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참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Author
Myung Myung
Date
2020-11-29 14:05
Views
527

오늘부터 크리스마스까지 4번의 주일이 포함된 기간을 교회력으로 대림절(대강절, 강림절)이라 부릅니다. 대림절은 영어로 ‘Advent'인데 문자적으로는‘arrival’즉 도착이라는 뜻이며 의미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흑암의 땅은 생명력이 넘치는 희망의 땅이 되었습니다.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신음하던 자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슬픔과 고통이 그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의인들의 수고와 애씀이 감추어지고 악인들이 영광을 받는 억울한 상황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더구나 금년에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하여 많은 활동이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 3월 이후로 온 교우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며 교제를 나누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신 보급이 보편화되고 확진의 위협이 누그러지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크리스마스는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했던 우리들에게 대림절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는 귀한 절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처음 오신 것을 기념하고 다시 오실 것을 간절히 바라는 이 귀한 계절에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며 관련 성경 구절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이사야가 선포한 메시아 예언의 한 부분으로, 메시아를 통한 구원계획,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밝히고 있습니다. 금년이 다가기 전에 무엇인가 기다리거나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위로와 회복을 주시는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할 뿐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마음의 소원이 주님의 뜻 가운데 아름답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흑암에 비추는 빛(1-2절)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바벨론에게 망했고, 바벨론은 페르시아에게 망했고, 페르시아는 그리스에 망했고, 그리스는 로마에 망했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역사를 하나님은 예언하시고 때가 되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십니다. 역사는 방향 없이 표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적 목적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징계로 고통 받는 스불론과 납달리 땅이 후에는 영화롭게 되리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장차 영원한 구원을 가져올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합니다.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본문의 1절은‘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며 소망을 제시합니다. “흑암이 없으리로다”라는 선언은 적극적인 의미에서 ‘빛이 있을 것이다’라는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배반으로 인해 낯을 가리셨으나, 고통과 멸시로 인해 모든 소망이 끊어진 흑암 같은 나날을 보내던 백성에게 큰 빛이 비춥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호수와 요단 강을 중심으로 북서편에 위치하는 산지에 해당합니다. 해변길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북쪽에서 남쪽을 따라 내려옵니다. 요단 저편은 갈릴리 호수 동북쪽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사야가 언급하는 지역은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 전부를 가리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를 포함한 해안 변경의 갈릴리 지방은 그 지정학적 여건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서 이방 세력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고 아람이나 앗수르와 같은 외세의 침입과 압제에도 많이 시달렸습니다. 남쪽에 사는 유대인은 갈릴리를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갈릴리가 이방 나라와 근접하여 있고 또 그곳에 많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버려진 땅, 어둡고 소외된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들에게 하나님이 구원의 빛을 비추십니다. ‘비치도다’가 완료형으로 되었습니다. 비록 비추는 것은 미래에 일어날 것이지만, 이사야는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마태는 이 구절을 인용하여 “스불론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 4:15-16)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인하여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예수님은 종교 및 정치 권력자들이 살던 예루살렘이 아니라 스불론, 납달리, 잇사갈을 포함하는 갈릴리 지역에서 주로 구원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외세의 공격으로 고통당하던 땅에 소망의 빛이 비치듯, 죄와 사망의 권세에 의해 흑암 가운데 거하던 인간들에게도 예수님은 소망의 빛을 비추십니다. 빛 가운데 가장 귀한 빛이 예수님의 생명의 빛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이 생명의 빛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한 자에게만 비춥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8-9) 따라서 전에는 어둠에 속한 자녀였으나 이제는 하나님께 속한 빛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선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는 빛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회복된 즐거움(3-5절)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 속에서 이미 완성된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도래할 그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즐거움을 더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창성하다’란 말은 ‘수적으로 늘어나다’라는 뜻입니다. 갈릴리 같이 이방인 지역으로 배척받던 곳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서 빛이 비췸으로 창성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즐거움’은‘빙빙 돌다, 춤추다’는 뜻을 가집니다. 즐거움을 주체할 수 없어 몸으로 표현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사야는 빛을 만났을 때의 기쁨을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첫 번째 은유는 ‘수확의 기쁨’입니다. 수확의 날은 그동안의 모든 인내와 수고가 위로받고 풍성한 수확물을 거두어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쁜 날입니다. 두 번 째 은유는 ‘전리품을 나누는 기쁨’입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승리한 전쟁에서 전리품을 취하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빛으로 임하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최고의 기쁨을 맛보게 하실 것입니다. 본문에 언급된 두 즐거움은 약속의 땅에서 누리는 대표적인 복으로서 하나님과 회복된 언약 관계에서 백성이 누리는 즐거움입니다. 그들이 비록 죄로 인해 징계를 받았지만, 긍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적당한 때에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개역 성경에는 접속사가 별도로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4절은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멍에는 백성이 자유를 잃고 노예로 살아가게 되는 속박을 상징합니다. 또 채찍과 막대기는 멍에 아래 놓인 가축을 조종하는 수단으로서 압제자의 탄압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압제자의 속박과 탄압을 이스라엘에게서 다 제거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회복하실 날은 ‘미디안의 날’과 같습니다(삿 7장). 도무지 벗어날 수 없어 보이던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3백명이 미디안의 군대 135,000명을 물리쳤습니다. 하나님이 회복하실 그날은 구원의 날이요, 승리의 날이 될 것입니다. 5절 역시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없어지는 것은 전쟁이 그치고 평화로운 상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군화와 군복이 대표하는 온갖 전쟁 도구들을 불태우심으로써, 이스라엘을 강대국의 침략과 압제로부터 해방시키실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히스기야나 요시야 때 일부 이루어졌지만, 진정한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뤄졌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두시고 심지어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십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오늘도 자신에게로 부르십니다.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안식과 평안을 주십니다. 장차 영생 추수의 즐거움과 의의 면류관을 얻는 즐거움을 나누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한 아들(6-7절)


하나님의 백성이 기뻐할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6절에 언급됩니다. 지금까지 이사야에 의해 선포된 놀라운 빛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한 아기가 태어날 것입니다. ‘한 아기’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룰 이상적인 통치자, 곧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의미상으로 볼 때 ‘메시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지는데,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로 번역됩니다. 왕권의 존속은 땅의 질서와 평화를 보장하는 전제 조건입니다. 이런 면에서 계승권자의 출생은 복된 소식이 됩니다. 압제자의 멍에가 꺾이고 그 대신 아들의 어깨에는 ‘정사’, 곧 통치권이 주어집니다. 이 아기는 육신을 입고 태어나지만 신적 권능을 받은 존재입니다.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하면서 기존의 왕들과 구별되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그 이름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 담겨져 있습니다.  


 


‘기묘’란 단어는 메시아 자신과 그의 하시는 일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경이, 오묘 그 자체임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서기관들이 말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권세 있는 가르침에 완전히 압도되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께서 직접 말씀을 전하시니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전하시는 지혜의 말씀이 잠자는 영혼을 깨웠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성령과 지혜로 충만하셨기에 그저 ‘놀랍다’라는 말밖에 할 수 없습니다. ‘모사’는 세상의 어떤 이보다 탁월한 지혜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 모사에 해당되는 말이 보혜사입니다. 보혜사는 ‘곁에서 돕도록 부름 받은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시고 위로하시고 격려하신 훌륭한 카운슬러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변호하시고 대언하시며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십니다. 기묘자와 모사는 하나의 이름 곧 ‘기묘한 모사’(Wonderful Counselor)로 볼 수 있으며, 이는 메시아의 신적 지혜를 강조합니다.


 


두 번째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메시아의 신적 권능을 강조합니다. 그는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그 신비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7). 세 번째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영존하시는’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왕권의 언약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삼하 7:16). 메시아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백성을 돌보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계속하여 사랑하고 아껴 주듯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능력과 사랑과 권위로 당신의 백성을 영원히 보존하십니다. 네 번째 이름은 ‘평강의 왕’입니다. 메시아를‘평강의 왕’으로 부르는 것은 그가 이 땅에 평화를 주기 위해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적 지혜와 권능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평화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왕‘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방백’또는 ‘왕자’라는 의미를 가진 ‘사르’가 사용됩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도 ‘평화의 방백(Prince of Peace)'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의 진정한 왕이시기 때문에 메시아도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방백이어야 마땅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세우실 미래의 이상적 통치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왕권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평강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아의 통치가 네 가지로 표현됩니다. 그의 정사와 평강은 온 우주에 무궁할 것입니다. 그는 다윗의 보좌에 앉아 다윗의 나라를 굳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공평과 정의로 나라를 다스려 그로 말미암아 나라는 더욱 강력해질 것입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보좌에 앉아 영원히 평화롭게 통치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열심’은 원어 상 질투를 뜻합니다. 백성이 성별된 삶을 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질투입니다. 성경은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만이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되십니다. 하나님만이 사랑의 대상이며 경외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고, 곧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열심에 기초를 두기에 그 나라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위로하시는 예수님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기는 앗수르와 애굽, 그리고 바벨론 등의 강대국이 약소국들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무력으로 정복하던 암흑의 때였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당했는데, 남 왕국 유다마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했습니다. 이사야는 이처럼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남은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았고, 더 나아가 다윗 가문에서 새로운 통치자가 일어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평화를 이룩할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그 새로운 통치자가 바로 메시아입니다. 본문의 중점은 하나님의 위로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 백성에 대한 위로를 메시아의 탄생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죄로 인한 멍에와 악한 세력의 압제는 모든 사람의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이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사망의 형벌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복을 누리며 기뻐하고 있습니까? 죄의 정죄로부터 자유롭습니까? 성령을 받아 하나님 자녀의 특권을 누리며 확신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고 응답받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주님만이 주시는 위로를 받으며 주 안에서 승리와 평강과 기쁨과 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우리의 자세


고통과 멸시를 당하던 백성에게 큰 빛이 비치면 구원의 즐거움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 즐거움을 지속적으로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예수님과 동행합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이 땅에서의 메시아의 사역이 ‘내어줌’의 사역이 될 것임을 예고해 줍니다. 주님께서는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셨으며, 최종적으로는 자기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셨습니다. 주님을 본받아 내어주려면 우리가 먼저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주한 사역 속에서도 새벽 미명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히 채움을 받았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전혀 기도에 힘씀으로 성령으로 충만하여 기쁨으로 섬겼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해질 때 기쁨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빛 되신 예수님을 교제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 중에 바라보며 날마다 즐거워해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세상에서 살 수 없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지혜, 능력, 안정, 평강의 선물을 때를 따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Lord)는 왕 또는 주관자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뿐 아니라 그분을 우리의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 날마다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서 하나님 우선순위로 살아야 합니다.


 


- 예수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죄악의 사슬에 얽매이고, 사망의 그늘에 압도되며, 수치를 당하고 멸시받던 자들이 바로 구원받기 전의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죄의 권세에서 압제받던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성도는 이 기쁨을 맛보아야 하고, 그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흑암의 땅은 땅 끝 선교지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미쳐야 할 곳이 많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는 예수님의 빛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가족과 이웃들 가운데도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럴 때 소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되어 그들도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메시아로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은 고통스러운 세상 짐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참된 구원과 평화와 안식을 주려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귀한 성탄을 맞는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참된 구원과 평화의 소식을 전하는 성탄의 전령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지금부터 2700년 전에 한 아기에 대하여 예언했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에게 빛을 주시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멍에와 압제에 있던 자들에게 소망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거창하게만 역사 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늘도 연약한 내게도 찾아와 주셔서 나의 마음을 touch 하시고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자들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 주안에서 참된 자유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그분에게 맡길 때 그분은 우리를 주관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이 개입하시는 것마다 풍성해지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견고히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또한 그 열매들이 지속됩니다.   


 


믿는 자들에게도 고통과 어둠이 있습니다. 연약한 믿음으로 인해 넘어지는 고통도 있고, 믿음 때문에 자원해 당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어떠하든지 우리의 어둠은 빛 되신 주님을 만날 때 순식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하여 힘든 때를 보내고 있지만 주님만이 주시는 참된 위로를 받으시고 그 위로를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빛 되신 주님을 기다리는 거룩한 계절, 고통당하고 멸시받는 우리의 어둠을 빛으로 이기실 주님을 기다렸다가 만나는 성탄절을 맞이해야 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느니라”(사 60:1). 팔로마 한인교회 성도들이여 이제 일어나서 빛을 발하십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모든 삶의 현장에서 새벽을 깨우는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참 빛 되신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시고 그 빛을 세상에 비춤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빛 되신 주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삶을 살며 만군의 하나님의 열심으로 헌신하다가 주님 오실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다 칭찬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