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신앙의 경주

Author
Myung Myung
Date
2020-10-18 19:48
Views
390


요즘 메이저리그 야구경기 playoff가 한창 진행 중입니다. 원래는 일 년에 한 팀당 160경기를 치르는데 금년에는 COVID-19으로 인해 60경기로 줄었습니다. 그런데 경기 결과를 보면 객관적인 전력에서 우세한 팀이 반드시 이기지 못할 때도 자주 있습니다. 솔로몬이 쓴 전도서를 보면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전 9:11)라고 합니다.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은 사람들, 주어진 환경에서 필요한 지혜를 얻고 활용한 사람들이 승리를 경험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경주라 할 수 있는데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 경주입니다. 그런데 어떤 정해진 분량이 있어 몰아서 달린 후에 그 다음은 대충 달려도 면류관을 받는 그런 경주가 아닙니다. 과거에 어떻게 달렸든 믿음의 현재에서 여전히 최선을 다해 달려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을 보면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12:1-2)는 구절이 있습니다. ‘경주’로 번역된 ‘agon’이라는 헬라어가 딤후 4:12에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하면서 ‘싸움’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골 2:1에서는‘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하면서 ‘힘씀’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agon’이라는 단어에 y를 붙이면 영어단어 agony가 됩니다. 고통, 고민, 번뇌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따라서 신앙의 경주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결승점에 다다를 때까지 고통이 있고 눈물이 있고 갈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신앙의 경주는 또한 자기와의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때로 달리기 싫을 때가 있고, 너무 힘들어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굳이 이 길을 달려야 하는가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습니다. 신앙의 경주보다 더 재미있고 더 만족을 주는 것같이 생각되는 유혹이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 장애나 난관에도 불구하고 목표에 이를 때까지 푯대를 향하여 함께 달려가야 하는 경주가 바로 신앙의 경주입니다.


 


지금 예배에 참석하고 계신 분들은 어떻게 신앙의 경주를 하고 계십니까? 기쁨이 있습니까? 아니면 기진맥진하여 그만 두고 싶습니까? 아니면 자신이 지금 신앙의 경주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그저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살고 있습니까? 바울은 자신을 결승점을 향하여 달려가는 운동선수로 비유합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바울은 믿는 자들이 신앙의 경주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권면합니다. 그의 권면을 각자의 신앙생활에 잘 적용함으로 훗날 결산하시는 주님 앞에 섰을 때 칭찬과 상급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푯대를 향해 나아가라(11-14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있는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조심하라고 경계합니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반도덕주의자들의 미혹된 가르침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 온전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고, 반도덕주의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더 이상 율법에 얽매여 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며 바울은 예수님 때문에 버릴 것은 버리고 주님을 위하여 살면서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맛보며 고난에도 동참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반도덕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바울의 권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성화의 과정을 무시하고 이제는 아무렇게도 살아도 된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바울은 자신이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작업할 때 입는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가고 악귀도 나갔습니다(행 19:12). 설교를 들으며 졸다가 삼층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렸습니다(행 20). 삼층 천에 올라가 보는 신비스런 체험도 하였습니다. 삼차에 걸친 전도 여행을 통하여 유럽과 소아시아 지방에 복음을 증거하여 수많은 열매를 거둔 전도자였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얻은 것이나 이룬 것이 많아 얼마든지 자랑할 것이 많을 것 같은데, 자신의 인격이나 자신의 사역에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할 부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할 부분이 여전히 많다고 고백합니다. 바울과 같은 사도가 아직도 부족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부족한 것이 얼마나 더 많겠습니까?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온전해질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요 우리의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하여 신앙의 경주를 계속해야 합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동가숙 서가식(東家宿 西家食)’이라는 고사 성어가 있습니다. 과년한 딸을 둔 아버지가 딸의 결혼을 걱정하고 있을 때 두 집에서 동시에 청혼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두 집 모두 마음에 드는 점도 있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딸을 불러 놓고 “서쪽 집의 신랑은 항우장사 같이 건강하나 찢어지게 가난하고 동쪽 집은 돈은 많으나 신랑이 병약하니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라고 물었더니 그 처녀는 서슴지 않고 “그렇다면 잠은 건강한 신랑이 있는 서쪽 집에서 자고 먹는 것은 부잣집인 동쪽 집에서 먹으면 되지요”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도 ‘동가숙 서가식’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천국은 가고 싶으면서도 세상의 재미를 포기하기에는 아까워 양다리를 걸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 즉 구원의 완성과 그것을 위해 감당해야 할 복음 전파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쉼 없이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존귀하게 하는 일만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여기서 ‘한 일’은 ‘행한 일’이 아니라 ‘한 가지 일’을 뜻합니다. 그것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하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부르심은 ‘부활 생명’을 핵심으로 하는 하늘의 상급이 약속된 부르심이었습니다. 바울은 부활 생명을 얻기 위해 전력질주 한다고 합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잊히지 않고 계속 머리 안에 맴돈다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도 복입니다. 과거의 죄와 실수를 하나님께 회개하고 나서도 여전히 자책하며 계속해서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붙잡혀 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 평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한때 열심히 교회를 박해하는 자였으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난 후 더 이상 과거 일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빚진 자’(롬 1:14)라고 하면서 이방인 때문에 자신이 구원 받았음을 감격하며 복음 전파에 힘을 썼습니다. 바울은 현재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고’와 ‘잡으려고’라는 두 현재 분사를 사용하여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거룩한 삶을 살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잊어버려야 할 것은 계속 잊어버리고, 붙잡아야 할 것은 계속 붙잡겠다는 의미입니다. ‘잡는다’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앞으로 쭉 뻗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육상선수가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어 달리며 남보다 먼저 결승선에 닿아 보려고 머리를 내밀거나 가슴을 내밀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온 힘을 다해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자신의 업적이나 과거의 성공에 자만하거나 안주해서도 안 되고 자신의 허물 많았던 과거에 연연해서도 안 됩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바울이 과거를 바라본 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금까지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할 때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직 이루지도 못했고, 얻지도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푯대를 세웠습니다. 그 푯대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믿음을 지킬 수 있었고, 선한 싸움을 싸웠고, 달려갈 길을 달렸고, 의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향한 갈급함을 느끼며 영적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결단하고 기도할 때 주님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하라(15-16절)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여기서‘우리’는 온전한 신앙을 향해 정진하는 바울을 비롯한 성숙한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성숙한 성도는 자신이 이룬 과거의 성취에 만족하지 않고 더 성숙해지기 위한 노력을 중단하지 않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바울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문제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졌다면 하나님이 옳은 생각을 나타내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나타내신다’는 하나님이 감추었던 진리를 ‘드러내신다’라는 뜻입니다. 성도들에게 찾아오는 위기는 ‘선 줄로 생각하는 마음’이 들 때입니다. 그럴 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바울은 ‘우리는 행해야 한다’고 하며 다른 성도들과 함께 전진하라고 권면합니다. 신앙의 경주를 할 때 출발점은 다르고 경주하는 방식이 다를 수는 있으나 목표는 같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경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하는 경주입니다. 결승점에 도달할 때까지 그리스도 안의 한 지체로서 서로 인정하고, 서로 돕고,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나를 본받으라(17-19절)


운동선수가 기록을 향상시키려면 좋은 성적을 낸 선수들의 자세와 훈련 방법들을 비디오로 분석하여 도움이 되는 부분을 본받으려고 합니다. 영적인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지도자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본으로 삼고 행하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라고 권면합니다. 자기를 본받으라는 바울의 말은 그 자신이 완전하다고 느끼거나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교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본받으라는 말입니까? 예수를 알려고 하는 열심, 예수님을 닮아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려는 열심, 복음의 진보를 위한 그의 열정을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본을 따라 살아가는 인물로 바울은 아마도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를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고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당하는 핍박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 자신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거짓 가르침에 넘어가는 성도들에 대해 비통함을 금할 길이 없어 깊이 탄식하며 울면서 다시 권면합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여러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이미 잡은 줄로 여깁니다. 다 이루었고, 다 알고, 스스로 완성했다고 여깁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누구보다 의롭다고 여기며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세 가지로 그들의 정체를 밝힙니다. 첫째, 그들의 신은 배입니다. ‘배’란 문자적으로 ‘위장’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위장’뿐 아니라 신체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모두 포함하는 보다 일반적인 용어로 인간의 육체적인 생명, 즉 필연적으로 파멸할 수밖에 없는 부분을 총칭합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둘째, 그들은 수치스러운 일을 도리어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자랑으로 여깁니다. 도적 불감증에 걸린 그들은 부끄러운 일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합니다. 셋째,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약속과 심판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일에 집착해 땅에서만 잘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결코 위엣 것을 찾지 않습니다. 


 


에서가 배를 위하다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기업을 팔았고, 나중에 아버지 이삭에게 자기에게도 축복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매달렸지만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유다는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았으나 양심의 가책을 인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자들은 곧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며 교회에 들어와 하나님의 진리를 오염시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구하기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얻으려 힘쓰며 에서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자기 부인의 종교인데,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룬 것처럼 행동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결국을 파멸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바울처럼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우리 또한 바울이 제시한 모범을 붙잡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나를 본받으라’는 바울의 말이 사실 저에게는 큰 도전이 됩니다. 무엇으로 팔로마 교우들에게 본받으라고 할 것인가? 바울 사도에 비하면 저는 모든 면에서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만 한다면 설득력이 없고 도리어 손가락질을 당합니다. 본이 되는 목사나 장로, 본이 되는 제직, 본이 되는 목자들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늘나라 시민권(20-21절) 


바울은 반도덕주의자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말고 끊임없이 성화의 길을 열심히 달려가라고 빌립보 성도들을 격려합니다. 바울은 신자들이 땅의 일만을 생각하는 십자가의 원수와 달리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라고 선언합니다. 당시 빌립보는 유럽의 관문으로 군사적 요충지인지라 그 성에 사는 사람들에게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습니다. 빌립보가 로마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빌립보 사람들은 시민권을 가졌다는 이유로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시민권을 갖게 되면 로마의 제국 어디에서나 자유와 법적인 신분 보장을 제공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로마의 시민권보다 차원이 다르게 귀한 것이 하늘나라의 시민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성도들은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은 비록 이 세상에 잠시 거주하지만, 그들의 영원한 본향은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천국의 시민권자들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주님은 곧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도적같이 오신다고 하셨습니다(살전 5:4).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때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헌신과 희생을 본받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복음을 위해 고난 받기를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낮은 몸’은 현재 우리의 육적인 몸을 가리킵니다. 그 몸은 타락하고, 부패하고, 연약하고,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몸입니다.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란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부활체의 모습입니다. 마지막 날에 신자의 몸을 부활체의 형체를 따라 영광스럽게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과 육이 온전히 변하여 천국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않았기에 예수님을 닮는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을 가져다주실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그리고 끊임없이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가면서


모든 성도는 각각 다르고 독특하게 창조되었지만, 성도들의 소망은 동일합니다.  부활 신앙이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것같이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도 부활시키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이 때로 힘들고 어렵지만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길이지만 분명 우리의 모든 생애를 다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혼자 가도록 버려두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덮으시니 담대하게 됩니다. 신앙의 경주는 하나님 앞에 서는 날에 마치게 됩니다. 신앙의 달음박질에서 중요한 것은 목표인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는 일입니다. 지금 어디에 이르렀든지 미래를 향해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달려야 합니다. 경주하는 자가 면류관을 받듯이 신앙의 경주를 성공적으로 마친 성도는 주안에서 예비 된 놀라운 상급을 받습니다.  


 


금년에는 푯대를 향하여 얼마나 열심히 달려갔습니까? 다 이룬 것처럼 교만하거나 아직도 과거의 죄나 상처로 인하여 억눌림 받지는 않습니까?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이며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능력에 힘입어 신앙의 경주를 잘하며 위로부터 임하는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이 땅의 기름진 복으로 가정, 사업, 사역에 풍성히 채워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