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Author
Myung Myung
Date
2020-11-01 14:46
Views
485


성경에는 더러 오용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합 3:2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여기서 부흥이 교회 성장이나 영적인 부흥의 의미로 해석되고 심지어 어떤 교회는 이 구절을 현수막으로 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실제 본문의 의미와는 거리가 멉니다. 여기서 ‘부흥’은 ‘재현하다’라는 뜻이며 목적어인 ‘주의 일’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즉, 악한 자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지금 재현해 달라,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노를 부어달라는 호소입니다. 더구나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도 주의 진노를 부어 하나님의 의를 세워 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래서 뒤에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덧붙입니다. 오늘 본문의 13절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자기가 원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취지로 많이 인용되지만, 문맥을 살펴보면 자기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원치 않는 일이나 혹은 달갑지 않은 상황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고린도 교회처럼 수많은 문제로 시달리거나 서머나 교회처럼 박해에 시달린 교회는 아니었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제가 생기고 아파하는 교회였습니다. 겉보기에는 멀쩡하나 영적으로 병든 교회였습니다. 여성 지도자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세상적인 자랑을 하는 교만한 교인들이 있었고, 자기 배를 채우는 세속적인 지도자들이 있었고, 육체의 할례를 받아야만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빌립보서를 쓰게 된 이유는 빌립보 교우들이 보낸 헌금에 감사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편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빌립보 교회 안에 병든 부분을 치유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유럽에서 처음으로 개척한 빌립보 교회가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함께 기뻐하고 위로하며 영적 건강을 유지함으로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지속되기를 원했습니다. 본문을 보니 바울은 생각하고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행해야 하는지 살펴봅니다. 그래서 바울과 같이 자족의 신앙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기뻐하고 감사하며 끝까지 소명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들을 생각하라(8절) 


바울은 ‘끝으로’라는 말을 사용하여 빌립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최종적인 교훈을 제시합니다. 본문은 1-7절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주 안에 굳게 서기 위해 신자가 가져야 할 덕목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같은 마음을 가지라”“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권면했습니다.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에서 ‘덕’으로 번역된 명사는 ‘탁월함’을 뜻하고 ‘기림’은  ‘칭찬’을 뜻합니다. 따라서 8절은 ‘탁월하다는 소리나 칭찬을 듣고자 한다면 이것들을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이것들’은 여섯 가지 덕목을 가리킵니다. ‘참됨’은 생각과 말과 행위가 진실하다는 의미입니다. ‘경건함’은 인격이 고상하고 기품이 있어 존경받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옳음’은 하나님이나 인간과의 관계에 모두 의롭다는 것입니다. ‘정결함’은 죄로부터 깨끗함, 행동이나 동기의 순수함을 뜻합니다. ‘사랑받을 만함’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호감과 애정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칭찬할 만함’은 선하고 신뢰할 만한 언행으로 좋은 평판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면서 영적인 면에서나 세상적인 면에서나 최선의 가치들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배우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9절)   


바울은 또한 그가 언급한 덕목들을 실제 생활에서 실천할 것을 강조합니다. 생각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에게서 배우고 듣고 본 것들을 행하라고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본을 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로부터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복음을 위해 어떻게 수고하고 헌신했는지를 직접 보았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주 안에서 거룩하게 살아갈 때, 교회 공동체와 우리 삶에 하나님의 평강이 깃들게 됩니다. 평강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기뻐하는 이유(10-11절)  


빌립보 교인들이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바울에게 선물을 보냈습니다. 이를 인해 바울은 “크게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현재형으로 번역되었지만, 원래는 부정과거형입니다. 편지가 빌립보 교회에 도착할 시점에는 이미 과거가 되므로 수신자를 고려해 과거로 사용한 것입니다. 나무가 새로운 싹을 틔우듯이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위한 생각과 애정을 다시 하게 되었고, 이러한 사랑은 바울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선교 후원에 감사를 표합니다. ‘이제 다시’는 ‘이제 마침내’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전에 도와주었는데, 한동안 끊겼다가, 이제야 선교비를 보낸다고 섭섭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가 한 말에 혹시라도 오해가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고 하며 그들의 입장을 변호합니다. 바울을 향한 빌립보 성도들의 관심이 지속적인 것이었음을 강조합니다.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는 관용구를 사용하는데, 이는‘내 말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즉, 바울이 궁핍해서 빌립보 교회의 추가적인 후원이나 원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합니다. 여기서‘배웠다’는 동사는 ‘경험을 통해서 배운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한 순간부터 이 편지를 쓰던 순간까지 바울의 삶은 자족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족’이란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여기 한번만 나타나는데 헬라 스토아 철학자들이 즐겨 사용한 용어입니다. 그들이 사용하던 용어를 가져다 자신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스토아 학자들이 생각한 자족은 ‘충분하여 흡족하고 만족해하는’것입니다. 그들은 ‘행복하기 원하면 소유에 무엇을 더하기보다는 욕망을 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의지로 이러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만족의 주체를 '자기'에게 두었으나 바울은‘주님’에게 두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얼마나 편안하고 얼마나 풍족한 가가 아니라 주님이 자기를 통하여 얼마나 역사 하는 가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자족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갖는 자신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즉 자신이 처해 있는 일체의 상황 속에서 주님으로 만족하기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족(12-13절) 


이어서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말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비천에 처한다’는 것은 외부 환경의 변화로 말미암아 가난과 궁핍이 닥쳐와서 비천한 지경에 빠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궁핍’과 ‘풍부’라는 두 극단적인 상황을 ‘안다’고 말합니다. ‘안다’는 ‘그러한 상황들을 직접 경험했다’는 뜻과 ‘각기 상황에 처했을 때 적절히 사는 법을 터득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가난에 처했을 때에는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이 견디고, 풍부함이 있을 때는 그것을 즐기면서 잘 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난에 처했을 때도 긍정적인 마음 자세를 유지했고, 부유해졌을 때에도 그 부유함에 빠지지 않고 부유함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내가 풍부와 비천에 처할 줄 안다’고 하면서 비천과 풍부를 하나로 묶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안다’는 동사를 두 번 사용해서 ‘비천도 알고 풍부도 안다’면서, 비천에 처할 줄을 아는 것과 풍부에 처할 줄을 아는 것이 별개의 문제임을 암시합니다. 비천에 처할 줄을 아는 사람이라도 풍부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위 졸부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물론 역으로 풍족한 삶을 살다가 갑자기 어려워질 때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합니다. ‘배웠다’는 동사가 당시 신비종교에서 많이 사용했는데, 그 종교가 가지고 있는 비밀과 특권에 들어가기 위한 ‘입교 의식을 치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직접 들어가서 경험해 보면서 배웠다는 것입니다. 즉 궁핍한 상황에도 있었고, 풍부한 상황에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배운 이 일체의 비결은 하루아침에 얻은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연단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얻어진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으면 궁핍이요, 가진 것이 많으면 풍부가 아닙니다. ‘바울이 필요로 하는 것’이 기준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필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구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모든 상황에서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지 밝힙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딤전 1:12에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울을 능하게 하신 분, 즉 바울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능력 주시는’으로 번역된 동사는 현재분사형으로,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지속적으로 능력주심을 뜻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초월적인 능력을 부여받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이겨 나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할 수 있느니라’로 번역된 단어는 현재 직설법 동사로, 바울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쳐와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헤쳐 나가며 주신 소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필요조차 채워지지 않는 극단적인 궁핍과 모든 필요가 넘치도록 채워지는 극단적인 풍부를 포함한 모든 상황에서 지낼 수 있는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다고 합니다. 이것은 역으로 ‘능력 주시는 자’인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3절은 믿음의 능력을 강조할 때 종종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믿음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막 9:23).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주안점을 두는 것은 소명을 감당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어떤 환경에서도 소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요해도 교만하거나 안일하지 않고 소명을 감당하며 열악한 상황에서도 소명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를 위협하고 우리의 삶이 여러 면에서 제약을 받는다 할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담대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족하는 신앙을 가릴 수 있습니까? 


1) 하나님의 섭리를 믿습니다


섭리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다 아신다는 이상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셔서 당신의 뜻하신 바를 이루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현재는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의 결과입니다. 요셉이 형들의 시기를 인하여 애굽으로 팔려 간 것 같으나 그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지방의 기근으로 인하여 자기를 판 형들이 자기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7)라고 하면서 요셉은 형들을 원망하기보다 자기가 애굽 총리가 된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이스라엘 족속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임을 밝힙니다. 요셉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기에 매사에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도 그의 삶을 통하여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많이 체험하였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나님의 섭리는 세상적으로 볼 때 대단한 사람들, 즉 높은 권력을 가졌거나, 많이 가졌거나, 많이 배운 사람들에게만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역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우리 교회를 통하여 선하게 역사 하신다는 확신이 있을 때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서도 심지어 고난 속에서도 담대해집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기에 주 안에서 만족한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기쁨을 누릴 수 있었고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2)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아굴의 잠언에 의하면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잠 30:8)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하니이다”(잠 30:9). 지나친 가난이나 지나친 부유는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위협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 있어서 만족의 근원은 다른 데 있어야 합니다. 이미 바울은 세상적으로 대단하게 여기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알고 닮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두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사역 하는데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 육체의 가시로 인하여 말할 수 없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놀라운 신유의 능력을 가지고 병든 자들을 일으키고 죽은 자도 살렸던 바울이었으나 자신의 고통을 어찌할 수 없었기에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세 번 간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도리어 온전하여 짐이라”(고후 12:9)라고 응답하셨습니다. 바울은 주의 말씀을 깨닫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하기 위해 자기의 약한 것들을 기뻐함으로 자랑할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의 약한 것들, 모욕, 궁핍, 박해, 곤고를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고 선언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신적 약함 안에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능력이 강하게 역사하신다는 역설적 진리를 깨달았기에 환란과 박해 속에서도 복음 전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가난을 좋아하는 자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가난이 자랑스러운 것도 못됩니다. 안빈낙도라 가난을 불편해하지 않고 도를 즐긴다는 말은 있으나 가난하면 우선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행동에 제약을 받게 됩니다. 돈 때문에 가정에 불화가 생기기도 합니다. 반면에 부유하면 부유할수록 가지고 있는 어떻게 쓰고 늘리고 누릴 것을 인하여 적지 않은 신경을 쓰게 됩니다. 아쉬운 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따돌리기 위하여 찾아오는 사람에게 사무적으로 대하거나 적당한 거짓말도 합니다. 그래서 돈 벌더니 사람이 달라졌다는 원망을 듣기도 합니다. 돈이 많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교만하게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를 과시하거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우습게 여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궁핍한 것과 풍부한 것 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하지 않습니다. 바울 자신도 그 동안 살아오면서 극한 가난과 풍성함을 다 경험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만족케하는 것은 소유의 많고 적음, 환경에 좋고 나쁨에 있지 않음을 분명히 합니다. 바울은 어느 환경에 처하든지 만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삶 속에서 여러 고난을 겪는 동안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땅에 것이 아닌 하늘에 소망을 두는 법을 배웠습니다. 궁핍에 처하든지 풍부에 처하든지 주님을 인하여 만족할 줄 아는 놀라운 비밀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능력을 주시는 자 즉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모든 상황을 견딜 만한 능력을 바울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은 어디서 옵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가지가 줄기에 제대로 붙어 있을 때 제대로 열매를 맺듯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 즉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살 때 기도에 능력이 있고 삶에 열매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나가면서


살다보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열악한 환경에 처하기도 하고 풍족한 환경에 처하기도 합니다. 궁핍할 때 불평하기 쉽고, 풍부할 때 교만하기 쉽습니다. 바울은 어땠습니까? 하나님의 일꾼으로 일하면서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고후 6:4-5)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고난으로 인해 신앙이 약해지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족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겸손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처한 환경과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시며,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어떤 상황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자족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능력의 주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분이 주시는 능력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능히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결국 자족하는 능력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능력을 받아 자족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삶의 탁월성은 지식과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서 나옵니다. 말씀을 삶으로 살아 내며 모든 상황에 감사하고 자족할 때, 주님과 동행하는 참된 성도의 모습에 세상이 놀라고 감동할 것입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 속에서도 주님과 신실한 관계를 가지며 하나님의 평강이 넘침으로 항상 기쁨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