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약속된 메신저 세례자 요한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1-10 15:30
Views
423

소명의 의미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사명자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보내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자기를 보내셨다는 것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사명을 감당하도록 삶의 현장에 보내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자기는 부르심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모세, 기드온, 예레미야도 부르심을 받을 때 주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쓰시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결국 그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부족하지만, 연약하지만, 능력 주시면 감당하겠다는 것이 사명자의 자세입니다. 사명자는 사명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을 깊이 알아갑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동행하다’는 동사는 문법적으로 단순히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가는 사람의 의지가 포함되어 자발적인 순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 길을 마지못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는 비결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사명자들과 언제나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다윗 등은 다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그 사명을 지금 제대로 감당하고 있습니까? 맡기신 사역을 성실하게 준비했던 한 사명자를 살펴보면서 신년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를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구약 예언의 성취(2-3절)


마가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서 인용하였다고 하지만 사실은 출애굽기, 말라기, 그리고 이사야서에 나오는 말씀들을 종합한 것입니다. 


출 23:20,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사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말 3:1a,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이 예언들은 서로 다른 시기에 한 것들이지만 출애굽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3:20에서는 출애굽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주의 사자를 보내어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서 약속의 땅까지 인도하실 것을 약속합니다. 이사야 40:3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는데 제2의 출애굽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라기 3:1에서는 장차 일어날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속행위를 언급하는데, 종말에 있을 출애굽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2절은 출 23:20과 말 3:1을 합성한 것이고, 3절은 사 40:3을 인용한 것입니다. 2절의 ‘네 길’과 3절의 ‘주의 길’은 동의어로, 문맥상 ‘예수님의 길’을 말합니다. 마가는 예수님과 관련해 일어난 사건들이 구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그 전조를 세례자 요한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말라기에 의하면 주의 사자는 여호와의 마지막 심판의 날이 도래하기 전에 주의 길을 준비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인물입니다. 이사야는 그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부르며, 그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고 메시아의 오실 길을 곧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활동한 장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당이나 시장이 아니라 인적이 드문 광야입니다. NIV에서 사용된 desert라는 단어는 광야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합니다. 사막 하면 모래로 덮여진 사우디나 사하라 사막을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영어로는 wilderness라는 말이 더 적합합니다. 이스라엘의 광야는 잡초가 여기저기 널려지고 바람이 부는 황량한 언덕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영성을 키우고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광야에 있었습니다. 모세는 도망자로서 40년을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을 광야에서 지내며 신앙의 연단을 받았습니다. 엘리야가 광야에서 지내며 사역을 준비했습니다. 예수님은 40일을 광야에서 금식하며 공생애를 준비하셨습니다. 바로 그 황량한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는 바로 성경에 약속된 메신저입니다. 


 


회개의 세례 선포(4-5절)


세례자 요한의 사역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2-3절에서 말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일’이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에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셨고(1:14), 나중에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회개하라’고 선포합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과 제자들이 ‘회개 사역’으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로 번역된 ‘하마르티아’는 ‘과녁에서 빗나간 상태’를 가리킵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물질, 권세, 건강)을 사용하여 스스로 행복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살아보려는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세를 가질 때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었던 아담과 하와와 같은 죄를 범하게 됩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2). 우리의 삶이 mess up 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복음이란 제한된 자원 속에서 죽어가는 인생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밖에서 우리를 위하여 오셔서 구원을 이루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뒤를 이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본격적으로 사역하실 때에 전하신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 회개하고 믿는 것이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회개는 단순한 마음의 변화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가치를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는 전인적 행동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세례로 번역된 ‘밥티스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 물속에 깊이 잠겼다가 일으켜 세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세례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구약 성경에는 의식적 부정을 정결하게 하는 씻음이 명시되어 있고(레 15장), 회개와 관련된 ‘씻음’은 이사야 1장에 등장합니다. 1세기 유대교에는 ‘개종하는 사람들을 위한 세례’라는 것이 존재했고, 쿰란 공동체에는 장차 임할 심판에 대한 준비로 죄를 고백하며 몸을 씻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어떤 유래에 근거하여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죄를 자복한 사람들에게 회개의 징표로 물 세례를 시행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 ‘세례자’라는 호칭을 붙입니다. John the Baptist. 세례자 요한이 정확한 번역인데 개역성경에서는 ‘세례 요한’으로 되어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한 요한의 정결 의식을 유대교의 성전 제의와 비교하면 세 가지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유대교 정결 의식에는 제물로 짐승이 사용되지만, 요한의 정결의식에는 회개가 요청됩니다. 둘째, 유대교에서는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 정결해지지만, 요한의 세례는 ‘물’이란 매개체를 사용합니다. 셋째, 유대교는 짐승을 통한 반복적 정결 의식을 행하지만, 요한의 물 세례는 일회적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요한에게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구원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죄를 자복하거나 세례 받는 행위 자체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모든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거쳐서 하나님과 첫 언약을 맺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것처럼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베푼 세례는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구원을 대망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첫 관문이라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선포한 강력한 메시지와 회개 운동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개역성경은 다소 밋밋하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NIV의 번역을 볼까요? “the whole Judean countryside and all the people of Jerusalem went out to him”유대 땅 시골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왔다고 합니다. 물론 이 표현은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종교지도자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많은 유대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몰려든 것은 그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인정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굶주렸다는 증거도 됩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400년 동안 하나님의 음성이 이스라엘에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영적인 암흑기였습니다. 물론 그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쉬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준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위로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차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회개의 메시지를 증거하니 백성들은 그를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였습니다. 그들의 심령을 괴롭히던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싶었습니다. 바짝 마른 스펀지가 물을 잘 흡수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메시지를 달게 받아 들였습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황량한 광야로 나아가 세례자 요한 앞에 자기 죄를 고하고 세례를 받던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각자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심령에 갈급함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움을 받기 원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감격하며 아멘으로 화답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얼마나 시간과 정성을 투자합니까? 주님 앞에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기 원합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시면 감격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실망하시겠습니까?   


 


광야의 삶(6절) 


요한이 입은 낙타털 옷은 정교하게 지은 것이 아니라 그냥 낙타 가죽을 벗겨서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허리에 가죽 끈으로 적당히 둘렀을 뿐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복장은 엘리야를 연상시킵니다.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왕하 1:8). 그리고 요한이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를 먹이신 것처럼(왕상 17:6), 광야에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최소한의 끼니를 채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도 엘리야와 같이 광야와 요단강에 있었습니다(왕상 19:3-18; 왕하 2:4-11).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을 향해 바알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올 것을 촉구했는데(왕상 18:21), 요한도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처럼 ‘광야의 삶’을 살며 자기를 먼저 성결케 하였고, 엘리야처럼 ‘주의 날’이 임하기 전에 이스라엘을 성결케 하는 사명을 수행하였습니다(말 4:5). 


  


예수님 증거(7-8절)


요한이 선포한 첫 번째 것이 회개의 세례였다면, 두 번째는 자기 뒤에 오실 예수님에 대한 선포입니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한마디로 자신은 철저히 예수님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신발 끈을 푸는 일은 워낙 천한 일이어서 노예 중에서도 히브리인 출신 노예는 하지 않고, 이방인 출신 노예가 하도록 규정됐을 정도였습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고 인정했습니다. 또 요한은 제자들까지 있었습니다(2:18). 그가 죽은 후에도 그를 따르던 자들이 종파를 형성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세간의 주목을 끌었던 요한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한계를 알았습니다. 자신의 역할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에 그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세례자 요한은 말합니다.“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그의 사역을 대표하는 것이 물세례인데 예수님이 행할 성령 세례에 비교할 바가 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다 혹은 받다’는 표현은 신약성경에 모두 7번 나옵니다. 이 가운데 6번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이 베푸실 세례를 묘사할 때 사용합니다. 나머지 한 번은 고전 12:13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누구에게 물세례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제자들이 세례를 줬을 뿐입니다(요 4:1-2).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을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는 구약 선지자들의 선포와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는데, 에스겔은 종말론적 비전 가운데 성령이 임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 것을 예언했습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5-27). 요엘은 메시아 시대에 부어질 성령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욜 2장). 구약 시대에 제한적으로 나타났던 성령이 모든 백성에게 부어져서 성령을 받은 자들은 예언을 하고, 꿈을 꾸며, 이상을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사야 63장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반역하여 그의 성령을 근심하게 했으나 성령이 광야의 백성을 인도하고 참 안식을 주신다고 언급합니다.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님이 성령 충만하신 분으로서 베푸실 죄 사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했습니다. 또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식탁 교제를 나누셨는데, 이는 죄 사함의 기쁨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이 죄 사함은 구원의 새 시대를 여는 종말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사명자의 자세


- 사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실 길을 준비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며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그 사명을 죽기까지 잘 감당하였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사명이 주어졌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왕이요, 심판자로 임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절하는 불의와 어둠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다시 빛 가운데 살게 하시고 이 땅에 의와 평화를 주시기 원한다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자신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서, 특히 우리 가정과 사회, 국가와 민족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은혜를 입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힘써서 전해야 합니다. 


- 사명자로서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마가는 당시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고, 스스로 신이라 칭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취했던 로마황제가 다스리는 세상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된 복음이요, 구세주요, 참 하나님이심을 선포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세상의 거짓된 가치관과 세속주의 흐름 속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가 입은 복장과 그가 먹는 음식과 그의 삶을 통하여 메시지를 생생하게 전달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버릴 것은 버리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충실한 요한의 모습은 우리들에게 도전을 줍니다. 우리 모두 세례자 요한과 똑같이 살 수는 없지만 그의 삶의 자세는 본받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광야의 삶’을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움이 있는 사람들은 단순히 먹고 사는 데만 관심을 가지거나 자기의 만족만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시간이나 물질이나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 희생과 결단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광야의 삶’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광야의 삶’을 통하여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자신이 설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띤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며 그가 엘리야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 떼와 같이 몰려들어 그의 메시지를 듣고, 그 앞에서 무릎 꿇고 죄를 자복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업적을 과시하면서 얼마든지 우쭐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설 자리를 잘 알았습니다. 영화로 따진다면 자신은 엑스트라나 조연이지 결코 주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의 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모여든 무리들에게  예수님을 '능력 많으신 이',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 헌신했습니다. 이 같은 자세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세례자 요한의 고백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그에게 세례를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시작하자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조용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대의 세례자 요한이 되어 말과 삶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던 세례자 요한처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는 사명자의 삶을 살고 싶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실 때, 헌신할 사람을 찾으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기꺼이 나가지 않으시렵니까? 그러려면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경건의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민감하게 볼 수 있는 영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기쁨을 주고 위로를 주는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직분보다 중요한 것이 사역입니다. 직분이 있어도 일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새해에는 목장에서 사역부서에서 다른 교우들과 하나가 되어 열심히 뛰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금년도 표어가 ‘주님과 동행하며 역동적으로 섬기는 교회’입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맡겨 주신 일을 감당하면서 가정과 교회와 삶의 현장에서 세례자 요한과 같이 겸손하고도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능력 있는 사명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