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가장 고상한 지식

Author
Myung Myung
Date
2020-10-11 14:03
Views
402

기업의 목적은 이윤 추구입니다. 손익계산서를 만들어 어느 부분이 흑자가 되고 어느 부분이 적자가 되는지 따져봅니다. 그래서 이익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부서나 프로젝트는 과감하게 정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에 더 큰 손실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 손익계산서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손익을 따지는 기준이 근본적으로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믿기 전에 높은 점수를 받았던 항목들에 새로운 기준을 적용하니 손해로 판명났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과감히 정리했습니다. cell phone이나 컴퓨터와 같은 전자제품들은 아무리 비싼 값을 주고 최신 모델을 구입하여도 일 년만 지나면 벌써 구형이 되고 값도 많이 떨어집니다. 세상에서는 항상 더 좋은 것, 더 비싼 것, 더 귀한 것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것들만 붙잡으려 한다면 항상 만족이 없고 마음 한구석에는 아쉬움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다른 것을 희생하더라도 그것만 얻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됩니까? 


 


앞 단락에서 바울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에 보내면서 그들을 위한 추천서를 썼는데, 본문에서는 교리적인 문제로 돌아와서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해 빌립보 교회에 경고하면서 시작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자기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말해주면서 과거의 자랑거리를 ‘해’와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내게는 무엇이 가장 귀한지 생각해 보며 그것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나아가며 주님 보시기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권면(1-3절) 


주 안에서 기뻐하라(1절)


‘끝으로’는 새로운 주제로 넘어가는 것을 표시하는 말로서 ‘그건 그렇고 이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나의 형제들아”라고 부르며, 그들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신뢰를 드러냅니다. 바울은 다시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빌립보 교회가 하나 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교회의 지도자들 간의 갈등이요, 또 하나는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의 그릇된 가르침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문제가 해결이 될 때만이 교회가 비로소 하나가 되고 기쁨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라 함은 참된 기쁨의 근거가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1장에서는 주님이 자신의 생명이라서 기뻐하고, 2장에서는 주님이 자신에게 섬김의 모델이어서 기뻐하고, 3장에서는 주님이 자신이 삶의 목표라서 기뻐하고, 4장에서는 주님이 자신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이라서 기뻐합니다. 그야말로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 안에서 기뻐하는’비결을 터득하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하여 ‘기뻐하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을 전혀 번거롭게 생각하거나 귀찮게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이 있듯이 기쁨은 신체적, 정신적, 영적 시스템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누린 자들이기에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의 다이나믹한 관계로부터 나오는 기쁨이 성도들의 능력이 됩니다.


 


삼가라(2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자 일부 교인들이 그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개들’, ‘행악하는 자들’, ‘몸을 상해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부정적인 측면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또한‘삼가라’는 명령을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그들을 극도로 경계하라고 합니다. ‘개들’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가리켜 사용하는 혐오 표현인데, 바울은 이를 역으로 율법주의자에게 적용합니다. 여기서 개들은 애완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거처 없이 쏘다니면서 쓰레기와 오물을 먹고 자기들끼리 싸우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개들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고 하면서 ‘선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율법을 따르는 ‘행위’에 의지해서 구원을 받으려 했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에게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마음의 할례를 중시하지 않고 할례의식에만 집중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할례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고 단지 율법의 껍데기만을 붙들고 있는 무리들을 비꼬는 의미에서 ‘살을 베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1:8)을 가진 바울이 율법주의로 왜곡된 구원관을 가진 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만일 그들의 주장과 같이 행위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보혈이 필요 없습니다. 육신의 할례로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아 심령으로 거듭날 때만이 사함을 얻고 구원에 이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할례파가 되라(3절) 


바울은 할례의 영적인 의미를 놓치고 외형적인 의식에만 집착한 율법주의자들과 대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마음에 할례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할례파’, 즉 진정한 의미에서 할례 받은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 성령으로 봉사합니다 


‘봉사하다’로 번역된 동사는 ‘예배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 이스라엘이 된 교회는 율법이 아니라 성령으로 변화되었기에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또한 그들의 예배는 교회당 안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 구원 받은 성도들은 성령에 이끌리어 삶 전체가 살아있는 예배가 되게 합니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합니다 


성도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했는지를 자랑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바로 알고 자랑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5:1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와 죄 용서를 자랑해야 합니다.  


- 육체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육체’라 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내세우는 인간적인 조건들을 가리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믿음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자신이나 자신이 가진 것, 경험한 것을 의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과거의 바울(4-6절) 


육체를 신뢰했던 바울의 자랑거리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들이요 또 하나는 자신이 이룬 것들입니다. 바울이 구원에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율법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이 자신이 그들만 못해서 열등감을 가지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요, 둘째는 자신이 과거에 자랑거리로 여겼던 것들이 이제 예수님을 믿고 보니 하나님의 의를 얻는데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해가 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1)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들


- 팔일만의 할례: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증표로서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행해집니다. 이삭이 그랬고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바울도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으니 정통 유대인입니다. 


- 이스라엘의 족속: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바울의 부모는 그 당시 흩어져 살고 있던 많은 유대인들처럼 이방인의 피가 섞이지 않았고, 또 이방인에서 이스라엘로 귀화하지 않았습니다. 


- 베냐민 지파: 베냐민 지파는 작은 지파였지만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야곱이 총애한 라헬에게서 난 막내가 베냐민입니다. 열두 아들 중 유일하게 약속의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을 배출한 지파입니다.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된 후에도 다윗 왕조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에스더 때 유다 민족이 자칫하면 하만에 의해 멸망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민족을 구한 모르드개도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자신 속에 순수한 히브리인의 피가 흐르고 로마제국에 흩어져 살던 헬라파 유대인들과 달리 히브리어를 어릴 때부터 사용했고 유대인들의 생활방식을 따르며 유대인의 순수성을 지켰습니다.  


2) 자신이 이룬 것들  


- 율법으로는 바리새인: 바울도 유대땅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바리새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행 23:6). 바리새파는 당시 소수였지만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자부하는 그룹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렸을 때 누나가 있는 예루살렘에 유학을 가서 유명한 율법학자인 가말리엘 밑에서 교육을 받았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율법을 지켰습니다. 


-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 열심은 유대인들이 아주 사모하는 덕목입니다. 율법에 대한 열정과 하나님에 대한 충정 때문에 바울은 교회를 이단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박해하였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데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박해를 피해 도망간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오려고 멀리 다메섹까지 갈 정도로 극성스러웠습니다.


- 율법의 의로는 흠 없는 자: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율법에 규정된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한 마디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바울은 모든 것을 다 갖춘 자였습니다. 가문도 좋고 혈통도 좋고 최고의 학문을 배웠고 종교적인 열심도 대단하여 장래가 촉망되던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바울은 당시 빌립보 교회를 어지럽히던 유대인 율법주의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정통파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바울은 유대인판 금수저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소속된 엘리트 그룹인 바리새인들을 떠나고 자신이 누리던 모든 명예와 특권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범죄자로 낙인찍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의 도를 좇는 그룹에 참여하였습니다. 바울의 행동은 유대인들이 볼 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로마의 총독이었던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자신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는지 설명하고 또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 말을 듣던 베스도 총독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 26:24)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 ...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26:25, 29). 바울은 완전히 회심했습니다.  


 


현재의 변화된 바울(7-11절)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 과거에 ‘이익’으로 여기던 것들이 이제는 ‘손해’로 여기고 심지어는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바울은 율법을 지킴으로 자력으로 얻는 의를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를 얻었습니다. 이렇게 달라진 바울의 모습은 율법주의자들의 영향을 받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들의 거짓 주장에 넘어가지 말라는 산 증거가 됩니다.


- 유익하던 것들을 다 해로 여깁니다(7절)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은 부모에게서 이어받은 것들과 자신이 성취한 업적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과거에 ‘유익들’로 여겼던 것들을 이제 ‘손해’로 여깁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거나 누리던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중심으로 재평가해야 합니다. 과거에 목적으로 보던 모든 것들을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한 수단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전에는 돈을 버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다면 이제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로마 시민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것을 복음 전파의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8절)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심지어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여기서 ‘배설물’은 음식 찌꺼기나 몸 밖으로 나온 똥을 가리킵니다.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은 허무주의를 강조하거나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때문입니다. 여기서 ‘지식’이란 것은 단순히 지적인 지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것을 포함해서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바울은 다메섹 체험 이후 날마다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전에는 어떻게 하면 자기의 노력을 인하여 의를 쌓으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는 삶을 살 것인가 마음을 두었으나, 이제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 것인가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모두 바울을 본받아 이와 같은 가치관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왜 사는지 영적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과거의 경력이나 직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현재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항상 감격하여 겸손히 주님께 나아가며 기쁨으로 섬겨야 합니다.


- 그리스도의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8하-11절) 


‘의(義)’의 의미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의’란 단어를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인 credit으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지킴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으려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적 어카운트에 credit를 쌓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를 제대로 만족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롬 3:10).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과 연합된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가 의롭게 됩니다.  


 


바울이 과거에 가졌던 자신의 자랑거리를 배설물로 여긴 이유는, 그것들로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얻을 수 없고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바울은 이 구원의 원리를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라 표현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했을 때,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됨을 뜻합니다. 바울은 8절에서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라고 밝혔는데, 10절에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아는 것을 뜻합니다. 즉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를 통해 ‘부활의 권능’도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참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실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고 부활에 이르려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택한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매일의 삶에서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옛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사람이 되어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나가면서


사람들은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지식을, 어떤 사람은 권력이나 재물을, 어떤 사람은 외모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릴 허망한 것들입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의 마음에도 자신의 의를 자랑하려는 율법주의가 살아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지식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갈 때 진리 안에 거하며 온전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영접하면 삶의 방향과 가치관에 분명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설정되고 그 우선순위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믿음의 눈으로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 중요한 것이고 귀한 것을 분별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이 가져올 유익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집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은 서로 위로하며 믿음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삶을 통하여 오직 그리스도 예수가 주 되심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 우리가 앞으로 계획하는 일이 과연 신앙의 관점에서 과연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일인지를 살피며 보다 가치 있는 일에 인생을 투자해야 합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다른 것들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겼던 것 같이 예수님 때문에 버릴 것은 버리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살면서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맛보며 고난에도 동참해야 합니다. 질그릇과 같은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채우시고 넘치도록 열매를 맺게 해주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의 일에 힘쓰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