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2-28 16:32
Views
391

두주 전에 텍사스 상원의원인 Ted Cruz가 한파로 인해 Texas주민들은 전기가 끊기고 추위에 고생할 때에 가족들과 함께 Mexico 휴양지인 Cancun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많은 질타를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수업이 없어서 아빠의 의무를 감당하느라 갔었다고 해명을 했지만 비난이 사그라지지 않자 Cruz 의원은 이틀 만에 급히 돌아왔습니다. 고급 호텔에 머물고, 24시간 제공되는 Buffet를 들고, 따뜻한 날씨에 수영을 즐길지라도 그 마음에 쉼이 있었겠습니까? Cancun에 간 것을 터뜨린 언론에 대한 분노도 있었겠고, 괜히 왔다는 후회도 있었겠고, 차가운 여론을 반전시킬 궁리로 분주했을 것입니다. 궁색한 변명 끝에 결국 자기가 Cancun에 간 것은 ‘mistake'이었다고 실토했습니다. 


 


안식(sabbath)의 사전적 의미는 휴식 또는 쉼입니다. 부연 설명하면 세상과 일에 지치고 피곤한 삶을 살다가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영혼의 안식과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적당히 휴식을 취하면 삶의 의욕도 높아지고 건강도 좋아지고 일의 능률도 오르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일주일에 하루를 쉬도록 율법으로 정하셨습니다(출 20:8-11). 그렇다고 안식일이 만사를 다 잊어버리고 그저 쉬는 날이 아닙니다. 밀린 일을 하거나 여가를 즐기도록 마련된 날이 아닙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이 안식일이 신약시대를 지나면서 주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로 바뀌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까? 주일이 기다려집니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을 머리로는 공감하지만 복잡한 산업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지는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직업상 주일에 문을 열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주중에는 일하느라 바빠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는데 주일 아침 일찍 예배를 드리고 나서 남은 시간에 오락이나 취미를 즐기는 것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지금 오신다면 주일을 대하는 자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정통 유대인들에게 있어 할례, 제사를 드리는 것과 더불어 타협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입니다. 안식일은 십계명 중에도 나와 있는 중요한 날이며 안식일을 거룩히 지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과 구별된 선민으로 자부하였습니다. 본문은 안식일에 일어난 두 사건을 다룹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들을 통해서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주십니다. 2:23-28은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며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계기로 일어난 논쟁을 다룹니다. 3:1-6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것 때문에 일어난 논쟁을 다룹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안식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주님의 뜻대로 살면서 주님만이 주시는 참된 안식을 누리시고 나누시기 바랍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날(2:23-28)


안식일에 예수님이 밀밭 사이를 지나 제자들이 따라갑니다. 아마 예수님과 제자들은 천국 복음을 전하러 다니던 중에 그곳을 지나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마 12:1에 의하면 제자들이 시장했다고 합니다.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에서 ‘자르니’는‘뜯다, 잡아당겨서 따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낸 것은 낫이나 칼로 벤 것이 아니라, 손으로 꺾은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기 시작했다는 표현은, 좀 더 많은 밀 이삭을 얻기 위해 밀밭 안으로 들어가 손으로 이삭을 꺾으면서 헤쳐 나갔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율법 시행규칙인 미쉬나에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 39가지를 규정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는 2000규빗 이상 갈 수 없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규정에 따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삭을 따먹은 것을 일한 것으로 보고 안식일을 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제자들이 규례를 어긴 경우 그들의 스승을 고소할 수 있었으므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제자들의 행위가 ‘합법적’인지를 따져 묻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이의 제기에 대해 예수님은 그들이 왕 중의 왕으로 여기는 다윗의 이야기를 “읽지 못하였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이는 강한 부정 의문문으로, 바리새인들이 다윗의 이야기를 분명히 알고 있다는 강한 긍정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성경 인용은 종교 지도자들보다 우월한 그분의 지식과 성경 해석의 권위를 보여 주며, 동시에 종교 지도자들의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삼상 21:1-6에 의하면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도망을 가다가 식량이 떨어지자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먹을 것을 좀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때 성전에 일반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떡은 없었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준비된 거룩한 떡만 있었습니다. 레 25:8에 “항상 매 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지니...이 떡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리고”라고 규정되었습니다. 제사장만 먹을 수 있도록 구별된 떡이었으나 대제사장은 그 떡을 배고픈 다윗에게 주었고 다윗은 자기와 함께한 무리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다윗이 거룩한 떡을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어 먹게 한 것은 율법 규정에 어긋난 것이었지만 정죄 받지 않았던 것을 인용하시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도 사랑의 법안에서 예외를 허용하는 전례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답변에는 다윗과 같은 이에게 그런 예외적인 일이 허락되었다면 다윗이 바라보았고 다윗보다 뛰어난 메시아이신 자신에게는 얼마나 더 가능하겠느냐는 논리가 담겨 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사랑을 베풀어 사람들의 삶이 보다 풍요로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인데 복잡한 안식일에 대한 규정으로 인해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안식일은 쉼을 얻는 복 된 날이 되기보다 도리어 바리새인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당하는 부담의 날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25-26절에서 다윗의 사례를 인용함으로써 제자들의 행동을 정당화하셨다면, 27절에서는 안식일의 근본 취지를 밝힘으로써 제자들의 행동을 정당화하십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이 말씀을 하신 목적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폐기하기 위함이 아니라 안식일을 새롭게 해석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맥락에서 안식일과 사람의 관계를 규정하십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노동으로부터의 쉼이라기보다 창조의 완료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3). ‘거룩하게 하다’는 히브리 동사 ‘카다쉬’는 본래 ‘구별하여 분리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일곱째 날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해 놓은 날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노동을 쉬고 휴식함으로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날에게 복되게 한다는 것은 그 날로 인해 혜택을 입는 인간에게 복을 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심으로써 훼손된 안식일의 본질적 의미를 회복시키십니다. 또한 안식일을 보편적인 인간의 차원으로 적용했다는 점에서, 안식일을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특권으로 생각한 유대교의 주장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안식일 법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사회적 약자를 포함해 모든 이웃을 사랑하라(출 20:8-11; 마 22:36-37)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근본 취지는 사라지고, 오직 법규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과 사람의 관계를 창조의 맥락에서 언급하신 것은 그분이 종말론적 새 질서를 가져오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28절은 23-27절 전체의 결론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안식일에도 주인이라고 선언하시면서 인자와 안식일과의 관계를 밝힙니다. 주인으로 번역된 kurios는 ‘주, 지배자, 왕’의 뜻을 가집니다. 다니엘 7장에서 ‘인자’는 종말에 드러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혹은 새롭게 창조되는 인류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선언은 안식일 제정의 근본 취지가 무엇인지를 밝혀줄 수 있는 권위가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의 정신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형식적 신앙, 문자적 신앙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정신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안식일은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날(3:1-6) 


3:1-6은 2:1부터 시작된 갈릴리 논쟁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다시 들어가셨습니다. 어디를 가나 바리새인들의 시선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주 임무는 회당에서 하나님을 예배드리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언행을 예의 주시하면서 무엇인가 꼬투리 잡을 것이 있나 찾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회당에는 손 마른 사람 하나가 있었습니다. 미쉬나에 의하면 사람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가 아니면 안식일에 사람을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담이 무너져 어떤 사람이 깔렸으면 그 사람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살았으면 깔린 데서 구조할 수 있었으나 부러지거나 다친 것을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깔린 사람이 죽었으면 다음날까지 시체를 치우지 않았습니다. 치우는 것을 일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자세는 융통성이 없이 아주 경직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손 마른 자에게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고 명령하고, 바래새인들에게 질문을 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고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자의 안타까운 상태를 회당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보이시면서 예수님을 통한 치유 사역을 그들에게 보여주기 원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바리새인들은 병든 사람의 치유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기는지에만 관심을 가지고 지켜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합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율법의 기준에 비추어 그것이 옳으냐를 묻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특징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이 죄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그들에게 이 예상치 않은 질문은 그들을 매우 당황스럽게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당연히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하면 자기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니 그들은 잠잠합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한 마음에 탄식하시고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셨습니다. 진정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사랑으로 돌아보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예수님께는 가증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완악한 마음이란 다른 사람의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뜻을 고집하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이 당할 어려움을 개의치 않는 마음이요, 남의 고통에 무뎌진 마음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아파하는 자와 전적으로 공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실 때도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적은 공감으로부터 나오는 능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손 마른 자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하십니다. ‘내밀라’‘뻗다’의 뜻을 가진 이 동사는 평소 뻗을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뛰어넘어 힘껏 뻗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네 손을 내밀라”하신 것은 시들어 가고 말라가던 영혼에게 회복하라는 생명의 명령이었습니다. 이에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 회당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예수님과 손 마른 사람에게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그 손이 회복됐습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자를 권능으로 치료하시고 그에게 안식을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지 못하게 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도, 백성을 섬기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손 마른 자의 마른 손보다 더 마르고 굳어진 그들의 심령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안식일에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목숨이 위태롭지 않더라도 고치는 것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며, 선을 행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1장에서 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한 것도 한시라도 그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게 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의 안식일 해석을 뛰어넘어 손 마른 자를 고치신 것도 옛 질서를 무너뜨리고 이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보여 줍니다. 


 


손 마른 사람이 회복된 것을 보면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분노에 차 회당을 뛰쳐나갑니다. 선한 일을 행한 예수님을 칭찬하거나 자신들의 외식된 행동을 회개하기보다 도리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밉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 선한 일이란 안식일에 관한 모든 규정을 철저히 지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등장한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여기다가 헤롯당이라는 또 다른 예수님의 적대자 그룹이 등장함으로써 예수님과 적대자들 간의 갈등이 더욱 심각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헤롯당은 헤롯 왕을 지지하는 정치적인 유대인 집단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평소에 원수로 여기던 헤롯당과 한통속이 되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데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정체성


바리새인들은 형식적 율법주의를 고집했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의 참된 정신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관한 율법 해석을 두고 대립했습니다. 두 번에 걸친 안식일 논쟁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율법의 권위를 넘어서는 예수님의 권위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밝혀 주시며 안식일을 정하신 하나님의 참 뜻을 회복하십니다. 더 나아가 안식일과 관련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참되고 온전한 안식이 있는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을 세우시는 왕이십니다. 안식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시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심으로 안식을 더 풍요롭게 하십니다. 참된 안식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행하신일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어떤 행위로도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모든 자들에게 충만한 안식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오늘도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 주일(안식일)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십계명의 제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키라’입니다. 쉼이 필요 없는 하나님이 연약한 인간들을 위해 친히 안식하심으로 그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허락하신 이유는 안식일에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그분이 주시는 힘을 공급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하는 손을 잠시 놓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도, 우리의 필요를 넉넉히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삶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은 이런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날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만이 주시는 안식을 통해 광야 같은 세상에서도 은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참된 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쉼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에게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 우리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네 손을 내밀라”고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어떤 문제나 짐을 가지고 이 시간 이 자리에 나왔을지라도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어 놓을 때 주님의 사랑의 손길, 자비의 손길이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료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주일에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며 영육 간에 치유를 경험해야 합니다. 치유 받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것은 감사와 찬양입니다. 주일은 주님을 인하여 함께 기뻐하는 잔치의 날입니다. 외양간에서 나온 망아지와 같이 주안에서 기뻐 뛰노는 날입니다.  


-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예수님의 주장에는 ‘바리새인들이여 복잡한 안식일의 규정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고 정죄하기 전에 가난한 이웃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주며 선을 베풀고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라’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단순히 주일에 일하지 않고 예배에 참석했다고 성도의 의무를 다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일 성수가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그와 더불어 궁핍하거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심으로 안식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날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면서도 정작 그것보다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저버린 사람들입니다(마 23:23). 우리 역시 매주 주일을 지킵니다.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고, 여러 모양으로 봉사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 속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빠져 있다면, 주일을 제대로 지킨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요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이중성을 강도 높게 비판하곤 합니다. 혹시 우리의 모습이 어느 새 바리새인과 같아진 것은 아닐까요? 무늬만 크리스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고 사랑을 베풀 줄 모르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심으로 인애와 자비를 실천하신 주님의 본을 따라 어려운 이웃과 지체를 돌보면서 안식일의 정신을 실천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은 참된 안식이 사라진 세상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선을 베풀고 생명을 살리는 것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인생이 무엇이 중요한 것을 알기에 다른 사람에게도 안식을 나누어 주게 됩니다.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날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의 기쁨을 이웃과 더불어 나누며 그들의 필요를 예수님께 받은 사랑으로 채우는 날입니다. 이 안식일의 정신을 회복하여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성도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릴 수 있는데, 이것은 성도가 누리게 되는 안식의 한 부분입니다. 주일은 안식을 맛보며 완전한 안식을 바라보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자신을 믿고 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주일에 돈을 쓰느냐 일을 하느냐를 따지기보다 주님 안에서 참된 쉼을 누리느냐, 그 쉼을 어떻게 나누냐가 더 중요합니다. “네 손을 내밀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모든 무거운 짐을 주님께 내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병든 손을 고쳐주시고 피곤한 손을 강건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깨달으며 주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어 드리면서 주 안에서 자유와 치유와 회복과 평강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