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환경을 초월한 감사

Author
Myung Myung
Date
2020-11-22 19:17
Views
363

조금 전에 우리가 부른 찬송가 66장은 독일의 목사였던 Martin Rinkart가 작사한 것입니다. 그가 이 가사를 1636년에 썼는데, 30년 전쟁이 한창일 때요 그의 목회에서 가장 힘든 때였습니다. 전쟁이 치열하다 보니 자기 교구에 속한 사람들이 그 한 해 동안 무려 5000명이나 죽었습니다. 평균 잡아 하루 15명, 많을 때는 하루 40명의 장례를 치렀는데 그들 중에는 자기의 부인도 있었습니다. 그의 교구는 전쟁, 기근과 질병으로 인하여 피폐해졌습니다. 그런데 아내를 잃은 슬픔가운데서도 그는 몰려드는 난민을 헌신적으로 돌보면서 이 찬송시를 썼습니다. “감사와 사랑을 다 주께 드리어라 저 높은 곳에서 다스리시는 주님 영원한 하나님 다 경배하여라 전에도 이제도 장래도 영원히 아멘”아내를 잃고 교우들을 잃은 슬픔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깨달으며 Rinkart목사가 쓴 가사에는 환경을 초월한 감사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한 해 동안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삼대절기를 지키는데 그중의 둘이 추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오순절이라고도 불리는 맥추절은 거둔 첫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이라고 불리는 장막절은 광야 생활 가운데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 뿐 아니라 한해 농사를 지으면서 거둔 수확을 인하여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절기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에게 베풀었던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신앙을 이어갔습니다. 오늘날은 과거 농경시대와 같이 곡식을 거두며 추수를 하지는 않지만 감사절을 맞이할 때마다 한해를 돌아보면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우리의 믿음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COVID-19으로 인하여 최근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가주민의 94%가 purple tier가 발령된 지역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오후 10시부터 오전 5시까지 야간 통행제한 규정까지 생겼습니다. 자영업 하시는 분들을 중에는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습니다. 서로 만나는 것을 조심스러워 하다 보니 성도의 교제가 약해졌습니다. 격리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심리적으로 침체에 빠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독감 시즌까지 겹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금년은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백신이 개발되어 FDA의 긴급승인이 나는 대로 곧 배포될 예정이지만 65세 미만의 사람들에게까지 접종하려면 몇 달은 족히 걸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데도 감사할 수 있습니까? 성도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감사는 환경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일 년 365일 어느 날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날이 없지만 특히 감사절은 진정한 감사의 자세를 회복하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은 광야 여정을 시작한 출애굽 1세대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그들이 왜 감사하지 못하는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살펴보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감사자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이스라엘이 감사해야할 이유 


하나님께서 내리신 열 가지 재앙을 인하여 애굽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침내 400년 이상 종살이 하던 애굽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이스라엘을 풀어준 것을 후회하고 군대를 모아 이스라엘을 추격했습니다. 그들은 뒤에서 점점 다가왔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진퇴양난의 위기에서 이스라엘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홍해를 가리키자 바람이 밤새도록 불면서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동안 애굽 군대는 구름기둥에 막혀 이스라엘을 추격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자 애굽 군대도 뒤이어 따라 들어왔으나 홍해가 다시 합쳐지는 바람에 그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모세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큰 구원을 행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모세의 누나 미리암도 여인들과 함께 소고를 잡고 춤추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섬겼던 나일강 신, 개구리 신, 파리 신, 태양 신은 전부 헛것이고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인 것을 이스라엘 백성이나 애굽 사람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싸울 전력도 갖추지 못한 이스라엘 노예들이 당시 최강대국인 애굽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병거가 이끄는 애굽 군대의 추격을 물리치고 이스라엘 백성이 무사히 홍해를 건널 수 있었습니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감사였습니다.   


 


쓴 물을 인한 원망


가나안으로의 여정은 믿음의 여정이요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감사를 드리며 나아가는 여정이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홍해에서 베푸신 구원을 인하여 감격의 찬송을 부른 것이 불과 3일 전입니다. 그들의 감격은 이내 사그라지고 감사도 사라졌습니다. 홍해를 건넜다고 끝난 것이 아니라 그들 앞에 물도 없고 길도 험한 광야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2절에서 ‘광야’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반드시 광야를 통과해야 합니다. 모세가 백성을 홍해에서 수르 광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광야는 팔레스타인과 애굽 사이에 있는 시내 반도 북서쪽의 지역입니다. 싸움에 나갈 만한 장정이 60만이요 노인들과 여인들과 어린이들을 합치면 200만은 족히 될법한 큰 무리가 광야를 지난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다리도 아프고 목도 마르고 주저앉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라’라고 불리는 오아시스에 도달했습니다. 그곳에서 물을 마시면서 여행에 지친 몸과 마음을 쉴 생각을 하니 갑자기 발걸음도 가벼워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라의 물은 그 이름대로 써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광야 여정이 힘들어 짜증이 나는데 물까지 써서 마실 수 없으니 더 화가 났습니다. ‘마라’는 ‘쓰다, 괴롭다’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니 마음도 괴로웠을 것입니다. 기쁨이 낙심으로 바뀌고, 낙심이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백성이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을 인도하여 냈으니 당연히 마실 물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모세를 원망하였지만 실상은 모세를 세우신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었습니다. 힘이 들 때마다 그들이 잘 늘어놓던 불평이 무엇입니까? 애굽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공연히 불러내어 힘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가나안에 정착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인가가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이 그저 눈앞에 있는 육신의 문제만 해결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오랫동안 노예로 있으면서 갖게 된 근성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믿음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장래일은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고 당장 마실 물을 내어놓아 갈증을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과 며칠 전 홍해에서 보았던 하나님의 기적을 잊은 듯합니다. 이로 보건대 기적은 그 자체로 온전한 신앙에 이르게 하지는 못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여러 번 보았으나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도리어 대적하였습니다. 성숙한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기초합니다. 백성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기에 원망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에도 쓴 물이 있습니다. 쓴 물과 같은 사람, 사건, 환경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쓴 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좌절하고 낙심합니다. 쓴 물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십니까?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가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는 우리를 깨우쳐 바른 길을 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쓴물이 단물로


모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차아크’라는 히브리어는 가슴을 치며 애통하며 부르짖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은 한 나무를 가리키셨고,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무에 어떤 효능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의 해결책은 나무가 아니라 나무를 통해 물을 달게 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기적은 모세가 지팡이로 애굽의 하수를 쳐 피로 변하게 했던 첫 번째 재앙과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애굽에서는 강퍅한 바로를 꺾기 위해 마실 수 있는 물을 마실 수 없는 피로 바꾼 반면, 광야에서는 불평하는 백성들을 위해 마실 수 없는 ‘쓴 물’을 마실 수 있는 ‘단 물’로 바꾸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쓴물이 달게 되는 기적을 베푸신 후에 백성들을 시험하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께 범죄하면 하나님의 징벌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하나님의 법도를 선언한 것입니다. 애굽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법도와 율례’를 언급하지 않으셨는데, 출애굽하고 나니 언급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은혜로 다스리시지만, 은혜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행하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습니다. ‘법도와 율례’는 성결한 삶을 위한 지침으로 하나님이 복을 받으려면 순종해야 합니다. 시내 산에서 선포될 토라(언약법)를 주시기에(출 20장) 앞서 본문은 법도와 율례를 언급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를 말해 줍니다. 모세가 말한 것은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자발적으로 반응하라는 것과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애굽에 재앙을 내려 애굽 사람들을 벌하였던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법을 잘 지키고 행하면 애굽 사람들에게 내렸던 어떤 질병도 내리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애굽에 내린 여러 가지 질병으로 사람만이 아니라 가축까지도 고통을 받고 죽었던 것을 생각할 때 광야에서의 하나님의 치료의 대상에는 기르는 가축도 포함된다 하겠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라파, 즉 ‘치료하시는 여호와’가 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조건적인 은혜로서 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개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애굽 사람에게 임한 질병이 그들에게도 임하고 그들은 치료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약초나 약품을 사용하지 않고 질병을 치료하시니 신자들도 의사나 의학적 방편에 의존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라의 쓴 물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한 나무를 물속에 던짐으로 고쳐졌습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예가 여럿 있습니다. 엘리사 때에 여리고 성의 물이 좋지 않아 과일을 포함한 토산물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자 하나님은 엘리사로 하여금 물 근원에 소금을 뿌리게 하여 그 좋지 않은 물을 고쳐 토산물이 일찍 떨어지지 않고 잘 익게 하였습니다. 또 히스기야가 병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무화과 반죽을 사용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사 38:21). 바울은 디모데에게 위장와 병을 위해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했습니다(딤전 5:23).


 


마라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때로 백성을 역경으로 인도하지만, 항상 그들을 건져내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과정을 통해 백성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도록 훈련하십니다. 그런데 홍해에서 시내 산에 이를 때까지 3개월간의 여정은 원망,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 헐뜯음, 서로 싸우는 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그럼에도 신실하신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그들을 시내 산으로 데려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것이 형통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말씀대로 행할 때 치유와 회복이 나타납니다. 악한 본성이 치료되고 영적 갈증이 없어집니다. 우리들은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시는 하나님,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언제나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엘림’으로 인도하십니다. 엘림은 12개의 샘과 70그루의 종려나무가 있는 오아시스였습니다. ‘엘림’이란 단어는 ‘큰 나무’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엘림은 그 지역에 사는 유목민들에게 거룩한 성지였습니다. 하나님은 마라에서 겪은 고난을 엘림에서 위로해주셨습니다. 엘림은 행로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쉼을 제공한 곳이었으나 약속의 땅은 아니었기에 백성은 계속해서 나아가야 했습니다.


 


감사를 막는 탐욕


이스라엘 백성은 불과 며칠 만에 출애굽의 감격을 잊고 말았습니다. 400년 이상 노예로 있던 그들을 구원하신 것, 홍해를 갈라 그들을 건너가게 하신 것,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된 것을 생각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여정 자체만으로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니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불평과 죄를 잉태합니다. 그들의 원망은 순전히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현대판 출애굽 1세대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끈질긴 사랑으로 붙드시는데 우리가 만들어 놓은 욕심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때 형통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삶을 mess-up 해놓고는 믿어도 소용이 없다고 불평하며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러다 보면 감사해야 할 상황에서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진정한 감사는 환경을 초월합니다


평상시에는 믿음이 있어 보이지만 진짜 믿음은 위기를 당할 때에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는 구절이 있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이루어졌기에, 바라던 것이 생겼기에 감사한다면 이루어지지 않고 생기지 않으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감사는 성도들에게 선택사항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것, 암에 걸리는 것, 고통을 당하는 것 자체를 인하여 감사할 수는 없지만 사업에 실패한 상황에서도, 암에 걸린 상황에서도, 고통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게 없는 것이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인하여 불평하기보다 이미 주신 것을 찾아 감사하고 앞으로 주실 것을 믿으면서 감사하는 것이 성도의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살아가면서 많은 고난을 겪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고난이 우리의 죄와 허물로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타납니다. 예측할 수 없이 나타납니다. 여러 가지 형태로 다가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고난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고난이나 아픔조차도 사용하셔서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는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라고 하면서 고난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것을 권유합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키우고 우리를 성숙하고 온전한 자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의미를 깨달을 때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잠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누구에게 구합니까?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약 1:5). 시련의 날에 성도는 인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환경을 넘어선 감사의 모습을 우리는 성경과 삶의 현장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셨는데, 박원철 선교사님이 작년 4월 28일 저희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한국에 가셨는데 사모님이 췌장암으로 판정받으셔서 1년 6개월 동안 한국에서 치료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10월 멕시코에 있는 자연치유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부부가 미국으로 오셨습니다. 박 선교사님이 오는 비행기 안에서 적은 “감사십조”를 제게 카톡으로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1.   아내의 질병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더 알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2.   평생 받을 사랑을 지난 1년 6개월 동안 다 받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3.   고통의 시간들 속에서 나 자신을 더 정결케 할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4.   내 눈이 생명의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5.   외롭지 않게 주변에 천사들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6.   평안히 살 때 몰랐던 고난의 신비를 경험케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7.   아내의 고통을 통해 아가페 사랑을 배우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8.   치료 차 미국 방문 길에 손자를 태어나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9.   고난 중에 고난 받는 자들을 도울 수 있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10.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음을 인해 감사합니다 


이것이 환경을 초월한 감사자의 모습입니다.


 


나가면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거룩하게 살아가기를 기대하십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쓴 물 인생이 단물 인생이 되는 비결을 알려 줍니다. 의를 행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갈 때 인생의 쓴 물 앞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리키신 또 하나의 나무가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24).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친히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 결과 성도는 죄 사함의 은혜를 얻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상징합니다. 십자가를 붙들 때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쓴 물 인생을 단물로 바꿔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를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시 37:4). 모든 것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셨다는 은혜에 대한 고백이 있을 때 참다운 감사가 나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을 붙들 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입니다. 여기까지 도우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앞으로도 인도하실 신실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때, 쓴 물도 단물로 바꾸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진정한 마음의 감사는 환경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무엇을 많이 소유함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 자체가 구원과 생명을 소유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때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감사할 때 염려가 사라집니다. 감사할 때 건강해집니다. 추수감사절은 영어로 Thanksgiving Day입니다.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감사할 뿐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감사를 나누어야 합니다. 어느 때보다 어려운 상황에서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지만 감사의 씨를 뿌림으로 풍성한 감사의 열매를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엘림의 풍성함을 예비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베푸실 것을 바라보면서 가나안을 향하여 힘차게 그리고 함께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