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권세 있는 부르심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1-24 13:58
Views
337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잘 뽑아 잘 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실제로 사람을 잘못 뽑았다가 낭패를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먼저 네 명의 제자를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대단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선택하셨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그들의 처음 모습은 믿음의 조상답지 않았습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기보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을 인하여 그들은 마침내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택하신 제자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제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주님의 제자로서 귀하게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그동안 살펴본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언된 메시아(foretold Messiah), 능력 많으신 이(powerful one),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이,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 사탄과 싸워 이기신 분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요한이 체포되자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먼저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 회개와 믿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회개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복음의 선포와 함께 시작된 예수님의 사역은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개역성경에는 전혀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헬라어 본문에는 16-20절까지 매절마다 ‘그리고’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연속되는 접속사는 한 장면이 끝나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것을 알려 주며 새로운 장면에 집중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비롯한 여러 등장인물들의 움직임과 대사를 실감나게 읽도록 도와줍니다.


   


천국 복음이 선포되었을 때 하나님의 통치가 무엇인가 거창한 모습으로 임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의 관심밖에 있는 갈릴리에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고 계셨습니다. 이는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사역이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행될 것을 시사해 줍니다. 또한 죄 사함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 오신 것은 복음을 전하다 우연히 들르신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예수님과 함께 일하고 예수님의 뒤를 이어 사역을 감당할 사람들을 부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나를 따라오너라”고 ‘먼저’말씀하셨다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당시 랍비들은 문하생이 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서 추리고 추려서 문하생을 뽑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직접 그들의 삶의 현장에 찾아가셔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즉 제자를 부르시는 데 있어 예수님이 주도권을 행사하십니다. 3:13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제자들을 택해 세우실 때 ‘자신이 원하시는 자들’을 부르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는 학문의 세계에서 맺어지는 선생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는 목적은 그들에게 유대인의 전통이나 성경해석학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움을 말과 행위를 통해 본을 보이시면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자들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이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지 못했으나 예수님과 더불어 지내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점차로 알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우리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우리도 날마다 예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사람을 부르시는데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 어부들입니다


그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던 어부들입니다.  


- 형제들입니다 


형제나 자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라면서 많이 싸우기도 하지만 또 서로 다독거려줍니다. 그들 중에 시기와 갈등이 있을 수 있지만 주님을 중심으로 지내면서 모난 부분이 깎여지고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 바뀝니다.  


- 예수님이 그들의 삶의 현장에 찾아오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배에서 바다로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십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세베대 그리고 삯군들과 그물을 기우면서 고기 잡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십니다. 그들 모두 각자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 예수님이 사명을 주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하시며 그들을 부르시며 그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들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사람으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 제자들이 즉시로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베드로 형제와 야고보 형제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나중에 오라든지 조금 더 생각할 여유를 달라든지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가야겠다고 이유를 달지 않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 세배대가 품꾼들을 데리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집이 제법 넉넉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품꾼들과 배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들이 그물을 가지고 고기를 잡는 일이나 아버지와 일하는 것이 무가치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데는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렇게 속히 따라 나설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베드로 형제들과 야보고 형제들이 예수님을 갈릴리 해변에서 그날 처음 만난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두 제자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예수님으로부터 진리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안드레였습니다. 아마 다른 한 사람은 요한으로 추측됩니다. 안드레는 자기 형인 베드로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하며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안드레가 베드로를 소개하기 전에 주님은 베드로를 보시자마자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요 1:4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그들에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셨을 때는 그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나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였습니다.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그들의 마음이 열리게 되었고 그들을 부르셨을 때 성령의 감동 가운데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마가는 “곧 그물을 버려두고”“곧 부르시니”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님의 부르심의 긴급성과 즉각적인 응답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제자로 부르심 받은 이유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메시아에 대하여 가진 생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오시면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로마군대를 물리치고 유대 땅에 다윗 때와 같이 정치, 사회, 경제면에서 새로운 번영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이 하시는 행동은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메시아는 왕도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는 것이 더 적합하게 보입니다. 세상에서 영향력이 있는 자들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활동 지역은 주로 갈릴리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갈릴리는 ‘이방의 갈릴리’요 그곳 사람들은 ‘흑암에 있는 백성’들이라 불립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볼 때 갈릴리는 촌 동네요 그곳 사람들은 이방인과 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함께 일하면서 복음을 증거 할 제자들을 유대가 아니라 갈릴리에서 부르셨습니다. 더구나 주님은 권력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어부들 중에서 부르셨습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가정과 자기의 생업에 충실한 평범한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셨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 방법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합니다. 겨자씨는 매우 작은 것이지만 그것이 자랄 때에는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정도로 크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통치는 처음에는 사람들의 주목을 별로 받지 못하고 미약하게 보이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을 말하십니다. 비록 제자들이 성격도 급하고 부족한 것도 많은 자들이지만 그들은 장차 예수님의 사역에 핵심 멤버들이 되어 섬기게 됩니다. 특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12제자 중 inner circle이라 할 정도로 예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을 때에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1:29).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셨습니다(5:37). 예수께서 변화산에 오르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9:2).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14:33).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 앞에 주저함 없이 순종하여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택함 받은 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명하십니다. 우리 모두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순종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쓰임 받는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따르기 전에 먼저 버립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행동은 ‘버림’과 ‘따름’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자신들이 살아오던 삶의 방식과 관계를 포기했습니다. 제자들이 그물, 아버지와 삯군들을 버려두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이지 문자적으로 가족 관계까지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다음에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들을 놓아두고 주님을 좇아야 할지라도 그런 것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누가 네 명의 어부들이 하던 일을 중단시키고 그물을 버려둔 채 예수님을 좇게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하신 말씀에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새사람으로 만드시고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케 하시는 분입니다.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 속에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을 보여 줍니다. 물론 각자 처한 형편과 처지에 따라 치러야 할 대가는 다릅니다. 결단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현재 하는 일을 그만두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야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좋다고 붙들었던 것을 놓아야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대가를 치르면서도 주님을 따를 만큼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난 것처럼, 바울이 지난날 소중하고 영광스럽게 여겼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 것처럼, 하늘나라 보화의 소중함을 아는 자들만이 버릴 것은 버리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현재 나의 상황에서 주님의 온전한 제자가 되기 위해 포기하거나 유보해야 할 것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포기했을 때 주님의 방법으로 채워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각 사람의 형편과 모습을 보시고 부르시는 주님과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됩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갈릴리 바다에 있던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단지 나를 사랑하느냐 묻지 않았습니다. 개역성경에는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Do you love me more than these?  'these'라는 남성 대명사이면 ‘이 사람들’이란 번역이 맞습니다. 베드로 곁에 있던 동료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중성 대명사라면 ‘이것들’이라 번역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에 관련된 모든 것, 즉 가정이나 사업, 사역, 취미를 다 포함합니다. 네게 관련된 모든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지 물으시는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고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 왜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까? 삶의 중심에 주님이 있지 못하고 자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던 마리아는 귀한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부어 드릴 수 있었습니다(요 12:3). 헌신의 기초는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부족하니 자기의 시간, 정성, 물질을 드리기 전에 자기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 것인지 먼저 따집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손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고 내 것을 주어도 아까움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광야에서 그렇게 불평과 원망을 일삼았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해야 하고 주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같이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주님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당신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역에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 주님만을 온전히 따르기 원하십니다.


 


제자도의 요약


주님은 제자들의 현 상황을 주목하여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그 부르심에 망설임 없이 그물과 함께 아비와 삯꾼들을 배에 버려두고 신속하게 주님을 따랐습니다. ‘버림’과 ‘따름’은 앞에 나온 ‘회개’와 ‘믿음’과 병행하여 강조되는 것으로, 마가복음이 제시한 제자도의 핵심적 내용입니다. 각 사람의 형편과 모습을 보시고 부르시는 주님과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건설과 확장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라”를 직역하면 ‘나의 뒤로 오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보다 앞서 나가면 안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분을 따라가며 그분께 배우고 그분과 함께 살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함께해야 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막 8:34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도의 핵심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라는 말은 자존감을 버리고 무조건 자기를 낮추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으로 살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져야 할 십자가는 다릅니다. 사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주님의 칭찬은 같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며 계속해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부르심과 부름을 받은 자들의 따름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이 말씀은 렘 16:16에 근거합니다.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그런데 사람을 부르는 목적이 다릅니다. 예레미야에서는 심판이 그 목적이고, 마가복음에서는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이 그 목적입니다. 급박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직면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셔서 죄와 죽음을 상징하는 바다로부터 사람들을 이끌어 내는 과제를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장차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는 종말론적인 표현입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온 세상의 심판이 임박해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과 그렇지 못하는 자들이 나뉜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의 사명은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을 모으는 것입니다(마 13:47-50). 따라서 “사람을 낚는 어부”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깨달아 말씀을 전하고, 또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며,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는 사역을 말합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잘 배워야 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역에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다락방에서 모여서 간절히 기도하다가 성령 충만함을 받고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들이 되어 복음 전파에 힘을 쓰며 사람을 낚는 어부들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에 감동되어 자기 주변에 몰려든 무리들에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외치니 말씀을 듣는 무리들이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묻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했더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해졌습니다(행 2:36-41). 시작은 미약했고 실수가 많던 제자들이지만 나중에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며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이제는 그 사명을 우리가 이어 받아야 합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의 사역은 천국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주님은 함께 일할 일꾼들이 필요했고 그래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어떤 특별한 자질이나 주님을 향한 남다른 열정이 있어서 제자를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이 은혜의 ‘부르심’때문에 그들은 ‘버림’이 가능했고, 그 ‘버림’이 있었기에 ‘따름’이 가능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현재를 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미래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어 세상에 빛을 비추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외치면서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사역이 2000년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신실한 제자들을 통해 놀라운 생명 구원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분의 동역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사람 낚는 어부”로 삼으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가정주부로서, 사업가로서, 선생이나 학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목회자로서 각자의 삶 현장에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은혜와 우리를 빚으시는 그 고집스런 손길을 묵상하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주님만을 역동적으로 따라가며 섬기는 이 시대의 참된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