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사명에 충실하신 예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5-30 14:31
Views
368

금의환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주 출세하여 고향에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을 인하여 예수님의 소문이 갈릴리 전 지역에 퍼졌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광풍을 잔잔케 하시고, 군대 귀신을 쫓아내시고, 12년을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치시고 심지어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이렇게 신적인 능력을 행하신 예수님이 오랜 만에 고향에 돌아오셨는데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상하게 여기실 정도로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살다 보면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나를 잘 알고 잘 이해해줄 것 같은 사람들이 의외로 차갑게 대하거나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섭섭한 마음이 들고 심지어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신앙생활의 모델은 항상 예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잃으신 적이 없습니다. 본문을 통해 여전히 사명에 충실하신 예수님을 살펴보고 본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명자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고향 사람들의 반응(1-3절)


예수님이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이 따라갑니다. ‘따르다’는 제자훈련 용어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사렛에 왔다는 것은 이번 여정이 단지 예수님의 개인적인 고향 방문이 아니라 제자 훈련 과정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그분의 삶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언제나 순탄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환영을 받으면 제자들도 환영을 받지만 예수님이 배척을 당하면 제자들도 배척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아무리 능력이 있고 기사와 이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때로는 부정적인 반응도 있음을 제자들이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습니다. 무슨 말씀을 가르치셨는지 마가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막 1장에 보면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그 말씀을 듣는 무리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을 가르쳤던 서기관들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능력 있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회당에서 말씀을 듣는 고향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는 놀라운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것은 그들도 인정합니다. 그들은 아마 예수님이 가버나움이나 다른 지역에서 많은 능력을 행하셨다는 소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알던 예수에게서는 자기들이 지금 듣고 있는 것과 같은 말이 도저히 나올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다섯 개의 질문을 연이어 던집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어디서’라는 질문을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회의를 드러냅니다. ‘이 사람’하는 단어를 3번씩이나 사용합니다. ‘이 사람’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는 경멸하는 어투입니다. 앞서 서기관들도 예수님께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2:7)라고 말했는데, 그때도 ‘후토스’가 사용됐습니다. “이 사람이 받은 지혜”라는 말은 고향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스스로 지혜를 가지신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손으로 이루어진 권능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것을 가리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당시 관례에서 벗어납니다. 아마 요셉의 죽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과부의 아들로 천시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직업을 ‘목수’로 언급한 곳은 이곳이 유일하며, 당시 목수는 로마나 헬라 사회와 달리 유대인들 사이에서 경멸받는 직업은 아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의 가정은 아버지에 의해 성경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일찍 죽었다면 예수님이 성경을 제대로 배울 수 없었을 텐데 지금 그가 가진 성경지식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냐는 것입니다.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의 남자 형제의 이름은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하면서 정확하게 열거하면서, 누이들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며, 예수님의 자매들은 아무도 알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예수님의 형제와 자매가 자신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는 수사의문문입니다. 그런 형제들과 자매들을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게서 지혜와 권능이 나오다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배척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걸리게 하다, 넘어지게 하다’는 동사의 미완료 수동태입니다. 단어의 의미를 살려 직역하면 ‘그들은 그로 인해 지속적으로 넘어짐을 당했다’가 됩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지 못하고 도리어 의심을 하며 예수님을 계속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같은 단어가 씨 뿌리는 자 비유에서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환난이나 박해에 ‘넘어졌다’고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4:17). 즉 고향 사람들이 처음엔 예수님의 가르침과 권능에 놀라지만 결국 예수님을 배척하는 상황이 돌밭에 뿌려진 씨앗의 경우에 해당됩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자라온 배경, 집안 사정, 성격, 그에게 일어났던 일 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담겨진 지혜나 예수님에게 나타난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자기들이 전에 알던 예수로 자꾸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반응(4-6절)  


마가복음을 예수님의 정체성 관점에서 나눈다면 1:1~4:34는 선생님으로서의 예수님을 강조하고, 4:35~6:30은 선지자로서의 예수님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는 말씀은 일종의 속담인데 그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선지자로 여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왔던 선지자들이 고향에서 제대로 존경을 받지 못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자신의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실 것을 암시합니다. 특히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이라는 말이 아브라함의 소명을 연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창 12:1) 예수님께서는 결국 고향을 떠나는 나그네가 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고향 아나돗에서 환영받지 못한 예레미야 선지자처럼(렘 11:21) 믿음 없는 고향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은 발걸음을 다른 마을로 돌리십니다. 이후로 예수님께서 고향인 나사렛을 방문하셨다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행하실 수 없어”미완료시제로 고향에서는 내내 권능을 행하지 못하셨음을 말합니다. 전능하신 예수님이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그의 사역의 본질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을 향한 고향 사람들의 자세는 불신앙입니다. 이는 불신앙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능력을 잃어버린다는 말이 아니라 불신앙이 있는 곳에서 그 능력을 행하기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에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소수의 병자에게는 예수님이 손을 얹어서 고쳐 주셨습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알았어야 하고 인정했어야 할 사람들이 예수님 자신과 그의 사역에 대하여 믿지 않는 것을 인하여 예수님은 이상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소경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고향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근본적으로 불신의 소치였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움에는 개인적인 아픔과 그들을 향한 불쌍히 여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없음은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배척일 뿐 아니라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한 거부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더 이상 그들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거나 사역을 할 수 없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의 거부 반응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파하시려는 예수님의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습니다. 도리어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의 거부 후에 사역의 지경을 넓히셨습니다.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이것은 모두 예수님의 활동 반경을 확대하십니다. ‘촌’은 상대적으로 작은 시골 마을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작은 시골 마을까지 찾아가셨습니다.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인 구원 사역을 위하여 여러 지역을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기 원하십니다. 


 


열두 제자의 파송(7절)


예수님은 제자들과 더불어 본격적인 전도 사역을 시작합니다. 열두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부른다’는 단어가 마가복음에 9번 나오는데, 그중 8번이 예수님을 주어로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3:13 6:7; 8:1) 혹은 어떤 중요한 교훈을 주기 위해 사람들이나 제자들을 불러 모으실 때 사용됩니다. 여기에서 ‘열둘’이라는 숫자가 부각되는데,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신할 새로운 언약 공동체가 열두 제자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암시합니다. 막 3:14-15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목적은 첫째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함이요, 둘째는 그들을 보내기 위함입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을 듣고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사역을 해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때가 되니 그들을 파송하십니다. 제자들의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의 연장입니다. 제자들의 파송은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중대한 사역입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전에 해보지 않은 새 일을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막 1:39). 이미 예수께서 행하신 사역을 제자들에게 따라 하게 하십니다.  


- 두 사람씩 보내십니다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하면 증인은 적어도 두 사람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신 19:15). 여기서 ‘사람’은 물론 남자입니다.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신 이유는 공동체 의식을 갖고 복음을 전하면서 위험을 만나면 서로 힘이 되어 주고, 나아가 증인의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셔서 보내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동행하지 않는 대신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압하는 권세를 주십니다. ‘주시고’는 미완료시제로 지속적으로 주고 계심을 나타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영적 권위와 능력으로 사탄의 권세를 제압하며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구체적인 전도 지침(8-11절)  


- 여분의 준비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을 위한 지침을 주십니다. 제자들에게 두 가지는 가지고 가라고 하십니다. 첫째로 지팡이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지팡이는 길을 가는데 필요한 보조 도구요 나쁜 짐승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 됩니다. 둘째로 신을 신으라는 것입니다. 신은 발을 보호하고 길을 안전하게 합니다. 반면에 가지고 가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양식, 주머니, 전대의 돈, 그리고 두 벌 옷입니다. 여분의 것을 갖고 가지 말라는 이유는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어디서 자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삶의 스타일을 가짐으로써 전도 사역에 집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전도자는 배부름, 안일함, 풍요함과 같이 눈에 보이는 육신적인 만족을 채우는데 신경을 쓰기보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전도를 통한 영혼 구원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도우심은 사람들과 주변 환경으로부터 주어집니다. 따라서 전도자들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미루어볼 때 이것은 단기 여행에 대한 지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의도하는 것은 전도자가 단기 전도여행에서조차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어떤 결과가 있었습니까? 돈이 없어 힘들고 배고팠다고 했습니까? 눅 22:35에 보면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 한 집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숙박 문화가 발달되지 않았던 초대교회 시대에 전도자들이 성도들의 환대를 기대하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 문화권에서는 생면부지의 손님도 잘 대접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동네를 가든지 처음 받아들이는 집에서 떠날 때까지 머물라고 권고합니다. 한곳을 전도의 전초기지로 삼으라는 전략적인 권고입니다. 전도하러 왔다면서 더 나은 대접하는 곳을 찾아다니거나 불편하다고 옮기는 것이 결코 덕스럽지 못하고 도리어 복음의 진보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전도자들이 영접 받지 못할 때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을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반면에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거나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이 있으면, 그곳을 떠날 때 발아래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말합니다. ‘떨어버려라’는 과거명령형입니다. 당장 떨어내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배척당했을 때 마음에 상처를 입기 쉬운데, 그 감정을 빨리 떨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에 있다가 돌아올 때는 발에 먼지를 떠는 습관이 있습니다. ‘먼지’는 흙이나 다양한 이물질을 뜻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증거를 삼기’위해서입니다. 제자들로서는 주어진 임무를 다했다는 증거이고, 그들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에게는 마지막 때에 심판이 임하리라는 증거입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곳에 구원의 메시지나 치유의 기회를 더 이상 제공되지 않습니다.  


 


파송 받은 제자들(12-13절) 


파송 받은 제자들의 첫 번째 활동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이미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메신저로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면서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이켜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활동은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영적 싸움에서 이겨 마귀의 세력을 몰아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군대귀신 들린 청년을 온전케 하셨습니다. 아무리 귀신이 많고 그 세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권세를 받은 자들은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능력을 주신 결과 제자들은 귀신을 많이 쫓아냈습니다. 세 번째 활동은 치유사역입니다. 제자들은 수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서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기름 자체에 치유의 효과가 있다기보다 하나님께서 치유하신다는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제자들의 보고(30절) 


30절에는 열둘을 ‘제자’라 부르지 않고 ‘사도’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7절의 ‘파송하다’라는 단어와의 연관성 때문입니다. 그들을 사도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이 그들을 보냈다는 의미요, 그들의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의 연장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사역은 예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을 보여줍니다. 전도 나갔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한 것과 가르친 것을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즉 회개를 전파하고 병든 자를 고칠 뿐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고 천국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 우리의 자세


우리는 은혜 가운데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살아야 함을 배웁니까?


-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 오히려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를 더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3장에 보면 예수님의 육신의 가족들이 예수님이  미쳤다고 하며 그를 붙들어 집으로 데려가려 하였습니다.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의 권세 있는 가르침과 예수님의 능력으로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도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의 출처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마 나사렛 출신이 아니었다면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존경하고 그를 따르거나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가족들에 대해 갖고 있었던 선입견이 예수님을 거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고향 사람들의 태도를‘자신을 존경하지 않는 태도’‘불신앙’으로 규정하십니다. 경험, 선입견, 편견, 세상의 유혹들이 영적인 시야를 가리고 신앙생활 하는데 방해가 됩니다.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적인 눈과 귀를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를 보시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믿음 없음을 이상히 여기지 않으시겠습니까? 인간적인 생각이나 선입견에서 벗어나 우리의 영의 눈이 떠져 주님의 역사를 보고, 우리의 귀가 열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의 마음이 열려 주님의 사랑을 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자기들이 알던 예수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기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은 혈루증 걸린 여인과 야이로의 사건에 나타난 믿음과 대조가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으로 사탄을 능히 압도하고 그의 밑에서 신음하고 고통을 받던 자들을 자유케 하고 회복시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병 치료나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믿지 않거나 배척하는 것은 그런 구원이 필요하지 않다고 거부하는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더 이상 일하실 수 없습니다.  


- 끝까지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의 거부에도 좌절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파송하셨습니다. 반대가 있고 비난이 있을지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일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문제가 생기고 제동이 걸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을 좋아하는 존재는 마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오늘도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끝까지 충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모습입니다.  


 


나가면서


제자들은 부름을 받았고 보냄을 받았고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전부 수동태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입니다. 주님이 initiative를 가지고 이끌어 나가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맡기신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도 없으나 능력 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전도현장에 처음 나갔을 때 그 느낌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귀신들렸거나 병든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의지해서 사역을 감당했을 때 귀한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믿음이 아니라 변하는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믿음으로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그분이 베푸시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전도자들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이 귀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거둔 열매를 가지고 제자들처럼 담대하게 주님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을 받으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복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