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그 날을 기다리며

Author
Myung Myung
Date
2020-12-06 14:08
Views
373

COVID-19으로 인한 확진자 수가 최근 들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확진자가 전 세계적으로 6600만 명인데, 미국은 거의 1/4인 1500만 명에 근접하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중증 환자를 치료하는 ICU 수용능력이 15%이하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미 백신이 개발되었다지만 모든 사람들이 백신 접종을 받기까지는 앞으로도 몇 달이 소요될 것 같습니다. 샌디에고 카운티는 오늘밤 12시부터 강화된 자택 격리 행정 명령(stay-at-home order)이 시행되어 적어도 3주간 지속된다고 합니다. 외출 시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고, 가족 외에 만남을 자제하라고 합니다. 업종에 따라 문을 닫아야 하거나 수용 인원을 20% 정도로 줄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격리 조치, 제한 조치가 강화되어 우리의 삶이 불편해진다 하더라도 기도와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는 위축될 수 없습니다. 앞뒤 좌우가 막힌 것 같은 상황에서도 위로 하나님과의 통로는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창의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교우들끼리 직접 대면하여 교제하는 것은 어렵다 할지라도 카톡이나 다양한 SNS를 이용하여 소통하면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성탄절과 연말연시를 맞이해야 합니다. 


 


현재의 상황이 실타래가 얽힌 것 같이 mess-up 되어 좀처럼 돌파구가 보이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현재 당하고 있는 문제가 도저히 혼자서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상황에 있을 때 어떻게 대처하기 원하십니까? 대림절 기간에는 주로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을 위주로 설교를 해왔는데 금년에는 구약성경을 토대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니 이스라엘도 국가적으로 그런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 가운데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고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실망시켰습니다. 이사야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1:3)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5:2). 그 결과 예루살렘은 타락하고 부패한 성읍이 되고 말았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공평과 의로움으로 다스리기보다 자기들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약한 사람들의 재산을 강탈하고 뇌물을 사랑하고 고아와 과부 등 약한 자들을 억울하게 하며 고통을 주었습니다. 지도자들이 타락하니 백성들도 타락하였습니다. 그들의 삶은 하나님 말씀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고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여졌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1:18)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들에게는 복을 주시나 거스르는 악한 자들에게는 화를 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한 유다를 징벌하는 도구로 앗수르를 사용하셨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유다를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하시고, 앗수르가 멸망시킨 북 왕국 이스라엘의 거민들 중 남은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리라는 예언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사야는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아에 의해 완성될 평화의 나라를 예언합니다. 그 메시아가 우리가 믿고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의지하며 동행하며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주님이 베푸시는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며 평강 가운데 성탄절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메시아의 탄생(1-2절)  


- 다윗의 혈통 


줄기에서 난 한 싹과 뿌리에서 난 한 가지의 이미지는 앞 단락인 10장에서 레바논의 높은 나무가 찍히는 것 혹은 빽빽한 숲이 베어지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앗수르 제국의 거대한 세력이 무너진 다음에 새로운 통치자인 메시아의 시대가 조용하게 열리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사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한 싹’은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줄기’는 잘리고 남은 그루터기를 의미합니다. 당시 다윗 왕가는 몰락 과정에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망했고 남 유다도 큰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루터기밖에 남지 않은 다윗 왕조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이사야는 메시아를 가리켜 왜 ‘다윗의 줄기’라 하지 않고 그 아버지인 ‘이새의 줄기’라고 했습니까? 다윗이나 솔로몬이 누리던 과거의 영화는 다 사라지고 이제는 불에 타다 남은 재와 같이 초라한 모습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혈통으로 볼 때 메시아는 다윗의 가문에서 나는 것을 말합니다.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너무 미약하고 초라해 보이지만, 그 싹이 자라 온 세상에 소망과 생명이 된다고 합니다. ‘결실할 것이요’메시아가 이새의 가문에서 태어날 뿐 아니라 크게 성장하여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을 나타냅니다. 메시아가 오시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이 되었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것입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롬 9:22)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였기에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들이 남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명을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 여호와의 영 


메시아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강림하시리니’는 문법적으로 보면 여호와의 영이 내려와 잠시 머무는 정도가 아니라 자리를 잡고 계속 함께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메시아는 여호와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세상을 통치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앗수르 왕이 스스로의 지혜와 총명으로 세상을 정복했다고 자랑하는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여호와의 영의 특징을 세 가지로 묘사합니다. ‘지혜와 총명의 영’은 사법적인 분별력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셔서 백성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모략과 재능의 영’은 군사적인 능력을 가리킵니다. 새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 대적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그를 이기게 하시고 대적을 평정케 하신 것을 연상시킵니다.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실함을 의미합니다. 문맥상 여기의 ‘지식’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과 짝을 이루어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2절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도 하늘에서 비둘기 같이 그에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셨고(눅 4:1),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성령 충만하여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또한“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하시면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는 말씀을 하셨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120명의 성도들이 기도에 힘을 쓰니, 오순절에 그들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했습니다(행 2:4).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을 받으라”(엡 5:18)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럴 때 성도들 간의 진정한 교제가 있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릴 수 있고 때문입니다. 서로 섬기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위로부터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힘입어 한 해를 잘 마무리 짓고 새해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메시아의 통치(3-5절) 


이스라엘과 유다의 지도자들은 불의와 거짓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장차 오실 메시아는 세상의 지도자들과 달리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총명을 통하여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배려하며 정확하고도 현명한 판결을 내립니다. 2절이 메시아에게 강림하실 성령님의 여러 가지 특징을 서술했다면, 3-5절은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메시아가 통치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첫째,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분의 완전하심 앞에서 거룩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음에 감격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기쁘고, 예배드리는 것이 기쁘고, 기도할 수 있음에 기뻐합니다. ‘즐거움을 삼는다’를 직역하면 ‘흠향하게 한다’입니다. 여호와 경외함이라는 제물의 향기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통치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대리자로서 겸손한 자세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이상적인 왕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예수님도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지만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순종하신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둘째,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보고 듣는 것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그릇된 판단을 자주 내립니다. 하지만 메시아는 중심을 보고 판단하기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가 실현될 것입니다.  


 


셋째, 공의로 가난한 자를, 정직으로 겸손한 자를 판단합니다. 이사야 당대의 불의한 통치자와 재판관들은 억압 받는 자들과 가련한 자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불공평한 재판을 일삼았다. 그들과 달리 메시아는 연약한 자들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공의롭고 정직하게 재판함으로써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들을 보호하실 것입니다. 넷째,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입니다. ‘입의 막대기’와 ‘입술의 기운’은 말씀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분의 말씀은 권위가 있어서 한마디로 세상을 치실 수 있고, 말씀만으로도 악한 것을 멸하실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말씀으로 악을 멸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는 온 세상을 주관하는 권위가 있습니다. 다섯째, 공의와 성실로 허리띠를 삼습니다. ‘공의’는 ‘공평함’을, ‘성실’은 ‘진실함’을 의미합니다. ‘허리띠’는 겉옷을 매는 것, ‘몸의 띠’는 속옷을 매는 것을 가리킵니다. ‘허리띠’와 ‘몸의 띠’는 사람의 중심에 위치한 것으로서, 메시아의 본질이 공의와 성실이라는 것입니다. 약한 자가 위로받고 강한 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것은 주님이 심판자요 통치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통치의 성격은 동일한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이 유지해야 할 자세입니다. 연약한 자들을 대할 때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대해야 하며, 자신의 유익을 위해 판단을 굽히는 불의를 행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의 양심에 근거해서 정당하게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언급한 통치의 특징 또한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섬기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삼으셨습니다(마 6:24).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요 7:24)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고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5:8).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으며(눅 4:18), 소외받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마 11:19). 또한 그분은 능력 있는 말씀으로 가르치셨으며(마 5-7장), 악한 귀신을 쫓아내셨고(막 9:25),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셨습니다(마 24장).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시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롬 10:4). 그래서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선물인 영생이 주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세상(6-9절) 


- 샬롬의 나라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국지전이든, 전면전이든 전쟁이 없었던 때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평화를 갈구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평화를 위해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렇게 얻어진 평화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힘으로 억압한 상태일 뿐입니다. 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는 강력한 로마 군대가 주변 국가들을 정복해 얻어졌습니다. 로마의 입장에서는 전쟁이 그친 평화로 보았지만 정복당한 나라의 입장에서는 압제로 인한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시아께서 다스리시는 날에는 세상이 여호와의 평화로 충만할 것입니다. ‘샬롬’이라는 히브리 단어는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참된 평화와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날 때 그들만 하나님의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그래서 바울은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롬 8:21)고 했습니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자연도 인간과 함께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오심으로 하나님과 인간관계만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파괴한 생태계까지도 회복됩니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가 통치할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예언합니다. 그때에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거하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습니다. “살며”새로운 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우며”경계심을 내려놓고 평안하게 쉬는 것을 가리킵니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습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 이전 에덴동산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이 서로 싸우거나 먹고 먹히는 일이 없는 완벽한 조화와 평화를 유지합니다. 메시아가 오시기 이전의 세상은 죄로 말미암아 서로 적대하고 미워하는 혼돈의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시고 나서 통치하시는 세상은 갈등과 싸움과 미움이 완전히 제거된, 평화와 조화와 사랑의 세상이 됩니다. 


 


6-7절에 ‘함께’라는 단어가 5번이나 반복이 됩니다. 신앙생활은 나만 혼자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생활이 아니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고 함께 기도하며 서로의 기쁨과 아픔과 고통을 나누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시고 그들의 아픔에 불쌍함을 느끼시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기를 믿고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하며 천사들이 찬송하였습니다.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선을 베풀고 병 고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예수를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것이 또한 교회의 사명입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한 새 하늘과 새 땅이(계 21:4)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우리는 조금씩 맛보며 살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이러한 온전한 모습을 기대하기를 어렵다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이루어질 완벽한 변화를 기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충만


 “여호와를 아는 지식”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얻게 되는 체험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산, 곧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메시아가 온 세상을 다스린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이상적인 왕의 통치 아래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져 더 이상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받는 일도 없는 안전이 보장될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으로서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왕이십니다. 만민의 기치로 선 메시아에게 열방이 돌아올 것입니다. 그 결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온 세상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은 자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고 고백합니다. 그분을 믿을 때 영생이 주어집니다(요 3:16). 왜냐하면 그분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요 14:6). 새싹과 같이 미약하게 보였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이 온 세상을 뒤덮고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널리 퍼지게 됩니다. 실제로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이후에도 솔로몬이 지은 것 같은 성전이 세워진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이제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세상 모든 족속이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된 성도들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온 유대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온 땅에 전파될 때 그제야 끝이 옵니다. 


 


나가면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이상을 이루는 새 왕을 세우시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 뿐 아니라 열방을 회복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사야가 언급한 이상적인 메시아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하게 성취되었습니다. 말세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해진다고 하였습니다. 각자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활발한 영적인 교제를 갖고 있습니까?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요 14:21)라 하셨는데 얼마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대로 살고 있습니까? 받은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예수님의 재림 때 이루어 질 일이지만 성도들과 교제 속에서 기쁨을 얻고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눌 때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때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역시 이사야 때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낙심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분을 알고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문제로 생각되는 것들을 하나님께 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사야가 바라본 메시야가 통치하시는 아름다운 미래를 소망 중에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에게 충만해집니다. 


 


주님이 처음 이 땅에 오시는 것을 기념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 중에 기다리는 귀한 성탄의 계절에 우리 모두 회복시키고 화목하게 하는 사명이 주어진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번 성탄절은 COVID-19으로 인해 어느 때보다 힘든 상황에서 맞이하지만 주님의 위로의 때는 반드시 옵니다. 그 날을 기다리며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에 견고히 서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 이 세상을 평화의 나라로 만들어 가실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고 교제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하면서 어느 때보다 풍성한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을 풍성하게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