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열둘을 세우신 예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3-07 14:24
Views
372

소그룹 책에서 많이 인용되는 예화가 있습니다. 지금은 죽었지만, 쿠바의 카스트로가 80명의 동지들과 함께 쿠바 혁명에 성공하였습니다. 서방기자가 그에게 성공의 비결을 물었을 때 내가 다시 혁명을 할 수 있다면 혁명의식에 아주 투철하고 헌신된 열두 명으로 해보겠다고 하였답니다. 내용과 질적인 면에서 차원이 틀리지만 예수님께서는 세상적으로 볼 때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열두 사람으로 이루어진 소그룹을 통하여 인류 역사를 변화시켰습니다. 뽑은 열두 사람 중에는 성격이 급한 사람, 이념이 다른 사람,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고 심지어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들과 더불어 삶을 나누시면서 그들을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에서 헌신된 제자들로 만드셨습니다. 오순절 이후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성도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뒤를 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주시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보며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로마 제국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헌신적으로 전개하였습니다. 


 


산업화 시대에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데 사람들은 함께 마음을 나누고 싶은 공동체를 갈구합니다. 공동체가 영어로 community인데 ‘com’과 ‘unity’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com은‘같이, 더불어’, unity는 ‘하나됨’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개인들이 모여 하나가 되는 과정을 통하여 공동체가 이루어집니다. 공동체의 기본 단위가 소그룹입니다. 소그룹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신앙을 고백하고, 서로 용서하고, 섬기고, 삶을 나누며, 성숙한 성도들로 변화됩니다. 우리 교회 같으면 목장이 대표적인 소그룹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이상적인 소그룹의 모델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문은 1:16~3:6의 갈릴리 전기 사역과 3:20~6:6의 갈릴리 후기 사역을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행해진 예수님의 전기 사역은 상당히 성공적이었고 팔레스타인 전 지역에서 폭넓은 대중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사역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우시고 파송하시며, 천국 복음을 전하십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세우신 열둘을 중심으로 한 소그룹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보여줍니다. 제자들을 어떻게 부르시는지, 왜 부르시는지, 어떤 사람들을 부르시는지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 모두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가 되어 열정적으로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갈릴리 전반기 사역 요약(7-12절)


예수님이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 하시면서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마 3:23).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고,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부족한 지라 예수님의 사역을 오히려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고소와 위협을 피해 바다로 물러가셨습니다. 그 모습은 불신과 적의를 피하여 하나님의 뜻과 쉼을 찾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마치고 기도하러 한적한 곳을 찾으신 것처럼(1:35), 이번에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로 물러가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도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서 기도하거나 제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무리는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왔으나, 대다수가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보도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은 유대교에서 전통적으로 소중히 여기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입니다. 그러다 보니 유대와 예루살렘은 갈릴리 주변의 지역들 중의 하나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지명을 요단강을 중심으로 보면 서쪽으로 갈릴리, 남쪽으로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 동쪽으로 요단강 건너편, 북쪽의 두로와 시돈까지입니다. 이 지명들이 기록된 것은 마가복음의 전개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이두매를 제외하고 이 지역들을 방문하시며 전도하신 것을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친히 그분의 사역에 응답한 지역을 차례로 돌아보심으로써 후에 제자들과 초대교회 선교 사역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갈릴리에서 온 무리에겐 제자로서의 따름을 의미하는 ‘따르다’동사를 사용합니다. 반면에 다른 지역에서 많은 무리는 예수님이 ‘하신 큰일’을 듣고 ‘나아온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시다’는 ‘만들다, 행하다’라는 뜻의 동사의 미완료 시제입니다. 무리가 관심을 가진 것은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이 줄곧 행하신 이적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 나아온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정체성이나 사역의 의미를 깨달았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탁월한 능력으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기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오다 보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작은 배를 준비시킵니다. 예수님은 찾아온 무리의 기대를 무조건 충족시켜 주기보다는 그들로 하여금 말씀 듣는 일에 집중하도록 유도하십니다.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영혼의 질병인 죄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받는 것이 더 시급하고 우선적이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귀신들은 어느 때든지 예수님을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귀신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도 있었고 그 앞에 엎드리는 행동도 있었지만, 정작 믿음은 없었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을 그저 만능 해결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구원자요 주인으로 마음과 삶의 중심에 모셔 들여 온전히 믿고 따르길 바라십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귀신들을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소위 ‘메시아의 비밀’로 불리는 마가의 이 독특한 언급은 예수님의 사역이 대중의 불필요한 관심을 받을까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이 당신의 정체를 바로 알고 있다고 해도 귀신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귀신들 때문에 자신의 권위와 사역이 방해받지 않기 원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아직까지 사람들에게서 나오지는 않고 귀신들의 입을 통해서만 나옵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정확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제자들을 세우신 목적(13-15절)


제자도는 예수님의 ‘부르심’과 제자들의 ‘따름’으로 이루어집니다. 원하시고, 부르시고, 세우시고, 함께 있게 하시고, 권능도 가지게 하시는 등 모든 동사의 주어는 예수님입니다. 제자도의 중심이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주권적 선택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뜻대로 혹은 기분 내키는 대로 열둘을 뽑은 것이 아니라 산에 올라가셔서 밤새도록 기도하시면서(눅 6:12)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뜻대로 뽑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사도 바울이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고전 9:16) 하였습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도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기에 복음 전하는 것을 자랑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부르시니 열둘이 나아옵니다. ‘부르시니’는 ‘~을 향해 부르다, ~을 위해 부르다’라는 뜻으로, 좀 더 특별한 의미의 부름입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향해 그분 앞으로 부름 받는 열두 제자의 모습을 그립니다. 이는 열두 제자와 예수님 사이의 친밀함을 보여 줍니다. 또한 예수님이 맡기신 일을‘위해’열두 제자를 부르셨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전도하고 귀신 쫓는 일을 하도록 자신 앞으로 불러내십니다. 열둘이 나아 왔다는 것은 제자들의 결단보다는 부르심에 대한 순종에 초점을 둡니다. “나아오다”라는 원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떠나오다’가 됩니다. 자기들이 전에 살던 삶을 청산하고 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의 삶과 결별하여 새로운 환경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전에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며 자기의 유익에만 관심이 있었으나 이제는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으로(마 6:33)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제 시작될 갈릴리 후기 사역을 위해서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열둘을 세우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언급된 내용은 제자들을 새삼스럽게 선발하시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이미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제자들 중에서 사도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사도의 뜻이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마 10:2에서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이러하니”로 나옵니다. ‘열둘을 세우셨으니’에서 ‘세우셨다’는 ‘만들다’라는 뜻의 동사인데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인 칠십인역에서 창 1:1에 나오는 ‘창조하다’에 이 단어가 쓰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에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실 메시아입니다. ‘열둘’은 구속사적으로 하나님 백성의 종말론적 회복이며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 건설의 상징입니다. 


  


영혼 구원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제자들을 부르시고 세우신 목적이 있습니다. 


1) 예수님과 함께 있기 위함입니다(to be with Jesus)


제자들은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면서 그분의 삶을 배우고 그분의 사역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자고 그가 하시는 사역을 보고 들으면서 배워야 합니다. 가장 훌륭한 mentor가 되시는 예수님을 따르기만 하면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셨던 사역만 할 뿐 아니라 그분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2) 제자들을 보내기 위함입니다(to send them) 


제자들은 천국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보냄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를 ‘보냄을 받은 자들’이란 의미에서 ‘서도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전에 해보지 못한 새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막 1:39). 이미 예수께서 하신 사역을 제자들이 감당해야 합니다. 개역성경에는 ‘전도하다’로 번역되었지만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선포하다’입니다. 예수님의 사자가 되어 왕의 소식을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공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열둘은 예수님의 메신저로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외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셔서 이 땅에서 사탄의 권세를 멸해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키고자 하십니다. 복음 선포와 축귀를 함께 묶는 이유는 축귀 현상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실현되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열두 제자의 명단(16-19절) 


열두 제자의 이름이 신약에 네 번 나옵니다. 막 3:16-19; 마 10:2-4; 눅 6:14-16; 행 1:13. 예수님이 12제자를 선택하신 것은 구약 이스라엘의 12지파를 계승하는 영적인 12지파를 선택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육적 이스라엘은 혈통으로 이루어지지만 영적 새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들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열두 제자를 세우신 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시작됨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의 명단에는 베드로의 이름이 언제나 제일 먼저 등장합니다. 시몬에게는 ‘반석’이라는 의미의 베드로란 이름이 더해집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약속이나 특별한 사명을 부여하는 경우입니다. 그는 갈릴리 어부 출신으로 결혼하여 장모와 함께 살았습니다. 형제인 안드레의 권유를 받고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는 그리시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마 16:16) 하는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급한 성격과 경솔한 행동을 인하여 실수한 적도 많았으나 순수하게 주님을 사랑하며 따르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실수를 저질렀으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기회를 주셨을 때 성령 충만함 받고 초대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 ‘우레의 아들들’이라는 뜻을 가진 보아너게라는 이름이 더해집니다. 그들이 질투심과 명예욕이 강하고 다혈질인 성격인 것을 알고 예수님께서 붙여 주신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의 한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니까 야고보와 요한이 흥분하여 “주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눅 9:54) 제안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야고보는 제자들 중에 제일 먼저 순교하였고 요한은 제자들 중에 가장 오래 살면서 갖은 박해와 수난을 다 받았습니다.  


 


나머지 제자들 가운데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로서 갈릴리 벳새다 출신의 어부입니다. 원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빌립은 요한복음에 의하면 최초로 부름을 받은 제자요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려 하실 때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나이다.”믿음보다 자기의 경험을 앞세우는 계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바돌로매는 갈릴리 가나 사람으로 빌립의 전도를 받은 나다나엘로 알려져 있으며 예수님이 그를 보셨을 때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하시면서 그의 신실하심을 칭찬하셨습니다. 마태는 세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도마를 디두모 즉 쌍둥이로 소개합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던 자로 알려져 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성경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세배대의 아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라 불립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멀리서 바라보던 자로 작은 야고보라 불리기도 합니다(15:40). 다대오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인데, 그가 어떤 사역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대오가 주의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가나나인 시몬’에서 ‘가나나인’이란 단어는 지역 이름이 아니라 ‘셀롯’(눅 6:15)에 해당하는 아람어입니다. 즉, 열심당원 시몬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로마로부터 독립을 꾀하는 일부 혁명가들을 ‘열심당’이라 불렀습니다. 마지막으로 유다가 언급되는데, 그에게 ‘가룟’이란 명칭이 첨가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남쪽 유대의 지역인 ‘케리옷’이라든지, 칼을 뜻하는 ‘시카리우스’에서 왔다는지 하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아넘긴 자라는 것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이 ‘찬양’인데 그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탐욕의 노예가 되어 예수를 배반하고 자살로 생을 마치는 하나님 앞에 구겨진 삶을 살며 “예수를 판 자”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 우리의 자세 


- 부르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복음서는 제자들이 어떤 인물들인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들이 어떻게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가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제자들의 배경이나 출신을 살펴보면 세상적으로 볼 때 평범하고 보잘것없고 때로 허물 많은 사람들입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제자들은 전부 갈릴리 촌사람들입니다. 그들 중에 어부들이 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세리도 있었습니다. 넉넉한 자도 있었고 가난한 자도 있었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강한 의지의 소유자도 있었습니다. 로마를 위하여 일하면서 민족의 배반자라고 미움을 받던 사람도 있었고 로마의 압제에 무력으로 대항하려는 운동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의심한 자도 있었고, 다대오 같이 별로 언급이 되지 않는 희미한 사람도 제자들 중에 끼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주님께 나왔고 훈련을 받았고, 가룟 유다를 빼놓고는 주님의 사역을 이어받아 하나님 나라 확장에 쓰임 받는 헌신된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현재의 모습을 보고 택하신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가능성을 믿고 그들을 택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자격과 능력이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며 부족한 자를 불러 주셔서 복음의 일꾼으로 세워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우리의 상태가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주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부르심에 대한 순종입니다. 


-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열둘을 세우셨다는 것은 이제 그 열둘이 예수와 함께 있어 사역에 참여함으로 예수님과 일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인격과 삶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자신을 순종하며 희생하며 헌신하는 모습을 배웠습니다. 주님과의 지속적인 교제가 성도의 능력의 근원이 됩니다. 신앙생활은 마귀와의 지속적인 영적인 싸움을 동반합니다. 그 싸움에서 이기려면 우리의 대장되시는 주님의 뜻에 따라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강한 훈련을 받은 사람들만이 강한 군사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오합지졸밖에 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기도와 말씀으로 잘 양육 받으며 실전을 준비하는 강한 영적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음을 알리시는 사역의 일환으로 예수님은 열둘을 부르시고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베드로가 다대오보다 더 많은 일을 했고 더 존경받을 만하다 말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똑같이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각 지체가 맡겨진 일을 충실히 감당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이룹니다. 우리가 베드로나 요한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가 틀리고 사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편이나 처지에 있든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이다”(마 28:20)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의 삶과 사역에 동참할 때 주님은 언제나 함께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나가면서 


열두 사도와 그들의 뒤를 잇는 신실한 주의 제자들을 통하여 지난 2000년 동안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 왔습니다. 이제는 우리를 일꾼으로 제자로 부르십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이요, 특권인지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삶에만 매여 분주하게 뛰어 다니다가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그때는 너무 바빠서 다른 데 신경 쓸 시간이 없다고 핑계를 대시겠습니까? 아니면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주님을 섬길 마음을 주시고 부족하지만 주의 일에 참여하게 하여주시니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까?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하루는 24시간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날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졌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모세도 시 90편을 통하여,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우리의 남은 시간들이 좀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귀하게 쓰여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기쁨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다른 성도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주심은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시간과 재능과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주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삶의 열매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을 주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삶 속에서 보여줍시다. 가룟 유다에게는 ‘예수를 판 자’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귀한 사역에 동참한 성도들에게는 ‘영혼을 구원한 자’‘주님을 기쁘시게 한 자’등등의 아름다운 타이틀이 붙을 것입니다. 자기 이름 앞에 어떤 타이틀이 붙여지기 원하십니까? 주님을 위하여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열매에 따라 타이틀이 달라집니다.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는 능력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