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약속된 메시아 예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1-17 17:29
Views
398


1월 20일 수요일에 미국 46대 대통령이 취임합니다. 보통 때 같았으면 외국에서 많은 경축 사절이 오고 축하 공연, 퍼레이드, 파티 등 각종 행사가 벌어지고 취임식 당일에는 취임식장으로 가는 연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환호를 합니다. 그런데 이번 취임식은 상당히 다르게 치러질 예정입니다. 취임식을 앞두고 워싱턴 DC를 비롯한 미 전역에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강성 지지자들에 의한 폭력 사태가 재발할 수 있다는 경고 때문입니다. 6일에 발생한 의사당 난입이란 초유의 사건을 인하여 워싱턴 DC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더구나 COVID-19을 확산되고 있기 때문에 취임식장 근처에 있지 말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현재 Joe Biden의 공식 직함은 대통령 당선인(president elect)입니다. 그러다가 취임식을 하게 되면 당선인이란 단어가 빠지고 정식으로 대통령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 의해 태어나시고 나사렛에 계실 동안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메시아의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이 그에게 임하였을 때 비로소 메시아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메시아이십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그리고 받고 나신 후 일어난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뒤를 이어 본격적으로 사역하시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가 요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예수님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그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본문이 주는 교훈을 각자의 삶을 적용하면서 금년에도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역동적으로 섬기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세례(9-11절)


대통령의 취임식이나 왕의 즉위식은 많은 무리의 환호 가운데 거창하게 진행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의 메시아 취임식은 어떠하였습니까? 그날에도 수많은 무리는 있었지만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함이었지 메시아의 취임식을 축하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요단강에 오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출애굽했으나 그들은 광야에서 불평과 원망을 하다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출애굽 2세대를 이끌고 요단강 동편으로 와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정복했습니다. 1400년 후에 같은 이름을 가진 분이 요단강 동편으로 오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서편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2의 여호수아로서 그를 믿는 자들이 영적인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여셨습니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과 달리 마가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간단히 적고 있습니다.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예수님께서 어떻게 세례를 받았는지 구체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무리가 세례자 요한 앞에 나아와 자기 죄를 고백한 후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를 고백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왜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마 3:14에 보니 예수님이 자기에게 세례 받으러 오시는 것을 보고 요한이 말립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그때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 모든 의를 이룬다는 것은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과 그 이후에 성령께서 예수님 위에 임하심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의를 성취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의’는 마태복음에서 ‘옳음’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순종에 초점을 맞춘 성도의 바른 삶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는 종으로서 죽음까지 수용해야 할 사명임을 잘 알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길인 줄 알고 순종하셨습니다. 그 결과 죄인을 위해, 죄인을 대신하여, 죄인과 함께 죽음으로써 죄인을 살리고 하나님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오늘 우리들의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세 가지 현상을 보셨습니다. 첫째, 하늘이 갈라졌습니다. ‘갈라졌다’가 수동형으로 되어 있는데 ‘강한 힘에 의해 찢어지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지상 세계를 갈라놓았던 장벽이 제거되고, 하늘의 은총이 이 땅에 임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둘째,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습니다. 구약의 여러 예언자들이 성령의 임재를 종말론적 선물로 언급했습니다(사 32:15; 겔 36:26-27; 욜 2:28-29) 그러면 성령의 임재를 비둘기에 묘사한 이유는 뭘까요? 노아가 방주 밖으로 내보냈던 비둘기가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온 것이 심판을 상징하는 홍수가 끝이 나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됐음을 상징하듯이,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신 것은 이제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구원 시대가 열렸음을 상징합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 하나님께서 메시아로 올 자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실 것을 이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예언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임한 사건은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셋째,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내 사랑하는 아들’은 시 2:7에서 인용한 것인데 하나님이 세우신 왕, 곧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는 표현은 사 42:1에서 인용한 것인데 하나님이 선택하신 종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 주실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다윗 계열의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백성의 죄를 지고 가시는 종으로 묘사됩니다. 만일 성령이 ‘비둘기같이’내려오셨다는 대목에서 비둘기가 당시 랍비들이 자주 사용했던 비유처럼 이상적인 이스라엘 공동체의 상징이라면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표현은 새로운 이스라엘, 즉 종말에 재창조될 하나님의 백성을 예고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눈에 볼 수 있게 귀로 들을 수 있도록 시각적, 청각적 sign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일차적으로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자신의 하나님 아들 되심, 맡겨진 구원 사명의 막중함, 자신의 길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만족 등을 확신하셨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임명하시는 메시아라는 확인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세례식은 메시아 즉위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를 위한 대속적인 세례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에 서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려는’메시아로서의 공적 삶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헌신과 공생애의 출발을 묵상하며 우리도 올해에는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위한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광야 시험(12-13절) 


눅 4:1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신 후에 광야로 가셨습니다. 마가는 ‘곧’이란 부사를 사용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후 즉시 광야에서 시험받으셨음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시험을 이끄신 주체는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다고 합니다. 그 표현을 보면 예수님은 별로 내키지 않는데 성령이 억지로 가게 한 것 같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성령에게 ‘이끌리어’로 순화시킵니다(마 4:1; 눅 4:1). ‘몰아내다’로 번역된‘에크발로’는 ‘강한 힘으로 내쫓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마가는 ‘몰아내다’라는 단어를 통해 예수님의 광야 시험의 불가피성을 말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내쫓겨 하나님과의 분리를 경험했다면(창 3:22-23), 예수님은 살려 주는 영인 마지막 아담이 되시기 위해(고전 15:45) 광야로 내몰려 사탄의 시험을 이겨 내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새 시대는 악의 세력과의 영적 전쟁을 치러야만 임한다는 것이 묵시적 종말론의 특징입니다. 


 


마태복음(4:1-11)과 누가복음(4:1-13)에는 예수님이 받으신 세 가지 시험 내용과 예수님이 시험을 이기셨음이 자세히 나와 있으나 마가는 그저 시험받은 사실과 그 결과를 말할 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단어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광야와 시험. 광야는 단순히 황량한 장소가 아니라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구약에 보면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연단하시면서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를 시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키는 연병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십 일 동안 계셨던 것은 모세의 사십 일 시내산 체재(출 24:18; 신 9:9), 엘리야의 사십일 광야 여정(왕상 19:8), 그리고 ‘사십 년’간에 걸친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들짐승과 함께 계십니다. 사나운 들짐승이 주변에 있으나 감히 예수님께 접근하지 못합니다. 당시 이 마가복음을 읽는 많은 사람들은 로마 제국에서 많은 박해와 고난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나운 들짐승들과 함께 계셨지만 성령과 천사들이 예수님을 지켜주셨다는 것이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 시험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는 등장하는 존재들이 누구인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언급되는 초자연적인 존재들은 다 등장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성령님, 천사, 사탄. 세례 후에 있던 광야의 시험은 예수님의 죄에 빠지는가 하는 도덕성에 대한 시험이 아니라 누가 영적으로 power가 있는가 하는 대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후에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우리도 유혹을 받습니다 


여기서 시험보다는 유혹(temptation)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립니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사탄은 사십일 동안 굶주리신 예수를 교묘하게 유혹하였으나 그때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그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마귀는 실패하였지만 그렇다고 아주 예수님 곁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동안 떠나니라”(눅 4:13).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마귀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삼킬 자를 찾아다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우리에게 형통한 날만 있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다양한 시험이나 유혹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우리도 때로 인생의 광야를 걷지만 성령이 언제나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하셨다면 우리는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의 정체성 즉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확신이 우리를 유혹에서 건져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한 사명감이 있을 때 모든 일에 절제하며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 선포(14-15절) 


육상에서 계주를 할 때 먼저 달리던 선수가 baton을 뒤에 달리는 선수에게 넘겨주면 앞에 뛰던 선수는 빨리 옆으로 비켜나야 합니다. 더 이상 트랙에서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할 준비가 되셨으면 그것으로 그의 역할은 끝납니다. “요한이 잡힌 후”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이 헤롯 왕에게 붙잡혀 더 이상 사역을 할 수 없는 때를 가리킵니다. 세례자 요한의 체포를 묘사하는 ‘잡히다’라는 동사는 마가복음에서 19번 사용됩니다. 예수님과 그를 따른 제자들의 수난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특히 ‘잡히다’는 신적수동태, 즉 하나님이 주체가 되시는 수동태로 되어 있는데, 세례자 요한과 이후의 있을 예수님 및 제자들의 체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혹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쁜 소식을 의미합니다. 그 기쁜 소식이 이제 이방 땅 갈릴리에서부터 전해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메시지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때가 찼고 (the time is fulfilled)


헬라 말에 ‘때’를 가리키는 단어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chronos’라 하여 몇 년 몇 월 몇 시와 같이 연대기적인 시간을 가리킵니다. 또 하나는 ‘kairos’라 하여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때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 하나님이 아들을 이땅에 보내신 때,  성령 충만하여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등입니다. 여기서 ‘때’는 문맥상 메시아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찼다’는 말보다 ‘이루어졌다’는 말이 더 원어에 가깝습니다. 선지자들이 내다보았던 메시아 시대는 더 이상 미래적이거나 임박한 상황이 아니라, 이미 임했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the kingdom of God is at hand)


하나님 나라는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 아담에게 당신이 만든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두 번째 아담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됐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웠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나라가 시간적으로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습니다. 선지자들이 내다보았던 메시아 시대가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메시아 시대는 더 이상 미래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짐으로 지금 존재합니다. 다만 그 나라는 시간적으로 이미 종결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 현장에서 계속 진행되어 가는 그러한 역동적인 실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already, but not yet’즉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다’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시대에 대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그에 합당한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선포는 두 개의 명령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회개와 믿음은 신약 성경 전체에서 자주 언급되는 제자도의 기초입니다.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이니까 당신들은 계속해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 회개하라 (Repent)  


회개한다는 것은 단순히 윤리적, 도덕적으로 잘못한 것을 뉘우친다는 뜻이 아니라 악의 세력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돌이켜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구원의 새 시대가 열렸음을 믿고, 그것을 향해 돌아서라는 뜻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 같으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박국 1:13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아파하시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되겠구나 결단을 내리는 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 2:13). 


- 복음을 믿으라 (believe the good news)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한 곳입니다. 죄인이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죄 사함과 의로움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도록 십자가 사역을 통해 죄를 사해 주시고, 완전한 순종으로 이루신 의로움을 주셨습니다. 복음은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며,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합니다. 그래서‘복음을 믿으라’하셨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이미 현존해 있는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 우리의 자세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기뻐하셨듯이 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기뻐하십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겠습니까?


- 회개와 믿음


예수님은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에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행한 어두움의 일들을 끊고 버리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아울러 복음을 향해 믿음으로 마음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복음을 믿는 자는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한때 갈릴리는 버림받은 땅이라 하여 ‘가불’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버려진 그 땅에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때로는 초라한 갈릴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이제 영원히 버림받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우리 인생의 갈릴리에 함께 하신 주님을 의지하며 이미 임한 천국을 누려야 합니다.


- 말씀에 대한 순종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사건과 성령님에게 이끌려 40일간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받으신 사건은 율법을 완성하기 위한 순종이었습니다. 불순종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예수님은 온전한 순종으로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고, 그 승리로 인해 우리는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경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나 그 경험이 영적인 분별력과 함께 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가진 약간의 경험이 도리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의지하며 순종하는 사람들을 쓰십니다. 우리의 경험이나 생각을 넘어 주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이 베푸시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 사무엘의 고백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 복음 전파     


복음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일들에 관한 기쁜 소식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받아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소명을 따라 자신의 모든 삶을 내려놓고 예수님이 오실 길을 준비하라고 외쳤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재림하실 주님의 길을 준비하며 복음을 전해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고 명하십니다. 복음 전파에는 사탄의 공격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야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셨고, 또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말씀대로 그분 이름을 의지해 믿음으로 선포하면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러나 이 문은 영원히 열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천국 문이 닫히기 전에 땅 끝까지 이르러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주님의 역사는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올해도 복음을 전하고 복음 안에서 살아감으로 예수님을 보여주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가면서


우리는 죄인인지라 우리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도 없습니다(행 4:12). 하나님이시고 의인이신 예수님만이 죄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죄인의 구원을 어떻게 이루셨습니까?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셨지만 자신을 죄인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고 우리를 대신해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다 담당하셨습니다. 죄의 고백을 통하여 날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며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추수할 일꾼은 부족하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금년에 한분이 적어도 한분씩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분과 함께 있다면 광야에 있을지라도 그 삶은 복이 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승리의 삶을 사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삶, 주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