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너희 구원을 이루라

Author
Myung Myung
Date
2020-09-27 13:55
Views
495

성도들은 언젠가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거룩한 삶을 살았는지를 근거로 하여 상급이 달라집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낸 충성스런 성도들은 좋은 상급을 받을 것이요, 주신 시간과 달란트와 물질을 낭비한 자들은 주님 앞에 섰을 때 면목이 없을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육체적으로,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잘 자라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만 만족해서는 안 되고 영적으로 잘 자라야 합니다. 지금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어떠하십니까? 성형 수술 광고를 보면 수술 전과 수술 후를 비교한 사진을 보여줍니다. 예수 믿기 전과 믿은 후의 나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작년과 비교해 금년에는 신앙적으로 어떤 진보가 있었습니까?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에 대해 찬송하던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구원의 완성을 이루도록 권면합니다. 바울은 세 개의 명령형 동사를 중심으로 빌립보 교인들이 어떻게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잘 기억하고 삶에 적용하면서 날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12-13절)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는 바울이 즐겨 쓰는 호칭으로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들일 뿐 아니라 자기도 그들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과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통상 구원은 예수를 믿고 용서함 받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육신이 온전히 치료받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또한 넓은 의미에서 구원은 모든 악과 고난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뜻합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고친 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되어 유대인 관원들 앞에 섰을 때 베드로의 대답 중에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행 4:9) 이때의 구원은 병이 나아 온전하여짐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혈루증 걸린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막 5:34)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의 구원은 질병에서 낫는다는 의미와 예수 믿어 구원을 받는 의미가 함께 담겨져 있습니다.  


 


- 역동적인 성화의 삶 


구원의 여정을 3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과거적 구원이 있고, 현재적 구원이 있으며, 미래적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때의 구원을 ‘칭의’라 부르며 과거적 구원에 해당합니다. ‘칭의’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것이기에 구원은 확보된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영적으로 아이가 갓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아이가 시간이 흐르면서 키가 자라고 성숙해지는 것과 같이 믿음도 자라고 성숙해져야 합니다. 성숙해져가는 과정을 ‘성화’라 하며 현재적 구원에 해당합니다. 신앙생활은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닮아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도는 미래에 있을 구원의 완성을 소망 중에 바라봅니다. 그래서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좇아가노라”(3:14).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때 완전한 구원에 이릅니다. 그때 모든 것이 영광스럽게 바뀌기에 ‘영화’라고 부르며 미래적 구원에 해당합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에서 ‘구원’은 단수형이고 ‘너희’와 ‘이루라’는 복수형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언급된‘구원’은 개인의 영적인 구원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의미의 온전함이나 영적인 안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 구원을 위하여 각각 노력하라는 말이라기보다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한 자세로 교회가 하나 되도록 노력하라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그 과정에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영적 리더들의 헌신적인 수고와 교우들의 겸손한 섬김이 필요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 안에서 강조되었던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모범이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함을 가르쳐 주는 위대한 교사요, 그의 삶이 우리를 위한 본보기가 된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신자들이‘믿음 따로 삶 따로’의 삶을 살아 왔습니다. 교회 안에 다툼과 갈등이 있고, 교회는 세상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윤리적인 힘을 상실해왔습니다. 복음이 십자가 없는 값싼 복음으로 전락하다 보니, 교회 안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와 구원자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많아졌지만 정작 세상 한 가운데서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고백하고 그를 왕으로 섬기고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수가 훨씬 작을 것입니다. 본문은 구원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열어 줍니다. “구원을 이루라”가 현재 명령형으로 되어 있으니 지속적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뜻입니다. 구원이 고정적이거나 닫힌 것이 아니고 역동적이며, 열려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과 인간의 합작품이라든지, 인간의 노력의 산물이라든지, 혹은 구원을 윤리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과 관련하여 우리가 아무리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행위 구원론에 빠지지 않아야 할 근본 이유는 성도의 윤리적 책임 역시 성령을 통하여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


인간 스스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하나님을 찾을 수조차 없습니다. 범죄한 아담이 숲 속에 숨었을 때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라고 하며 아담을 부르시던 것처럼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했다고 하여 다 된 것은 아닙니다. 그 고백에 따른 삶이 함께 갈 때 우리의 삶은 점점 성숙해집니다.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삶 속에서 믿음을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구원을 이루어 갈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행하다’라는 동사는 신약성경에 모두 20회 나타나는데, 그 중 18회가 바울 서신에서 사용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 소원을 갖고 행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고 도우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성도들이 바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책임지십니다. 이 과정에 성령을 보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고 그 뜻에 따르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내는 사람에게 마음의 소원을 품게 하시고 그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역사가 제대로 일어나도록 우리 편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서 또한 우리를 통하여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로 교제하고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실 것입니다.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라(14-16절) 


빌립보 성도들은 왜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들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간섭하셔서 그들 안에서 구원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위한 성도들의 노력과 애씀은 필요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자신의 기쁘신 뜻으로 성도를 소원하게 하시고 그 뜻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당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악한 말로 원망하다가 멸망했습니다(민 11:1).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믿지 않을 때, 감사하는 마음이 없을 때, 그리고 사람보다 일 자체에 조점을 맞출 때 ‘원망과 시비’가 생깁니다. 교회 안에서 원망과 시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상처를 받고 교회를 등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원망과 시비가 발생하다면 그것은 함께 구원을 이루어 가는 삶에 걸림돌이 됩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서로 불평하며 원망하는 일과 옳고 그름을 따지며 분쟁하는 일을 금하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건전한 비판과 분별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걸핏하면 남을 탓하고, 원망하고, 핑계대고, 무조건 반대하고, 다투고,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는 영인지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며 하나됨을 돕습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행해야 하는 첫 번째 목적은 흠이 없고 순전한 자들이 되기 위함입니다. 구약의 제사 의식에서 제단에 온전히 바쳐지는 제물은 '흠이 없고 온전한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흠 없는’이란 주로 희생 제물과 관련해 사용되는 형용사로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고소할 것, 책잡힐 것이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흠도 없고 점도 없는 희생 제물과 같이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악하고 음란한’종말의 시대를 가리킵니다(마 12:39). 성도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거룩한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세상에서 빛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원망과 시비가 없이 행해야 하는 두 번째 목적은 생명의 말씀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바울이 선포한 복음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이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백성에게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밝히다’로 번역된 동사는 ‘굳게 붙들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경기장에서 운동선수가 달음질하는 것에 비유하는데, 복음을 굳게 잡고 그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 복음을 전한 자신의 달음질이 헛되지 않을 것이고 종말의 날에 주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아름다운 결말을 ‘자랑’으로 표현합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14회 사용되었는데 바울서신에 9회가 사용되었을 만큼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로, 허영심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빌립보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바울에게 안겨줄 수 있는 참된 자부심을 의미합니다.


 


나와 함께 기뻐하라(17-18절)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심령을 가졌으면 좋겠는지 진솔하게 밝힙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위해 노력하고 서로 협력하라고 권면하지 않습니다. 바울 자신도 그들의 영적인 성숙과 하나 됨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물과 섬김’앞에 ‘믿음의’라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이는 신자가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구약시대에 짐승들이 희생 제물로 드려진 것처럼 많은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관제는 구약의 제사 제도의 마지막 순서로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의식을 뜻합니다. 관제에 비유한 것은 빌립보교회를 위해 자신의 열정과 생명을 남김없이 다 쏟아 부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럴지라도 바울은 자신이 기뻐하고 그들과 함께 기뻐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들을 위한 바울의 희생과 수고는 그를 고통스럽게 한 것이 아니라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기쁨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그들에게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하면서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과 동일한 기쁨에 참여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은 마음과 뜻을 다한 헌신으로부터 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삶 


본문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성화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 겸손의 삶 


성도가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면 영적으로 긴장하게 되는데 바울은 그것을 두렵고 떨림으로 표현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벌을 받을까 보아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한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닫는 것이요,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는 것이요,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으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에게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적을 무찌르되 그 나라의 왕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아각 왕을 살려 주고 살진 소와 양을 많이 가져왔습니다. 사무엘이 그 이유를 묻자 사울은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기 위함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라고 대답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주변 사람들까지 불순종의 대가를 치릅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롬 5:15). 아담의 불순종으로 이 세상에 죄와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반면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자기를 낮추시고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복종하셨더니 하나님이 그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높이셨습니다. 투기, 분쟁, 시기, 다툼과 같이 하나됨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소원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 소원에 따라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 원망과 시비가 없는 삶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이 피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원망과 시비입니다. 우리에게 언제 원망의 마음이 올라옵니까? 그것은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거나 이기적인 욕심이 채워지지 않을 때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원망과 불평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상에서 흠과 점도 없이 거룩함으로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온갖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난 환경과 부모를 원망하고, 어떤 사람은 어린 시절 자기에게 상처를 주거나 손해를 끼친 친구나 이웃을 원망합니다. 결국 이러한 원망과 불평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다툼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은 원망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만약 우리 입에서도 똑같은 원망과 불평이 나온다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드러날 수 없습니다. 과거 출애굽 1세대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지 못해 원망하고 불평했을 때 약속의 땅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가나안의 첫 성인 여리고 성 공격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처음으로 하신 명령이 무엇입니까?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수 6:10). 1세대는 너무 말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2세대는 말씀에 순종하여 원망과 시비 없이 말씀에 순종하여 성을 칠일 동안 돌았을 때 여리고성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내 주장만 고집하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어렵게 만들지는 않습니까? 상대방을 이해하기보다는 무엇인가 꼬투리를 잡으려 하지는 않습니까?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할 때 자연히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하게 되고 원망을 하고 시비를 겁니다. 하나님이 왜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허락하셨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훈련을 시키기 위함입니다. 남들 앞에 자기를 드러내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며 다른 사람을 높이는 훈련을 시키기 위함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며 기쁨으로 상황을 견딜 때 마침내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이며 우리의 구원이 더욱 분명한 열매로 드러날 것입니다.


- 생명의 말씀을 붙잡는 삶


12절의 ‘복종하다’의 원래 의미는 ‘아래에서 듣다’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복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경청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바울이 복종을 강조하는 것은 뒤이어 나오는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권면이 허공을 치는 이야기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다는 것은 성경책만 움켜쥐고 다닌다는 말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배우고 그 말씀대로 살면서 변화되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교훈하시고 책망하시며 바르게 하시고 의로 교육하시기 위해 계시하신 것입니다(딤후 3:16). 성경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온전하게 할 것을 믿고 끊임없이 말씀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랍비에게 말했습니다. ‘랍비여 저는 토라는 세 번이나 훑었습니다’하나님의 율법을 세 번이나 통독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 사람에게 랍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토라는 당신을 몇 번이나 훑었나요?’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고 그 말씀이 우리 삶에 녹아들게 해야 합니다. 귀로만 듣던 말씀이 마음에 들리고, 더 나아가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에 우리의 삶의 내용이 될 때 교회는 하나가 됩니다.


 


나가면서


지금 힘든 때를 지나고 있습니다. 주일에 교회당에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목장에서 모여 삶을 나누던 것이 불과 6개월 전 일입니다. 이제는 교회당에 나가 예배를 드려도 괜찮을까 함께 모여 교제해도 될까 하는 염려가 앞서게 되었습니다. 물론 확진세가 다소 꺾이고 제재가 조금씩 완화되고 있고 백신이나 치료제 개발에 박차를 하고 있어 얼마 있으면 이용 가능하겠지만 우리의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분명합니다. 인류 역사상 이런 총체적인 위기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때마다 인간은 극복해 왔습니다. 현재의 상황이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고 성화의 과정을 유보하는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예배를 드리고 교제할 수 있는 창조적인 방안을 모색하며 신앙의 진보를 이루어야 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하였습니다. 언제나 기도와 말씀에 힘쓰며 우리의 삶 전체가 거룩한 산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우리가 얼마나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과 헌신의 삶을 살았는지에 따라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 날을 소망 중에 바라보며 지금은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 갈 수 있는 근거는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과 제물과 섬김 위에 자신을 제물로 드리더라도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성도들의 영적인 성숙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목회자의 가르침을 잘 받고 신앙의 진보를 위하여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하여 공동적인 노력을 기울일 때 성도들은 하나님의 흠이 없고 순전한 자녀가 되고,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납니다. 성도들의 변화된 모습이 사역의 열매들이기에 그리스도의 날에 목회자의 자랑이 됩니다. 하나 됨의 증거가 기쁨입니다.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17,18절) 함께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면서 온 교우가 바울의 말씀대로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함으로 서로를 섬기려 하고 성령이 주시는 능력 가운데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 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들이요 어둔 세상에 빛나는 별이요 항상 기쁨이 충만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