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주님 안에 서 있는 삶

Author
Myung Myung
Date
2020-10-25 14:17
Views
421


상대방을 사랑하거나 인정할 때 약간의 허물이 있거나 실수를 해도 별로 문제 삼지 않고 같이 있기만 해도 기뻐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어지거나 불편한 마음이 들면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미워지게 되고 상대방의 낯을 보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불평하거나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서로 다투기 쉽습니다. 교인들끼리 가깝게 지내는 것은 좋지만 그러다 보니 자칫하면 무례하게 행동하여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관계가 좋을 때는 흉허물 없이 지내다보니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 둘 사이에 틈이 생기면 자기가 알고 있던 상대방의 허물이나 약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벌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끼리의 갈등은 더 깊은 상처를 주게 됩니다. 왜 갈등이 생깁니까? 상대방이 자기 생각대로 해주기를 기대하는데 그것을 만족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입장에서만 상대방을 평가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갈등이 생기면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이 기쁨입니다. 


 


심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인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염려를 많이 하면 교감신경이 주로 움직여 심장에 부담을 주고 몸이 약해진다고 합니다. 반면에 기쁨으로 일하고 봉사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길 때 부교감 신경이 활발하게 움직여 심장이 제 기능을 발휘하면서 튼튼해진다고 합니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이 사실 맞는 말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너무 많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어떠십니까? 요즘 교감신경이 많이 활동합니까 아니면 부교감신경이 많이 활동합니까? 각자의 성격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 염려하는 레벨은 다를 텐데 나의 염려 레벨은 현재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대인 관계나 건강이나 사업 등에 어려움이 닥치고 스트레스가 생길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빌립보 교회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은 빌립보서를 마무리 지으면서 교우들에게 주 안에서 굳게 설 것을 권면합니다. 바울의 권면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본문에 언급된 바울의 권면을 각자에게 잘 적용하여 관계가 회복되고 염려가 사라지고 기쁨과 평강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 서라(1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먼저 1절은 전환절입니다. ‘그러므로’는 방금 전에 말한 것들에 비추어서 생각하라고 사용하는 접속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의 시민들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로서 강림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몸의 연약함을 벗고 영화롭게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교회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문제로 인해 기쁨을 잃어버린 빌립보 교인들에게 ‘주 안에 서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선다’는 말은 병사들이 전쟁에 임하는 태도를 묘사할 때 사용하는 군사용어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적 전쟁으로 비유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사탄의 세력과 싸워 결정적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주님의 승리를 기초로 사탄에 대항해 싸워야 하는데 그러려면 항상 ‘주 안에’굳건히 서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요 주님으로 영접함으로써 시작됩니다. 주님을 영접한 이후로는 기도와 말씀과 성도의 교제와 섬김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우리의 삶에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을 본받는 것을 말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주님의 겸손함을 본받아야 합니다.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러 오신 주님의 희생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견고히 붙잡고 말씀으로 권면하면서 서로를 세워야 합니다. 바울은 4장에서 “주 안에서”라는 말을 여러 차례 사용합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4:2)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4:7) 주 안에서 견고하게 서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도하고 양육한 빌립보 성도들을 여러 가지 호칭을 사용해 부르며 그들에 대한 친밀함과 사랑을 표현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사모하는 형제들,’‘기쁨,’‘면류관.’빌립보 교인들이 자신과 동일한 하나님의 가족이며, 자신과 동등한 지위를 갖고 있는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그들을 사랑하며, 또한 간절히 보고 싶어 합니다. 더 나아가 빌립보 교인들 자체가 자기의 기쁨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바울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믿음 안에서의 형제들입니다. 그리고 전도의 열매인 그들은 바울이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잘하였도다 충성된 종아’하며 칭찬과 상급을 안겨다 줄 면류관입니다. 다시 말해서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자랑과 기쁨과 명예의 원천이며 바울의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 굳게 서려면


-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2-3절)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 교인들이 주 안에서 굳게 서기 위해 바울이 제시한 첫 번째 권면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빌립보에 여자 지도자들 사이에 갈등이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 지방의 대부분의 여자들은 밖으로 드러나는 생활을 별로 하지 않고 언제나 남자들에게 가리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게도니아 지방의 여자들은 오늘날의 맹렬 여성들과 같이 모든 면에 적극적이고 리더십도 있고 공직생활도 하였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하면서 바울은 그들의 이름을 직접 거론합니다. 두 여인들이 어떤 사람들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전에는 빌립보 교회에서 복음을 위해 바울과 함께 많은 봉사를 한 인물들이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두 여인이 왜 불화했는지 이유를 밝히지 않고, 그들이 복음을 위해 함께 힘을 썼다고만 말함으로써, 그들이 복음을 위해 다시 화합할 길을 열어 둡니다. 두 사람의 반목이 길어지다 보니 교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할 교회가 자의든 타의든 눈치를 보며 둘 중의 한사람 편을 들다 보니 갈등이 심화되고 교회가 기쁨을 잃었습니다. ‘순조로운 여행’이라는 뜻을 가진 유오디아와 ‘행복한 기회’의 뜻을 가진 순두게가 서로 다투니 교회 생활이 순조롭지도 행복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너희에게 문제가 있으니 당장 그치라고 하면서 자신의 사도적인 권위로 책망하지 않습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나님과 동등 된 위치임을 생각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구원과 복을 위해 죽을 만큼 자신을 비우는 마음입니다. 그들에게 겸손과 자기희생을 요구하며 주 안에서 다시 하나가 되어 전처럼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애쓰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 사이의 불화가 그렇게 쉽게 해결되리라 생각지 않은 바울은 제3자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바울은 그를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가 어떤 한 개인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한 개인으로 언급된 빌립보 교회 전체를 가리키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함께 힘쓰던 여인들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을 도와 화해시키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함께 힘쓰다’는 말은 시험이나 투기 경기장에서 사용하는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이 말은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 그들이 힘을 합하여 싸운 것을 의미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싸움에서 야기된 고난에 동참한 것을 의미합니다. ‘두 여인들’과 함께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도 도우라고 합니다. 글레멘드나 다른 동역자들은 아마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불화로 인하여 큰 상처를 받았거나 교회를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도우라’로 번역된 동사는 ‘꼭 잡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그들을 꼭 붙잡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생명책에 기록된 천국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전과 같이 하나가 되어 사역에 힘쓰기를 원하는 목회자로서의 바울의 바람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함께 기록되어 있는 형제자매들이기에 서로에게 신실한 조력자가 되어 함께 섬기고 봉사할 때, 주 안에 굳게 서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의 영적 전쟁을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충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 주 안에서 기뻐하라(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어느 신학교에서 빌립보서를 가지고 시험을 치렀습니다. 교수가 한 학생에 묻습니다. ‘빌립보서에 대하여 아는 대로 말해보게나.’시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그 학생은 잠시 주저하다가 갑자기 한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기뻐하라’그랬더니 교수가 ‘그게 전부인가 좀 더 자세히 말해보게나’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은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바울이‘기뻐하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은 지금 빌립보 교회에 사랑을 식게 하고 기쁨을 빼앗아 가는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쁨은 주어진 형편에 상관없이 주님을 인하여 가지는 감정입니다. 주님이 기쁨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며 사는 자는 언제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이 있었기에 바울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아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빌립보 감옥에 던져졌지만 그곳에서도 찬송을 불렀습니다(행 16:19-25).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기쁨의 본을 보였습니다(빌 2:17).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행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 일이 자기가 생각한 대로 좀 풀리면 기뻐하고 그렇지 못하면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모습인데, 성도들이 항상 기뻐하는 것은 기분이나 상황에 좌우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천하보다 귀한 존재들입니다. 어떠한 형편과 처지 속에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아야 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는 있으나 우리를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염려로 인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쁨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기쁨이 있습니다(갈 5:22). 항상 기뻐하는 것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회복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 안에서 거하는 확신을 가지고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적극적으로 기뻐할 이유를 찾으며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 관용을 알게 하라(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타납니다. ‘관용’이란 단어의 어원을 보면 자기는 합법적으로 권리를 가졌으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고 쉽게 성내지 않는 것입니다. 왜 다른 사람의 실수를 용서하지 못합니까? 자기 안에 있는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의 실수가 크게 보이고 남을 자꾸 판단하려는 것은 대개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관용’이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너그러움이며 부드럽고 점잖은 성품이며, 다른 사람의 허물을 참고 기쁘게 해주는 것입니다. 관용을 성도들 뿐 아니라 불신자들에게까지 베풀어야 합니다. 관용 없이는 사랑도, 용서도, 하나 됨도, 의견 일치도 불가능합니다. ‘알게 하라’로 동사는 수동태로 되어 있어 ‘알려지게 하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지라도 기뻐하며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근거는 ‘주께서 가까우시기’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말씀은 주님이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시며, 우리의 행위를 알고, 우리의 태도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즉시 도와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곧 오실 텐데 사소한 문제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걸핏하면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대단한 사람처럼 여기며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심판자가 아닙니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면 모두 드러납니다. 주님 앞에 점도 없이 평강 가운데 서기 위하여 이웃과 맺힌 것이 풀어져야 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며 사는 것이 믿음에 굳게 선 성도의 모습입니다.


 


-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6-7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주 안에 굳게 서기 위한 바울의 마지막 권면은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빌립보 교회는 어려운 상황에 있었습니다. 교회 내적으로는 심각한 갈등과 분열이, 외적으로는 박해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을 지도할 사도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미래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염려한다고 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염려는 오히려 문제를 더 크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 6:27)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염려는 마음을 나뉘게 하고 분열시킵니다. 개인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건강을 해칩니다. 또한 염려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염려와 걱정은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전염됩니다. 그래서 공동체를 깨뜨리기도 합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정확하게 번역하면 ‘염려하는 것을 중단하라’입니다. 바울이 염려하는 것을 중단하라는 것은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경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모든 문제보다 더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염려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에 대한 의심이며, 신뢰의 결핍으로, 기쁨의 최고의 적입니다. 바울은 염려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기도를 제시합니다. 우리에게 온갖 염려와 두려움이 몰려올 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기도’, ‘간구’, ‘구하는 것’, ‘아룀’등 비슷한 단어를 나열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나누며 자기의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을 때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순서는 먼저 감사하고 그 다음 필요한 것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보살펴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장래에도 인도하실 것을 믿고 계속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의 감사는 기도 응답의 확신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분은 능력이 크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하여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평강(7절)


염려를 멈추고 지속적으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를 할 때 어떠한 약속이 주어집니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평강이 ‘모든 지각 위에 뛰어나다’는 말은 하나님의 평강이 ‘모든 인간적 이해를 초월하는 것임’을 의미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평강이 인간적으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줍니다. ‘지키시리라’로 번역된 동사는 파수병이 초소에서 외부침입자들을 단단히 막아선다는 뜻인데, 바울은 이 동사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평강으로 성도들의 마음과 생각에서 모든 염려를 몰아낼 뿐 아니라, 염려가 다시 침투하지 못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막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과 생각은 감정, 애정, 생각, 도덕적 선택 등 그리스도인의 내적인 존재 전체를 지칭합니다. 염려는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하며,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자라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셔서 염려가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하십니다. 바울은 이런 평강이 ‘그리스도 안에’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하고 그의 뜻에 순종할 때만 평강이 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모든 상황을 뛰어넘은 전능자의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주님만이 주시는 것이므로 그분께 이 평안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의 평안을 가진 자는 마음의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주님이 기꺼이 주시는 평안을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도 교회 생활을 하면서 많이 부딪치는 문제들 중의 하나가 교우들 간의 갈등입니다. 이런 갈등이 있으면 자연 ‘누가 옳으냐’보다는 ‘누구 편을 들 것인가’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지연이나 인연을 인하여 편당이 생기기도 합니다. 자기편에 있지 않는 사람들을 섭섭하게 생각하고 미워하거나 비난합니다. 이런 일이 지속되면 교회 생활에 기쁨이 없어지고 활기를 잃게 됩니다. 교회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이나 어디에서나 이러한 갈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갈등의 배후에는 이기주의, 탐심, 교만, 거짓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하나 됨입니다. 모든 성도는 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룬 지체들로서 연결하고 결합하여 서로 세워가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마음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같은 마음을 품으면 의견이 달라도 이해하거나 용납할 수 있고 서로 다툴 이유도 없습니다. 나의 의견을 주장하며 관철시키려 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도와 함께 주의 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넉넉해지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고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그러나 은혜가 떨어지면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고 기쁨이 사라집니다.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을 오랫동안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합니다. 이런 증세가 나타날 때 다른 데서 이유를 찾지 말고 내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고갈되어 감을 고백하고 그 은혜를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관용을 베풀어야 할 이유는 주님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입니다. 염려가 일어나 우리의 마음을 괴롭힐 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과 감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평강으로 화답해 주십니다. 성도들은 “주 안에서”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과 신실한 관계를 가지고 형제자매들과 사랑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으로 충만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