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사랑의 완성이신 그리스도

Author
Myung Myung
Date
2020-12-20 16:54
Views
379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이 땅에 탄생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부활절과 함께 기독교 최대의 명절이지만 세상 사람들도 축하하는 날이기에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성탄절하면 떠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크리스마스 카드, 크리스마스 트리, 크리스마스 캐럴, 산타크로스와 선물 등등. 성탄절 카드에는 Merry Christmas라 쓰여 있어 성탄절이 즐거운 명절임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죽으러 오셨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감격스러운 날이지만 아들을 보낸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성탄절은 그저 축하하고 기뻐하는 날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년 이맘때쯤이면 많은 교회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주제로 한 성극을 준비하고 찬양대에서는 칸타타를 연습하느라 분주합니다. 그런데 금년에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대부분의 교회 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 모든 예배를 online으로 중계하기에 YouTube를 통해 보고, 회의나 성경공부 등은 zoom을 통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12월 들어 바이러스가 급속하게 확산됨으로 인해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이 금지가 되고, 함께 사는 자기 가족 외에는 친지들과 모이는 것조차 제한하고 있습니다. 여러 회사의 백신이 FDA 승인을 받아 접종을 시작했다지만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접종되려면 앞으로도 몇 달은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상황이 어수선하더라도 성탄절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지금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이번 성탄절을 어떻게 보낼 계획인가요? 성도들과 함께 모여 예배드리며 축하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에 관한 내용을 읽고 들으면서 성육신과 사역, 대속의 죽음, 부활과 재림의 의미를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며 신앙생활의 방향을 재조정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토대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우연히 오신 것이 아닙니다. 구약을 장차 오실 메시아에 관한 책이라면 신약은 이미 오신 메시아에 관한 책이라고 합니다. 구약 시대 선지자들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베들레헴 탄생, 그분의 사역, 고난, 죽음, 부활 등을 예언했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하나하나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은 요한일서 4장을 통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이 베푸신 그 크신 사랑과 그 사랑을 입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한일서 4장은 크게‘영들을 시험하라’는 권면(1-6)과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7-21)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두 권면을 보면 별로 연관이 없을 것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 된 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영들을 시험하라’는 것은 영들 중에‘하나님께 속한 영’이 있고 ‘세상에 속한 영들’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영’은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하게하고 서로 사랑하게 합니다. 반면에 ‘세상에 속한 영들’은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영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방해하고 그리스도인들의 형제사랑을 방해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이 세상에 속한 악령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여 미혹을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의 기원: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7-8)


요한은 ‘사랑의 사도’답게 본문에만 ‘사랑’, ‘사랑하는 자’, ‘사랑하다’라는 단어를 19번이나 사용합니다. 요한은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불렀습니다. 애정이 듬뿍 담긴 이 호칭은 본서에 계속 등장합니다. 요한은 성도가 서로 사랑할 것을 권면하며, 근거를 제시합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 즉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을 반드시 가지며,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이기에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물론 여기서의 사랑은 소유, 만족, 욕망, 계획, 생각 같은 세속적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창조하신 영혼을 끝까지 사랑하는 신적 사랑과 그것을 바탕으로 성도가 영원히 추구해야 할 온전한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내려놓음, 기다림, 용서, 희생, 신뢰가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사랑의 표현: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9-11절)


요한은 ‘사랑은 여기에 있다’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사랑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했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롬 5:8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할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라는 표현을 보면 ‘우리가 죄인들’인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영적인 존재이신데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육신을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개념이 아니라 우리에게 보이고 만져진 실재였습니다. 요한은 복음서에서 이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사랑이라 표현했습니다(요 1:14).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려면 죄를 지었을 때 죄인은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셨기에 우리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 화목제물로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화목제물’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고, 그분과의 화해를 가져다주는 제물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심판을 받으시며,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독생자를 희생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기에 우리의 죄가 속해지고 영생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며 감정이 복받쳐 오는 요한은 다시 한 번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면서 한층 더 강하게 권면합니다.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마땅하도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요한 일서에 세 번 쓰였는데 모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강조합니다. 예수님 안에 산다고 말하는 자는 예수님처럼 행동해야 마땅합니다(2:6).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을 아는 자는 형제를 사랑해야 마땅합니다(3:16). 의무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독생자까지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자발적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체험: 서로 사랑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내주(12-16절)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모세도 이사야도 단지 하나님의 영광만 봤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를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빌립도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 주시면 만족하겠다고 했습니다(요 14:8). 이에 예수님은 자신을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은 임재의 감격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이 본문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구주’라는 표현은 요한이 쓴 글에만 등장합니다(요 4:42). 원래 이 용어는 로마 황제에게 사용된 칭호였는데, 요한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진정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선언합니다. 군사력을 가지고 통치한 로마 황제와 달리 예수님은 친히 세상 죄를 대속하기 위한 화목제물이 되셔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절정인 예수님을 믿고 고백함으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 큰 사랑이 우리를 통해 전해짐으로 그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개념은 물리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몸 안 어디엔가 계신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아들을 주신 하나님과 아들을 믿는 신자와의 밀접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요 14:17에서 성령에 대해 말씀하실 때 같은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함께 거하시는 것’은 ‘속에’들어가기 전에 “곁에”계시는 것이고, ‘속에 계시는 것’은‘내부에’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내주 개념을 또한“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요 14:20)으로도 표현하셨습니다. 이것 역시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하나님과 우리가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물론 우리의 서로 사랑이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전제 조건은 아닙니다. 사랑의 시작은 사랑이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그분의 자녀가 되고, 그 사랑의 절정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로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습니까?


-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지금도 끊임없이 일하십니다. 그는 사랑하는 자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버리셨고, 자신의 영을 보내 사랑하는 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사랑하는 자들이 거할 영원한 처소를 지금도 예비하고 계십니다. 자신을 믿고 신뢰하는 자들이 간절히 구하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이렇듯 자신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언제나 최상의 것으로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이 바로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요한은 ‘서로 사랑하자’고 권면하면서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을 아는 것, 즉 믿는 것과 연결시킵니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인 반면,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모순입니다. 12절에는 사랑을 베풀 때, 15절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할 때, 16절에서는 형제를 사랑할 때 하나님과 상호 거주하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상호 거주하는 길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가진 사람 안에 거하시며 그 또한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되어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심으로 죄인을 향한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을 받을 때 가능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할 수 있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영이 임할 때 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은 사랑의 영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을 마음에 모시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영인지라 언제나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는 영인지라 서로 사랑하게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성품, 성령의 인도, 성령의 감동을 따라가는 사랑을 행해야 합니다.  


 


-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요한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강조하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면서,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가치는 실제로 서로 사랑할 때 얻어집니다. 사랑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동기와 행동을 통해 서로 나누고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 최고의 절정은 인간의 죄 사함을 위해 그분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보내신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과 인간을 향한 사랑을 완성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그분의 백성인 우리도 마땅히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한 해를 돌아봅시다.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보이는 형제자매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자 책임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이 이기적이면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통해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세상은 사랑이 넘치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의 생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선물을 받으셔야 하는데 우리가 선물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선물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면 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우리가 직접 예수님께 생일 선물을 드릴 수는 없지만 고통 받는 이웃에게 선물하는 것이 곧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혼자 계신 어른들, 소외된 이웃들, 선교지에 사는 사람들, 어려운 환경에 있는 외국 친구들 등입니다. 지난 10월에 San Telmo 지역에 Overflow Ministry에서 단기선교 갈 때 많은 분들이 헌금과 물품으로 donation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이번에는 멕시깔리 신학교 신학생들과 그들이 섬기는 사람들을 위해 후원하자고 했을 때 역시 많은 분들이 동참해 주셨습니다. 모은 것이 많아 한 번에 다 가져갈 수 없어서 이번 화요일에 선교사님이 다시 오기로 했습니다. 윤숙경 권사님이 지난 주 카톡을 하나 보내셨습니다. 도미니카 공화국에 두케사라는 쓰레기매립장이 있는 마을에 아이티 난민들 2500여 가구가 사는데 현재 어린이들 500여명이 매주 모인다고 합니다. 이 아이들에게 훈련소와 보호소를 지어주는 것이 기도제목이라 합니다. 그 마을에는 현재 놀이터가 없고 온통 쓰레기뿐이라 합니다. 이 아이들은 한 번도 크리스마스를 경험한 적도 없답니다. 금년이 처음으로 그 의미를 알고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윤숙경 권사님이 이끄시는 Youth Engedi에서 연주 video와 함께 성금을 모아 보낸다고 합니다. 혹시 동참하기 원하시는 분들은 윤숙경 권사님에게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나가면서


성탄의 계절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이고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아주 명백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이 땅에는 수많은 관계가 깨어졌고, 아픔과 상처와 절망과 고통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셨습니다.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 안에, 더군다나 사망 아래 놓인 죄인 안에 크고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우신다고 하니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함으로써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며 형제를 힘써 사랑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하나님과 그 자녀들의 신비한 연합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사랑 안에 거하면 하나님과 우리가 상호내주 한다고 합니다. 바른 신앙 고백과 성도가 서로 교통하고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고 우리 안에 완전한 사랑을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성탄절은 회복의 절기입니다. 미움 대신에 사랑을, 절망 대신에 소망을 주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받으려하기 보다 주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족 간, 교우 간, 이웃 간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모두들 웃고 떠들고 즐거워하는 성탄절에 우리는 자기를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한없이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 구원의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탄절에 사람들은 선물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그 어떤 선물보다도 가장 큰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가장 큰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나눠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 인생에 어떤 놀라운 변화와 능력을 주실 수 있는 분인지 소개해야 합니다. 


 


성탄의 밤에 수많은 천군 천사들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바라보며 장엄한 평화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를 아는 우리 모두는 그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며 기뻐합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고 이웃을 품으면서 진정한 회복을 이루며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다”(눅 1:49)는 마리아의 고백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하실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