고 헌신된 소수정예를 통해 영광을 얻고자 하십니다.  

네 번째 표징은 적진에서 적들의 고백을 통해서 듣게 됩니다(7:13-14). 미디안 진영을 자신에게 넘겨주었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기드온이 두려워하자, 하나님은 미디안 진영으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기드온이 부하와 함께 내려가자 한 미디안 병사가 자신이 꾼 꿈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옆에서 꿈 이야기를 듣던 친구는 하나님이 미디안과 모든 진영을 기드온의 손에 넘겨주신 것이라고 해몽합니다. 기드온 군대에 대한 두려움이 미디안 병사들 사이에 만연돼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으신 것입니다.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보리떡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큰 용사가 되어 견고한 진을 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꿈과 해몽을 듣고 비로소 용기를 얻은 기드온은 300명에게 횃불을 감춘 항아리와 나팔을 들게 하고 전장으로 나아갔습니다. 기드온은 이 전쟁을 이끌어 가시며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외치면서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외치게 했습니다.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8:18) 그러다 보니 기드온이 300명과 치른 전쟁은 하나님을 위한 전쟁에서 기드온을 위한 전쟁이 되어갔습니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짓지 못한 기드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드온의 능력에 감명을 받고 기드온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단지 기드온에게만 왕권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녀들이 대대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세습적인 왕권까지도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것이라며 그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8:23) 여기서 기드온의 이야기가 끝났다면 그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지은 하나님의 사람들 중의 하나로 꼽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왕이 되라는 요청을 거부하는 대신, 전리품 중에서 귀고리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에봇을 만들어 자신의 성읍인 오브라에 두었습니다. 금 에봇을 만든 목적은 하나님을 기리거나 그분의 승리를 기념하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스라엘은 오브라를 성지로 삼으며 금 에봇을 음란하게 섬겼습니다. 결국 금 에봇은 기드온과 이스라엘에게 올무가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많은 아내를 거느리며 70명이나 되는 아들을 두었고, 첩까지 거느리며 실제로 왕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비록 왕이 되어 달라는 제안은 거절했지만 그는 왕 같은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을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은 다시 바알을 섬겼습니다. 부르심을 받을 때 분명하던 하나님 나라 비전이 승리를 계기로 흐려지는 모습은 우리를 당혹케 합니다. 사사들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믿음의 사람들이었지만 옷니엘을 제외하고 나름대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이름이 믿음장이라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11:32). 비록 아름다운 마무리를 짓지 못해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하나님은 기드온을 믿음의 사람들의 반열에 올려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미디안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겨자씨만한 믿음도 보시고 기뻐하시고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가 사역자의 완전함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초점이 하나님을 떠나 사람에게 맞춰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가면서
지금부터 3150여 년 전 기드온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미디안 사람들이 두려워 밖에 마음대로 다닐 수 없었습니다. 요즘은 COVID19을 인하여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고 집콕을 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큰 용사여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부르십니다. 비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시는 것을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고 받아들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나아갈 때 이루어집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하나님의 비전을 발견해 즐거워하며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성실과 인내로 최선을 다하는 비전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드온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을 먼저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 시대의 아픔이나 위기와 관련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키시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영적 민감함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이나 부족함을 핑계 대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숫자보다 외적인 환경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우선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믿고 내게 주신 은사를 활용할 때 크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교회는 크나 작으나 다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내년 창립주일에 이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릴 때는 비전이 이끄는 삶을 사는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을 나누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