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라

Author
Myung Myung
Date
2020-11-15 14:47
Views
621


죄인 된 우리들이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런데 건강이 안 좋아지거나 사업이 힘들어지거나 자기가 뜻한 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감사는 쑥 들어가고 걱정, 근심, 불평에 사로잡히고 기도해도 별로 소용이 없을 것같이 여겨집니다. 참된 예배는 구원의 감사 속에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드리는 심령 속에 기쁨과 평강이 깃듭니다. 감사 생활에 익숙한 사람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며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신실하신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리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달이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은 달이 없지만 11월을 특별히 감사의 달로 지킵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그래서 감사와 관련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합니다.


 


COVID-19 확진세가 최근들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미국 내 확진자가 천만 명을 넘어섰고 하루에 18만명 이상씩 늘고 있습니다. 샌디에고 카운티도 purple tier로 바뀌어 전보다 규제 정도가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도 필수인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은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데 더 타격이 있지 있을까 염려합니다. 백신이 거의 개발이 되었다고 하지만 일반인들에게 제대로 공급이 되려면 내년 중반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보여준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이 보여준 자족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신앙을 가질 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감사를 동반한 믿음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인 것을 보여줍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들이 부지런히 감사의 씨를 뿌리며 풍성한 감사의 열매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11-14절)  


눅 9:51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는 표현은 북에서 남에로 직선 방향이 아니라 두 지방 사이의 경로를 따라 서에서 동으로, 요단 강 건너편을 향해 이동했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한 마을’에 들어가셨고, 그곳에서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을 만나십니다. 길을 가시다고 ‘우연히’들르신 ‘한 마을’에서 그들을 ‘우연히’만나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예수님께 ‘우연’이라는 말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그 마을을 찾아가셨을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셨듯이 예수님께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나병 환자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먼저 찾아가셨을 것입니다.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이 앉은뱅이도 고치시고 앞을 못 보던 소경도 고치셨다는 이야기를 누군가를 통해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 그들의 마음속에도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나병도 고쳐 주시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병균에 감염되면 신경이 마비되어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얼굴의 코나 귀 또는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썩어 없어지는 증세를 보입니다. 나병에 걸리면 육신만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부정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접촉하는 사람들도 부정하다는 취급을 받았기에 나병 환자들은 사회적으로도 완전히 격리가 되어 산속이나 깊은 동굴, 사막의 움막에서 살아야 했습니다.“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레 13:46).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멀리 서서”가 그들의 실상을 나타냅니다. 멀리서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소리 높여 부른 것을 보면, 이들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그 마을을 지나가면 다시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문둥병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의 시선을 끌려고 했습니다. 아무도 자기들을 회복시켜 줄 수 없다는 절망감,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아픔, 육신의 고통으로 인한 서러움들이 복받쳐 아마 그들은 필사적으로 외쳤을 것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의 간절한 합창이 조용한 시골 마을에 울려 퍼집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스승의 뜻을 가진 ‘랍비’가 아니라 ‘주인, 우두머리’라는 뜻을 가진 단어를 사용합니다.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에게 어울리는 호칭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제자들이 믿음이 약했거나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한 때에 이 호칭으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나병 환자들의 지식은 불완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낫기를 간절히 바라며 자기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들이 외칠 때, “우리”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나병 환자로서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똑같이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함께 어울려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나 주변의 무리에게는 문둥병자들의 외침이 시끄럽게만 여겨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문둥병자들은 다른 사람의 반응에 신경을 쓰지 않고 계속 외쳤습니다. 주님은 자기에게 나오는 자를 물리치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은총을 베풀기 원합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절) 


나병 환자들의 간절한 외침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처방전을 주십니다.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면 제사장들이 점검한 후에 그들이 나병에서 나았으면 정결하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면 율법에 규정된 대로 희생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모든 회복의 절차를 치러야 합니다(레 14:1-20). 예수님의 말씀은 일종의 시험이었습니다. 나병이 나아야 제사장에게 갈 수 있는데 예수님은 아직 그들이 낫기도 전에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낫지도 않았는데도 섣불리 갔다가는 부정한 자가 왔다고 구박을 당하고 쫓겨나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먼저 말씀에 대한 순종을 요구합니다. 아직 치유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제사장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제사장에게 갔을까요? 한편으로는 의심도 들었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병이 나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는 동안 계속해서 그들의 몸을 살폈을 것입니다. 나병으로 상한 자기 손이나 팔다리를 보았을 것이요, 자기 얼굴의 코와 귀를 만져 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기들의 몸에 변화가 나타남을 느꼈습니다. 조금 전까지도 고름 냄새 나고 썩어 문드러졌던 몸에 어린아이의 피부처럼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병 고침의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이제 가족들을 만날 수도 있고, 그 동안 하지 못하던 것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망에 부풀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한 사람(15-16절) 


10명의 나병환자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병이 나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단 1명만이 제사장에게 가던 발걸음을 돌이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사건의 초점은 치유 자체보다 치유 받은 자들의 반응에 있습니다. 열 사람 모두가 놀라운 치유를 맛보았지만, 그 가운데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드렸습니다. ‘돌아오다’는 진행하던 방향과 반대로 몸을 돌리는 동작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단지 물리적인 움직임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바꾸고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했고, 그분께 감사하기 위해 왔습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먼저 하나님께 “큰 소리로”영광 돌렸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격, 그것을 표현하지 않고는 결코 배길 수 없는 자세로 드리는 것이 참 감사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감사했습니다. ‘엎드린다’는 ‘경배한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드리는 경외를 예수님께 바쳤습니다. ‘감사하다’가 현재분사로 사용된 것은 그가 예수님의 발에 얼굴을 갖다 대고 감사를 지속적으로 표현했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감사가 그의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진정한 감사였음을 시사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입술로도 감사를 잘 못하는 삶을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감사란 입술로만 표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라는 설명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이 아니라는 사실, 심지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사실은 독자에게 깜짝 놀랄 만한 역설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특별히 배교한 민족이자 원수로 여겼습니다. 눅 10장에 나온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사람이 주인공으로 드러났습니다.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낳습니다(17-19절) 


사마리아인의 감사와 경배를 접하신 예수님은 나병 환자 열명 모두가 깨끗함 받은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한 명만 돌아온 사실을 의아하게 여기시며 이렇게 물으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연이어 던지시는 세 개의 질문은 안타까움과 서운함을 표현하는 수사적 의문들입니다. 유대인 나병 환자들은 빨리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하다는 판정을 받고 그런 다음 빨리 집에 돌아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직 자기 자신의 유익과 장래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고쳐주셨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며 지금 자기들이 깨끗하다는 사실만이 중요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께로 돌아가려는 사마리아인을 향하여 멸시를 했을지 모릅니다. 이방인 주제에 잘난 체 한다고 핀잔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에게 감사는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을 통하여 영광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질문들은 누구 들으라고 하신 겁니까? 함께 한 제자들이나 무리들입니다. 대부분 유대인들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하신 일에 대하여 공치사를 듣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때 우리의 마음은 순수해지며 하나님 중심적이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들이 됩니다.  


 


예수님은 돌아온 사마리아 인에게 육신의 병 고침뿐만 아니라 영혼의 병 고침까지 선언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그는 사마리아인이라는 이유로 유대인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아 왔습니다. 더구나 문둥병에 걸렸기에 동족 사마리아인으로부터도 외면을 당하는 등 이중으로 소외를 당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으로 나병을 치료받았을 뿐 아니라 구원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런 구원을 가져다 준 것이 사마리아인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구원하였다’는 동사의 시제는 완료형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그 사마리아인은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지금 그는 구원받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마리아인이 구원받은 시점은 언제일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었을 때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신뢰한 때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예수께 돌아와 감사드렸습니다. 이런 감사의 열매를 보시고 예수님은 그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해주셨습니다. 감사는 육신의 치유를 넘어 영혼의 문제까지 연결됩니다. 감사는 이 땅에서 하늘을 살아간다는 증표와 다름없습니다. 주님은 감사하는 이들에게 더 큰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20-21절)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때를 물었지만 예수님은 그 나라가 임하는 방식을 말씀하십니다. ‘볼 수 있게’는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행동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시도가 헛된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전적으로 미래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경험을 통해 관찰되거나 계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바리새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영적인 안목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다른 곳에서 찾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경험하는 영적이고 내적인 나라이며, 그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임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건은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그분께 감사하고 영광돌림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자의 마음에 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의 마음에 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구약 성경을 잘 안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드린 한 이방인의 마음에 임하셨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경험하려면


- 감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가 모두 치유를 받았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드린 것은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나음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순종이 치유를 가져왔지만, 치유는 감사를 통해 완성됩니다. 아홉 사람은 몸의 병은 치유 받았지만 감사할 줄 모르는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병든 상태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만이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건강하고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돌아와 감사를 표현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선언은 ‘구원’과 ‘깨끗함을 받음’이 별개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나머지 아홉은 나병 치유의 은혜를 입었지만, 구원의 길에 들어서지는 못했습니다. 감사하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더 크고 특별한 은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고 소중한 새 생명을 공급받았고 또 지금도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이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고 있으므로 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입술의 고백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의 노래로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우리를 늘 새롭게 살려 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UC 데이비스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로버트 에몬스는 12살에서 80살 사이의 사람들을 상대로 한 그룹에는 감사 일기를 매일 또는 매주 쓰도록 하고, 또 다른 그룹들에게는 그냥 아무 사건이나 적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실험 한 달 후에 두 그룹에게 중대한 차이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감사 일기를 쓴 가람 중 4분의 3은 행복 지수가 높게 나타났고, 수면이나 일, 운동 등에서 더 좋은 성과를 냈다고 합니다. 그저 감사했을 뿐인데도 뇌의 화학 구조와 호르몬이 변하고 신경 전달 물질이 바뀐다고 합니다. 금년에도 감사노트를 모든 교우들에게 나누어 드렸습니다. 2020년도 이제 45일 남았습니다. 그동안 감사 일기를 꾸준하게 쓰신 분들은 계속 쓰시고, 그동안 쓰지 않으신 분들은 남은 기간이라고 감사 일기를 쓰시기 바랍니다. 감사의 생활화가 필요합니다. 하루하루를 살면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며 감사하고 기록해야 합니다. 그것을 쓰면서 과연 나의 삶에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지 살펴 보시고 또한 목장 식구들과 나누시기 바랍니다. 


 


병 고침을 받은 사마리아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 찾아가서 직접 감사를 드렸던 당사자의 마음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또 그런 깊은 감사를 받으셨던 예수님이 마음은 얼마나 행복하고 뿌듯하셨을까요? 감사란 이처럼 전하는 자나 받는 자 모두가 다 행복하게 됩니다. 감사가 넘쳐나는 가정은 싸울 일이 별로 없습니다. 감사가 넘쳐나는 교회는 시험거리가 별로 없습니다. 감사가 넘쳐나는 사회가 건강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감사하는 사람의 마음부터 행복하게 만드는 유익이 있습니다.


 


-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열 명 가운데 한 명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주님께 나아와 무릎 꿇고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사마리아 사람은 육신의 질병 치유뿐 아니라 영혼의 문제까지 해결을 받았습니다. ‘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이토록 큽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가 그를 구원했다고 하지 않으시고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그가 드린 감사는 믿음이란 씨앗에서 나온 증거와 열매였습니다. 믿음이 감사를 낳게 한 것입니다. 참 믿음이란 반드시 구체적인 행동과 열매로 드러나야 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입술만으로는 안 됩니다.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COVID-19 팬데믹의 위기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럴 때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십니다. 위기는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복이라고 했습니다. 이 힘겨운 시대 속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만을 믿음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영생이 우리의 신앙이 불신자나 다른 성도들과 어떻게 다르냐에 따라 우리의 삶에서 얻는 복이 다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선언은 눅 7~8장에서는 여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본문에서는 이방인 남자에게 하신 말씀이고 18장에서는 유대인에게 선포되었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이 베푸시는 구원을 경험하게 할 뿐 아니라, 그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남자도 여자도, 유대인도 이방인도 동일하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믿음이 더해질수록 감사와 영광은 더 넘칩니다. 구원은 이해하기에 앞서 주님에 대한 신뢰를 요구합니다. 믿음에 견고히 서려면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성경을 지금도 열심히 읽고 계신가요? 그리고 말씀 앞에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해야 합니다. 이해하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믿음은 순종으로 완성됩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예수님은 지금도 “그 아홉”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자들,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바쁜 중에도 시간을 내어 각자의 감사생활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구체적인 이유들을 우리의 삶에서 찾아보고 우리의 입술로 고백하고 감사합시다. 사마리아인이 그렇게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를 동반한 믿음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감사의 근원은 믿음이요 감사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감사의 씨를 자꾸 뿌릴 때 감사의 열매들이 더욱 풍성히 열리게 됩니다. 감사를 자꾸 하게 되면 우리 마음도 기쁠 뿐 아니라 건강도 좋아집니다. COVID-19으로 인해 어려운 한 해를 보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도우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우리의 소산의 맏물을 주님께 기꺼이 드려야 합니다. 주신 복을 인하여 함께 즐거워하며 나누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온전한 감사를 드리는 가운데 이전보다 더 풍성한 감사의 열매를 거두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