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그리스도를 본받은 일꾼들

Author
Myung Myung
Date
2020-10-04 14:26
Views
344


9월부터 빌립보서를 다루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문제는 하나되지 못함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됨을 강조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고 합니다. 그런 삶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성육신하신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과 순종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으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교훈했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를 제대로 본받은 사역자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이 아끼고 사랑한 동역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며 복음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은 충성된 일꾼들이었습니다. COVID-19으로 인하여 많은 교인들이 금년의 절반 이상을 교회에 오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약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르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가정이나 직장이나 다른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일꾼으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기 원하십니다. 본문은 바울이 디모데와 에바브라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이 내용을 통해서 일꾼이 갖추어야 하는 바른 정신과 태도, 그리고 일꾼을 대하는 바른 태도에 대해 귀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동역자 디모데(19-24절)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의 안부를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사역자인 에바브로디도까지 바울에게 보냈습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안위를 받으려 함’은 ‘마음이 기쁘게 되다, 용기를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속히 보내어 바울의 소식도 전하고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잘 살펴서 피차 위로도 받고 용기도 얻으려 했습니다. ‘바울’하면 선교사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목회자로서 진솔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서로 위로를 주고받는 아름다운 관계에 갖고 있었습니다. 진실한 공동체 구성원들은 서로를 긍휼히 여기고, 서로 격려합니다. 이것이 천국의 교제입니다. 


 


바울이 왜 디모데를 추천했습니까?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뜻을 같이하여’는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다’는 뜻이며, ‘생각하다’는 ‘염려하다, 돌보다’는 뜻입니다. 어려움에 빠졌을 때 그들의 입장에서 진정으로 염려해주는 사람보다 더 고마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디모데가 어느 누구보다 빌립보 교회를 잘 돌볼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21절을 통해 당시에 많은 사역자들이 있었지만 겉으로만 그리스도의 일을 추구할 뿐 실은 자기 유익을 추구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다소 과장된 표현을 통해 바울은 디모데가 얼마나 헌신된 주님의 일꾼인지를 보여 줍니다. 디모데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며 주님의 교회를 생각하는 진실한 사역자였습니다.


 


22절에서 바울은 디모데가 얼마나 자격을 잘 갖춘 사역자인지 한마디 더 첨가합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연단’은 ‘시련을 이겨내어 단단해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 온갖 시련과 고난을 극복했습니다. ‘수고하다’는 ‘종처럼 섬기다, 봉사하다’라는 뜻입니다. 빌립보 교인들도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겪은 연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디모데를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을 위해 고난당하는 삶은 우리의 인품과 신앙을 다듬어 주고,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단순히 함께 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디모데는 마치 아버지에게 하듯 극진한 존경과 예의를 가지고 대했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고 했습니다(고전 13:5).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규례와 범절은 유교적 예의범절과는 다릅니다. 그 중심에는 ‘사랑’과 ‘겸손’과 ‘상호 존중’이 있습니다. 이러한 디모데의 태도를 인하여 바울도 디모데를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복음을 위해 수고한 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전적으로 수고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단지 목사이니까 순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형식적인 권위주의에 불과합니다. 참된 순종은 목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헌신적으로 수고할 때 자연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디모데를 즉시 보내지 못하는 이유를 서술합니다. 디모데가 당장은 바울의 일에 꼭 필요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에게 자신의 마지막 재판의 변호를 준비하게 했거나, 또는 디모데를 통해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화해시키려 했을 수 있습니다(1:15-17). 그러면서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이해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도 빌립보에 속히 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허락하시면 자신이 석방되어 빌립보 교회를 몸소 방문하게 될 것을 이전부터 현재까지 흔들림 없이 확신하고 있습니다. 


 


동역자 에바브로디도(25-30절)


‘에바브로디도’라는 이름은 로마 제국 시대에 아주 흔하였습니다. 이 이름을 줄인 형태가 ‘에바브라’입니다. 그렇다고 빌립보서에 나오는 ‘에바브로디도’를 골로새서(1:7; 4:12)와 빌레몬서(1:23)에 나오는 ‘에바브라’와 동일 인물로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의 사역자인데 반해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의 사역자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빌립보서에 나오는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께 헌신된 일꾼이었으며,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다섯 개의 문구로 소개합니다.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너희 사자’란 문자적 의미 그대로 ‘너희가 보낸 자’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회를 섬기다가 교회의 보냄을 받아 바울에게 왔기 때문입니다. ‘쓸 것을 돕는 자’라는 표현은 그가 빌립보 교회의 선교 후원금을 가지고 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돕는 자’로 번역된 단어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됩니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위해 헌금을 보내고 에바브로디도를 보내 돕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행한 ‘거룩한 섬김’이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이러한 표현들을 통해 바울이 얼마나 그를 귀하게 여기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권위의식이나 계급의식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함께 수고하고 노력한다는 ‘동역자’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에바브라디도가 병들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병들다’는 동사는 신체적인 병약함이나 슬픔, 수치심, 실망감 등의 심리적인 중압감으로 인해 심적으로 매우 산란해진 상태를 묘사하는 말로, 그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그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바울을 돕기 위해 빌립보에서 급히 달려 온데다가 감옥에서 바울을 시중드느라고 무리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다른 원인으로 갑자기 병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죽게 되었으나’는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고 합니다. 자기가 병든 것 때문에 근심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병든 것을 빌립보 교인들이 듣고 근심하는 것 때문에 근심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자기의 유익을 위해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기의 건강보다 성도들의 안녕을 더 염려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에바브로디도가 회복되었습니다. 바울이 이 사건을 회상합니다.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하나님께서 에바브로디도만 긍휼히 여기신 것이 아니라 또한 바울 자신도 긍휼이 여기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에바브로디도의 병 때문에 바울이 그의 곁에서 근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근심은 첫째 에바브로디도가 자신을 돌보다 깊은 병에 걸린 것이고, 둘째 그로 인해 그가 죽게 된다면 자신뿐 아니라 빌립보 성도들이 얼마나 애통해할지를 염려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병이 나았을 때 에바브로디도만 안심한 것이 아니라 자기도 기뻐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걱정하며 다른 사람을 인하여 기뻐하는 참 사랑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아마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을 당시에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함께 있다가 빌립보에 갈 때 그 편지를 가지고 갔을 것입니다. 바울은 건강을 회복한 에바브라디도를 급히 빌립보교회로 보냈는데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첫째, 성도들이 그를 다시 만나 기쁨을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에바브라디도의 질병 소식을 듣고 근심했던 성도들이 그가 회복되어 돌아온 것을 보고 기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기의 근심을 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근심을 던다’는 것은 ‘고통을 면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평안을 얼마나 바라고 있었는지, 교회에 대한 근심이 그에게는 고통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만약 에바브라디도가 바울은 시중들다가 병들어 죽게 된다면, 그가 얼마나 마음 졸이며 근심하였겠습니까? 바울은 그를 다시 돌려보내며 마음의 짐을 벗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어렵고 힘들 때 정성을 다해 도와주던 사람을 다시 보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유익을 내려놓았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취할 태도(29-30절)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의 수고를 자세히 언급하여 빌립보 성도들이 그에 합당한 사랑과 존경을 가질 수 있도록 당부합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하게 여기라.”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사명을 충실히 감당한 일꾼을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것은 교회가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의무감에서나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맞아들여야 합니다. 성도들이 주의 일꾼들을 알아주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물론 주님의 일꾼들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던 주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이 좋은 주님의 일꾼들이라도 때때로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만이 아니라 성도들의 격려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역하는 과정에 많은 외로움과 고통과 좌절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일에 힘쓰는 일꾼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에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으로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에바브로디도에게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하면서 다시 한 번 에바브라디도의 헌신적인 사역을 강조합니다. ‘돌보지 아니하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본래 ‘큰 액수의 돈을 걸고  도박하다’라는 뜻인데, 본문에는 ‘자신을 위험에 드러내다’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자기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바울을 도운 이유는 바울과 함께 복음 사역을 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것이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보람된 일을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이렇게 헌신적으로 섬긴 이유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빌립보 성도들이 보낸 것이 부족해서 에바브로디도가 몸으로 보충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풍족하게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부족함을 채운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빌립보 성도들은 형편상 로마까지 올 수 없으므로, 에바브로디도가 그들을 대신해서 바울을 헌신적으로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몸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무리해서 섬기다 보니 병이 났을 것입니다. 그의 병세가 악화되어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으나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를 살려 주었습니다.


 


본받을 만한 주님의 일꾼 


바울, 디모데, 에바브로디도과 같은 주님의 일꾼들을 통해 우리가 본받을 만함 점이 무엇입니까?


 - 동역자 의식이 있습니다


한자로 사람 ‘인(人)’은 두 사람이 기대어 서 있는 형상을 본떠 만들어졌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도 혼자서는 외로웠기에 하와라는 배필이 필요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에게는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 주님의 일을 하는데도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나 에바브라디도 같은 훌륭한 동역자들을 곁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주 안에 사랑하는 나의 아들’로 불렀으며 복음을 위해 마음을 같이하여 섬겼다고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복음 외에 다른 것으로 근심하지 않게 하시려고 에바브로디도의 죽을병을 고쳐주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함께 세워 가는 것입니다. 함께 수고하고 어려움을 분담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에서 신앙 공동체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저에게는 신실한 교역자들, 당회원들, 제직들, 교우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 나라를 함께 만들어가는 동역자들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기도로 참여하는 사람들, 물질로 참여하는 사람들, 손과 발을 움직여 참여하는 사람들이 다 필요합니다. 겸손하게 그리고 헌신적으로 드리는 우리의 모든 수고를 주님께서 기억하실 것입니다. 온 교우들이 ‘팔로마한인교회를 함께 짓는 사람들’이 되어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 나아가야 합니다. 


-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디모데를 속히 보내기를 원했습니다. 디모데만큼 바울과 같이 한마음 한뜻으로 빌립보 교회를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염려할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자기의 유익이 아닌 그리스도의 유익을 구하고, 교회와 성도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한 일꾼이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헌금을 전달하고, 빌립보 성도들을 대표해 바울을 옥바라지하기 위해 왔다가 그만 중병에 걸렸습니다. 자신이 심한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빌립보교회에 전해져서 성도들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심히 근심하였습니다. 어려운 순간에도 자신보다 교회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에게서 교회와 성도를 향한 간절한 사모함과, 염려를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그런 에바브로디도를 너무 사랑하고 의지했지만 그와 빌립보 성도들을 위하여, 그가 치유받자마자 그를 속히 빌립보 교회로 돌려보냈습니다. 진리의 수호를 위해 냉철함과 엄격한 자세를 잃지 않았던 바울의 면모와는 달리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모습입니다. 진실로 그리스도의 제자요, 종으로 살기 원한다면 교회와 성도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염려를 자기의 아픔으로, 교인에 대한 근심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기는 사역자가 참으로 훌륭한 사역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역자의 어려움을 자기들의 염려와 근심으로 여기는 교회도 참으로 좋은 교회입니다.


- 순교적인 신앙을 가집니다


본문은 주님을 사랑하는 두 종의 헌신적인 자세를 보여줍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혀 있는 바울까지 합치면 세 사람의 헌신된 일꾼들이 나옵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사역하면서 여러차례 위기를 겪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바울의 사역을 열심히 도왔습니다.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라면 결박당할 뿐만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습니다(행 21:13).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었기에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순교를 각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이 그들에게 있었기에 어떠한 위험이나 난관도 그들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했으며, 유대인들과 로마 제국의 어떠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의 복음 사역은 큰 열매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헌신된 종들이 언제나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교회를 위해 사력을 다하는 목회자와 그 목회자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성도들의 헌신이 있을 때 교회의 장래는 밝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나가면서


바울은 에바브라디도를 ‘나의 형제’, ‘함께 일하는 자’, ‘함께 군사 된 자’, ‘너희 사자’그리고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책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인정하시고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기억하실까요?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섬겼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삶과 신앙의 일치를 이룬 자, 그리스도를 위해 충성된 자, 정직하고 진실한 자라는 칭찬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성도는 본질상 ‘주님의 일꾼들’입니다. 교역자, 평신도의 구분은 기능적인 구분일 뿐 존재론적 구분일 수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성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복음의 동역자들이요 하나님 나라의 형제자매들입니다.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을 따라 하나님과 교회와 세상을 섬기고 봉사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수고하는 주님의 일꾼들을 사랑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누구의 섬김이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그에 합당한 사랑과 위로를 베풀어야 합니다. 목회자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물질과의 관계에 있어 깨끗한 신앙과 양심으로 본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 땅에서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쓰든 안 쓰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나갑니다. 나중에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주님 앞에 서서 결산하게 됩니다. 세월을 아끼며 때를 잘 활용하는 지혜로운 성도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금년 표어대로 새 역사에 역동적으로 참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인 치심 가운데 먼저 하나님의 사람,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고, 가정에 충실하고, 주어진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면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교회에 덕이 되고 살아계신 주님을 보여주는 능력의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