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2-14 15:23
Views
504

성경 스토리 중에는 주일 학교 교재나 설교와 성경 공부에서 많이 다루어 익숙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의외로 제대로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고난 주간 즈음에 자주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기 전에 닭이 몇 번 울었습니까? 그러면 많은 분들이 금방 세 번이라 대답합니다. 맞습니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막 14:72)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직분이 무엇입니까? ‘집사’라고 대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그때 함께 뽑힌 사람들을 그저 ‘일곱’이라 부릅니다. 교회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직분이 없을 때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대충 알고 있으면 어떻게 요약할 수 있습니까? ‘네 명의 친구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고침 받게 했다.’잘 요약한 것입니까?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면서 분주하게 사역하셨습니다. 많은 표적이 나타나니 예수님의 이름이 온 갈릴리에 퍼졌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점점 올라감에 따라 예수님을 향한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와 반목은 더욱 심해집니다. 그동안 자기들이 누려오던 기득권이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2:1에서 3:6은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이 벌이는 5개의 논쟁을 모아 놓았습니다. 사죄권 논쟁, 식탁 교제 논쟁, 금식 논쟁, 안식일 논쟁 등등. 나오는 일화마다 중요한 신학적 쟁점을 놓고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이 첨예하게 부딪힙니다. 그들은 마침내 예수님을 죽이자는 결론을 내립니다.  


 


본문을 보니 예수님은 가르치시는 권세, 병 고치는 권세, 귀신 쫓는 권세 외에 또 다른 권세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고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섬기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귀한 열매를 풍성히 거두시기 바랍니다.


 


가버나움에 다시 오신 예수님(1-2절)


예수님이 수일 후에 다시 가버나움에 오신 것은 나병환자를 치유해 준 일 때문에 드러내 놓고 그곳에 들어갈 수 없어 한적한 곳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분이 계신 집은 모여든 사람들로 꽉 찼습니다. 심지어는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집이 누구의 집인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집일 수도 있고, 시몬의 집일 수도 있습니다. ‘모여서’라는 동사는‘함께’라는 단어와 ‘데려가다, 모여들다’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분명한 목적을 함께 공유하고 그 목적을 향해 관심을 가지고 모여드는 것을 묘사합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이끌어 함께 모여드는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와 탁월함이 강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본연에 충실하신 분입니다. “도를 말씀하시더니”라는 문장에 사용된 동사는 미완료형태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선포사역이 지속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도’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로고스’, 즉 말씀입니다. 몰려든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하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되기를 촉구하십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3-4절)


중풍병자와 함께 온 사람이 몇 명입니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중풍병자를 데려오는 일에 관계된 사람들이 적어도 네 명 이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풍병은 온몸이 마비되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병입니다. 중풍으로 고생하는 친구를 보면서도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던 그들은 모든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큰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친구의 중풍을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이 그들에게 생겼습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몰려든 많은 사람 때문에 도저히 예수님이 계신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 사이에 많은 이야기가 오갔을 것입니다. ‘오늘은 안 되겠네. 그냥 돌아가자. 아니야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예수님을 꼭 만나야 해. 그러면 어떻게 할까? 문 쪽에는 사람이 많으니 들어갈 수 없고.’그러면서 문득 지붕을 보았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집들은 대부분 지붕이 평평했고, 그 지붕 위로 올라가는 계단도 집 옆에 있었습니다. 지붕이 평평하다보니 거기서 작업을 하거나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또 객실을 만들어 자기 집을 찾은 손님을 묵게 했습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사는 수넴 여인에게 이런 대접을 받았습니다. 지붕은 흙과 짚, 나무 등을 다져서 만들었기 때문에 뜯어내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달아 내리자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반대 의견도 있었을 것입니다. 남의 집 지붕을 허가도 받지 않고 뜯으면 어떻게 하지? 예수님이 지금 말씀을 가르치고 계신데 방해한다고 꾸중이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지?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보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붕이야 나중에 문제가 되면 사과하고 고쳐주면 될 것이고, 예수님께서 혹 노하시더라도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이해하실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그들은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들고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한창 가르치시는데 갑자기 지붕에서 무슨 소리가 납니다. 천장 한쪽이 벗겨지고 훤해지더니 중풍병자가 누운 상이 줄에 매여 내려옵니다.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에 집중했을 것입니다.  


  


죄 사함을 선포하시는 예수님(5-10절)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셨다고 합니다. ‘그들’이 누구를 뜻하는 것인지 그 자체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고, 중풍병자까지도 포함한 모두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믿음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은 아닙니다. 이 믿음에 대해서는 나중에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친구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잘 몰랐을 것입니다. 그 믿음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입니다. 집안에 있던 사람들은 뜻밖에 일어난 일을 인하여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실지 주목하였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예수님은 애정을 담아 그 중풍병자를 ‘작은 자’라고 부르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현재 시제로 되어 있으니 예수님이 자신의 권세로 지금 죄를 용서하고 계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뜻밖의 말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 자신은 물론이고 누구든지 중풍병자에게 지금 제일 필요한 것은 병을 고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죄 사함 받고 육신의 병 고침을 받음으로 나타납니다. 죄 사함이 우선입니다.   


 


보통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 후에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런데 중풍병자의 경우에는 회개했다는 표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이 ‘선 회개 후 죄 사함’의 공식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예수님 앞에 나오는 일련의 과정을 ‘회개’로 볼 수 있습니다. ‘회개’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주님만이 아십니다.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은 예수님 앞에 바로 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도 예수님이 그들의 중심을 아셨기에 죄 사함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친구들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근본 문제인 죄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시비를 걸 것을 찾아 슬그머니 무리 사이에 끼어들었던 어떤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라고 생각합니다. 마가복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서기관’은 율법을 해석하고 보존하는 일은 맡은 사람들입니다. 마가는 ‘마음에 생각하다’라는 표현을 3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당혹감과 영적 무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죄 사함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출 34:7)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시 103:3).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연결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저 인간 예수로 알았기에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결론을 내리며 비난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마음으로 하는 생각을 곧 중심에 아셨다고 합니다. 직역하면 ‘그분의 영으로’알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과 하나 된 분이기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간파할 수 있고, 또 자신에게서 치유의 능력이 나간 것도 아실 수 있었습니다. 또‘곧’이라는 언급은 예수님의 속마음을 읽는 능력이 뛰어남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품은 생각을 아시고 책망하십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서기관들은 자기들의 마음의 생각을 들킨 것 같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이 질문을 상식적인 차원에서 대답한다면,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라고 말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이 이루어지는지 아닌지를 즉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말은 그 효력을 눈으로 즉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죄 사함을 선언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 선언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유대인이라면 죄 사함의 발언이 얼마나 위험하고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는 서기관들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 대응입니다. ‘인자’는 다니엘 7장을 배경으로 한 종말론적이고 초월적이며 신적인 존재입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단 7:13). 마가복음에서 ‘인자’는 고난과 영광의 길을 가는 예수님의 사역을 드러내는 칭호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8:31)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13:26) ‘죄 사함’은 메시아 시대의 약속입니다(겔 36:25-27).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11-12)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걸어가라’는 현재 명령형으로 ‘계속해서 걸어가라’는 뜻이며 이것은 완전한 치유를 의미합니다.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즉시 일어나 자기 병상을 들고 걸어 나갑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다 놀랍니다. 지금까지 ‘놀라다’는 단어가 세 번 나왔는데(1:22, 27; 2:12) 마가는 각기 다른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여기서 ‘놀랐다’는 것은 의식을 잃을 정도로 크게 놀란 것을 뜻합니다. 놀람의 강도가 점점 강해집니다. 마가는 이 중풍병자 치유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의 한 부분인 죄 사함이 예수님을 통해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무리의 반응은 예수님의 치유와 사죄 선언의 사역 안에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신성모독적인 말을 한다고 비난한 서기관들과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의 정체성


- 죄를 사하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이 중풍병자의 상태를 안타까워했습니다. 그 절박함이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는,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절박한 육체적 필요의 현장에서 ‘네가 고침 받았다’먼저 말씀하지 않으시고 ‘죄 사함 받았다’고 선포하셨습니다. 특정한 병이 언제나 본인이나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생겼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병이라는 현상 자체가 죽음의 신호이며, 사망은 죄로 인해 들어온 것입니다. 신체적 치유 이전에 죄 사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돌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죄 사함’이라는 영적 구원이 빠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고 육신을 입으시고 내려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하여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용서받아야 할 죄들을 주님 앞에 낱낱이 고하며 씻음 받아야 합니다.


 


- 치유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영으로 모든 것을 깊이 헤아려 아시고 분명하게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의 속마음을 읽으실 수 있다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분임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의 깊은 곳까지 아십니다. 예수의 치유 사역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을 용서해 주신다는 구원의 복음을 강조하는 하나의 은혜로운 수단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고민이나 아픔도 다 주님 앞에 내어 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의 필요를 인하여 항상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행동해도 때로는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장애물에 부딪칠 때가 있지만 믿음으로 나아가면 결국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죄 사함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매여 있는 우리를 풍성한 은혜와 능력으로 회복하시고 자유하게 하십니다. 


 


* 우리의 자세


- 자신의 영적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들었는데 그들 중에 누가 고침을 받았습니까? 사람들에 의해 들 것에 실려 나왔던 중풍병자입니다. ‘중풍병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중풍병자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신적인 중풍은 무서워하면서 영적으로 마비된 중풍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주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시간과 물질과 달란트를 주셨지만 이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은 죄로 인해 서서히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일한 방법은 삶의 소망이 되시는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부족함과 한계와 죄악됨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믿어 죄 사함을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났기에 언제나 찬양과 영광을 주님께 올려 드리며 기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 장애를 극복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 주변에 있었기에 예수님이 계신 집 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친구를 고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기에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믿음’으로 간주했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경우로 주어진 말씀을 수용하여 지적인 동의를 보이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전 15:2). 다음으로 충성, 신실 등으로 번역되는바 일관성이 있어 신뢰할 만한 특성을 뜻합니다.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롬 1:5). 그런가 하면 기적과 능력을 일으키는 강한 확신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특히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을 경험하는 데 필요한 마음의 자세로서 자주 언급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바울은 믿음을 그리스도인의 삶과 연결시켜 사용합니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고후 8:7) 믿음은 자라고 발전되어 열매를 맺는 쪽으로 진행하는 역동적인 삶의 현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언급된 ‘그들의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것은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웃을 돕고자 하는 간절한 열정이었습니다. 난관에 부딪혔을 때 포기하지 않고 그 방법을 찾아내는 기발한 지혜와 끈질김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이’시라는 정체성은 아마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했습니다. 이런 그들의 마음의 상태를 가리켜 예수님은 ‘믿음’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인간적 한계와 장애를 넘어서거나 사회적 경계를 초월하는 행위를 동반하는 예수님에 대한 신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있습니까?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습니까? 적극적인 믿음을 보인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에게 병 고침과 죄 사함을 주셨듯이 주님은 오늘도 적극적으로 찾고 구하는 자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십니다. 


 


- 믿음 생활에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 힘들다는 것보다 자기의 친구인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보여드려 그를 낫게 해주겠다는 사랑이 더 컸기에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어떻게든지 친구의 문제를 해결책을 찾아보려는 끈질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을 함께 궁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생각해낸 것이 지붕을 뜯어내고 그 틈으로 중풍병자를 달아 내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갈 때는 그의 영혼의 구원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친구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낫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병도 나았을 뿐 아니라 그의 죄까지도 용서받았습니다. 그들은 문둥병자가 나은 것을 보고 아마 서로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의 흘렸을 것입니다. 성경에 그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의 행동과 친구를 향한 사랑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시고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 그리고 이웃에 무관심하거나 인색하지는 않습니까? 이웃의 육신의 문제와 영혼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과 같은 믿음과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특히 영적 중풍병자들을 섬기며 주님께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나가면서 


자기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연약한 존재였던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기 힘으로 들것을 들고 걸어 나왔습니다. 육신의 병을 치료 받았을 뿐 아니라 영혼의 병인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본문의 핵심은 예수님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치유는 죄 사함의 증거로 행해집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백성에게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면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를 경험하는 수단으로써 믿음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지붕이라도 뜯어서 섬기려는 친구들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참된 신앙이란 종교적 지식이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신뢰와 사랑을 신앙생활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위로를 주고받으며 힘을 얻는 곳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감격 속에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함,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