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고엘이 된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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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6-02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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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룻 4:1-12


우리의 인생 여정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학교를 선택하고, 배우자를 선택하고, 직장을 선택하고, 교회를 선택합니다. 비교적 쉬운 선택이 있는 반면에 정말로 고민되는 선택이 있습니다. 바른 선택을 한 결과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잘못된 선택을 한 결과 두고두고 후회하며 지금까지 쓴 열매를 따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선택을 하면서도 그 선택이 바른 선택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경험이나 상식에 비추어 나름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하는데, 그 선택으로 인생역전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그 선택으로 큰 낙심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 경험들을 목장에서 나눠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선택의 기로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어떤 선택이 후회 없는 선택이 될까요? 본문은 두 남자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기업 무를 책임을 포기한 아무개와 기업 무를 책임을 다한 보아스입니다. 두 사람은 3천여 년 후에도 자기들의 행적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두 사람 다 나름대로 지금의 선택이 자기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누가 바른 선택을 했습니까? 한 사람은 여전히 무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의 구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보아스와 같은 바른 선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룻기 3장은 나오미와 룻이 앞으로 보아스가 어떻게 일을 처리할 지 기다리는 것으로 마칩니다. 보아스는 자신이 한 약속을 이루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행동을 개시합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를 찾아 그에게 결정권을 먼저 주는 과정에서 독자들은 긴장감을 느끼게 됩니다. 보아스의 위치와 인품으로 볼 때, 그 ‘기업 무를 자’가 그리 하겠다고 한다면 양보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보아스가 이 일을 어떻게 지혜롭게 처리하며 룻과의 약속을 지키는지 보여 줍니다. 룻기의 주인공들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습니다. 오늘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도록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보아스의 두 제안(1~5절)
룻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현장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본문은 ‘기업을 무르는 자’, 즉 고엘 제도를 시행하는 절차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고 중요한 가치를 가집니다. 구약성경 다른 곳에서도 고엘에 대해 언급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그 시행 과정을 보여 주는 곳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업 무를 자’로 지명된 사람이 그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데, 그럴 경우 자기 신을 벗어서 이웃에게 주는 의식을 행하는 것도 보여 줍니다. 보아스가 성문 위에 올라가 앉습니다. 그가 올라간 성문은 성문 위에 지은 다락방 같은 곳입니다. 그날 거기에는 열 두 사람(보아스, 아무개, 열 명의 장로들)외에도 여러 명의 배석자(앉은 자들)이 그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으니(4,9절), 꽤나 넓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성문에서 이런 방식으로 법적 이슈들을 해결하곤 했습니다. 그렇다고 보아스가 앉은 자리가 아무에게나 허용된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이는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 유력한 사람이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성문에서 공개 법정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베들레헴의 거민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마침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갑니다. 2:4에서 룻이 이삭줍기를 할 때 마침 보아스가 나타났다고 하면서 같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여기서 ‘마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힌네’는 ‘보라’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를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보라’드디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그 ‘기업 무를 자’를 ‘아무개’로 부릅니다. 그가 기업 무를 책임에 있어서 자신보다 앞선 사람이니 보아스가 그 사람의 이름을 모를 리 없을 텐데, 룻기 저자가 의도적으로 ‘아무개’로 대치한 것 같습니다. 가능한 설명 중 하나는 그 사람의 후손들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일 그 ‘아무개’의 이름을 밝히면 그 집안은 자손 대대로 창피를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이 ‘기업 무를 자’로서 자신의 의무를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자가 일부러 그 사람의 이름을 쓰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보아스가 그 사람을 불러 자리에 앉으라고 하자 그는 아무런 이의 없이 자리에 앉습니다. 이어서 공적인 절차를 위해서 성읍 장로 10명을 청합니다. 보아스는 마치 재판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주도권을 쥐고 모임을 주도하지만 그를 원고라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그 ‘아무개’라고 하는 이도 피고라고 보아야 할 근거는 없습니다. 여기서 장로들의 역할은 재판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증인에 가깝습니다. 장로들이 자리에 앉은 후,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첫 번째 안건을 설명합니다. 안건의 요점은 엘리멜렉에게 속한 밭이 있는데, 그‘기업 무를 자’에게 엘리멜렉의 밭을 무를 기회를 먼저 준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그에게 속한 밭은 친척들이 우선적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척이라도 아무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촌수가 가까운 사람부터 기회가 주어집니다. 만일 그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 순위인 자기가 그를 대신해 무르겠다고 합니다. 아무개는 보아스의 말에 당장 자신이 그 기업을 부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보아스가 두 번째 안건을 다룹니다. 나오미에게서 밭을 넘겨받는 날 그는 룻과 결혼해서 고인의 이름을 이어 그의 유산을 차지할 사람을 낳아주어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아마도 그‘기업 무를 자’는 나오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고 나오미가 나이가 많아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그 밭은 자기의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룻까지 맡아야 한다고 말하니 셈이 복잡해졌습니다. 룻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엘리멜렉의 집안을 잇는 아들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산 땅은 자기의 것이 아닌 그 아들의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기업 무를 자’는 땅을 무르기 위해 투자한 돈을 잃게 됩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기업 무를 자’가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라고 답변합니다. ‘손해 보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망하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말은 과장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재력을 갖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룻에게 자신 있게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보아스가 이미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자기가 나오미 집안의 기업을 무를 의사가 있다고 밝혔기에 고엘 일 순위는 기업 무를 자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포기합니다.

보아스가 쓰고 있는 용어 가운데 ‘사다’라는 단어와 ‘무르다’라는 단어가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엘리멜렉의 밭을 ‘사라’고 하면서, 그 말을 반복해야 할 때는 ‘무르려면 무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고엘은 자기가 ‘무르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어서 보아스는 그 고엘에게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날에 룻도 ‘사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고엘은 자기는 ‘무르지’않겠다고 하며 보아스에게 룻을 ‘사라’고 합니다. 룻을 가운데 놓고 마치 물건 흥정하듯 두 남자가 ‘무르라’느니 ‘사라’느니 하니까 좀 이상하게 들립니다. 룻은 노예가 아닙니다. 보아스나 익명의 고엘이 룻을 맡는 것은, 룻이 남편을 잃은 친족의 아내이기 때문에 그 홀로 사는 아내가 비참하게 되는 일을 막고, 후손이 없이 죽은 그 친족의 이름과 재산을 잇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무르다’와 ‘사다’가 함께 쓰일 때의 뜻은 사실 우리말의 ‘무르다’나 ‘사다’의 의미가 아닙니다. ‘친족의 의무(혹은 권리)를 수행하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룻을 두고 보아스는 그 ‘기업 무를 자’와 누가 친족의 의무를 수행할지 공식적인 행정절차를 밟게 됩니다.

기업 무름 책임을 포기한 아무개(6~8절)
땅을 사거나 무를 때, 물건을 교환할 때 신을 벗어서 상대방에게 주었는데, 이러한 행위를 이스라엘에서 ‘확정하는 의식’이라고 합니다. ‘옛적’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통해 이 규례는 룻기가 기록될 때에는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관습이 언급된 것은 이곳뿐이지만, 신을 벗는 행위는 신명기 25장 5-10절에서 수혼법 혹은 계대 결혼을 다룰 때 등장합니다. 여러 형제가 함께 살다가 그 중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에, 죽은 자의 형제는 죽은 사람의 아내와 결혼하여 남편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이 죽은 형의 아들이 되어 가문을 이어 가고, 기업의 땅을 상속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생이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거부하면 아내는 성문으로 가서 장로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아내가 장로들이 보는 데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 같이 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안에서 그 형제의 가문은 ‘신 벗김을 받은 집안’이라 불리게 됩니다. 그렇게 신을 강제로 벗김을 당하거나 스스로 벗으면 친족 의무 수행의 기회가 박탈됩니다. 물론 룻기에 언급된 행위는 수혼법 제도와 다릅니다. 가까운 친족이 이 일을 거부한 것에 대해 비난이나 ‘침 뱉음’을 당하는 모습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가까운 친족은 전통에 따라 신을 벗어 보아스에게 줌으로 자신의 책임을 포기합니다.

기업 무를 책임을 다한 보아스(9~12절)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 즉 고엘의 권리를 합법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수속을 신속하게 진행합니다.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앞에서 두 가지 일에 증인이 되어 줄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는 엘리멜렉 가문의 유산인 밭을 산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인이 된 말론의 미망인인 룻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된 ‘기업 무를 자’와 달리 보아스는 자신이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취지의 말을 합니다. 그리고 룻이 말론의 아내였다고 말합니다. 자신과 룻을 통해 낳게 될 아이가 그 무른 기업의 상속자가 되고, 그로 하여금 말론의 기업을 잇게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합니다. 당시에는 한 가문의 대가 끊어지는 것을 그 가문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저주와 비극으로 여겼습니다. 보아스는 엘리멜렉 가문의 끊어진 이름을 이어 줌으로써 그러한 비극을 끊어 주려 했습니다. 보아스는 성읍 사람들이 모인 앞에서 룻을 굳이 ‘모압 여인’이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압 민족에 대해 좋지 않은 정서를 가지고 있음을 보아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룻이 이방 여인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키며 룻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합니다. 보아스와 룻의 결혼에 관해 혹시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의 입방아를 사전에 막기 위한 대처입니다. 보아스는 친족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정을 위해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감당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보아스는 그들에게 헤쎄드를 행한 것입니다.

보아스가 자신이 “고엘”이 되었다는 것을 모든 백성과 장로들에게 확인시키면서 ‘당신들이 이 일의 증인’이라는 확인을 두 차례나 하고, 그들 또한 자신들이 “이 일의 증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줍니다. 여기서 ‘모든 백성’은 베들레헴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라기보다 증인이 되기 위해 나온 무리를 일컫습니다. 저자가 ‘모든 백성’을 ‘장로들’보다 먼저 언급한 이유는 보아스와 이방 여인 룻의 결혼이 베들레헴 신앙 공동체에 큰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방 여인 룻을 정식으로 이스라엘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증인들이 복을 빌어준 대상은 룻과 보아스와 그들 사이에 태어날 아기입니다. 그들의 인생에 여호와께서 주인 되심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들 각자의 상황과 입장에 따라 여호와의 복이 적절하게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그 축복은 보아스를 향한 것이지만, 나오미와 룻을 향한 회복의 선언이자 축복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밑바닥에 있던 나오미와 룻에게 온 백성의 입을 통해 회복과 복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먼저 룻에게 복을 기원합니다.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은 ‘아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룻을 이스라엘 공동체의 합법적인 구성원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녀가 라헬과 레아의 역할을 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레아가 언니인데 동생인 라헬을 앞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35:16-19를 보면, 라헬이 베냐민을 낳고 죽어 묻힌 곳이 베들레헴 길입니다. 그래서 라헬은 베들레헴과 관련이 깊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 사람들은 라헬을 레아보다 더 높였을 것입니다. 두 여인은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두 여인의 몸에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여덟 아들이 출생했기 때문입니다. 두 여인은 야곱의 아들들을 낳음으로써 이스라엘의 탄생을 가능케 했습니다. 룻과 보아스 사이에 태어날 아이가 열두 족장의 역할에 버금가는 민족적 의미를 가질 것을 예견합니다. 두 번째 기원은 보아스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은 보아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되기를’원합니다. 사무엘상 17:12을 보면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사람의 아들이었는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가서 5:2을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브랏’은 ‘에브라다’와 같은 지명입니다. 에브랏과 베들레헴을 연계해 언급하는 것은 오직 다윗을 소개할 때에만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보아스에게 빌어준 복이 결과적으로 다윗의 출현을 예견하는 셈이 됩니다. 세 번째 기원은 여호와께서 룻을 통해 보아스에 상속자를 주셔서 그의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이 되라는 것입니다. 증인들은 특별히 보아스의 조상인 베레스를 언급합니다. 다말과 룻은 몇 가지 점에서 서로 닮았습니다. 둘 다 이방 여인입니다. 다말은 가나안 여인이고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 둘 다 자식 없이 일찍 과부가 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고인이 된 남편의 형제들 가운데서 새 남편을 찾는 수혼법 제도에 따라 재혼을 했어야만 했는데 그렇게 할 형제가 없어서 가까운 친족과 결혼을 합니다. 다말의 경우 시아버지와 관계하여 쌍둥이 아들을 낳고, 룻의 경우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습니다. 다말이 창녀로 분장하고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자식을 갖는 것이나, 룻이 밤중에 몰래 신부 복장을 하고 타작마당에 들어가 보아스 곁에 누워 결혼에까지 이르는 것도 비슷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베레스는 용사들의 집안으로 기억됩니다. 느헤미야서 11:6을 보면 “예루살렘에 거주한 베레스 자손은 모두 사백육십팔 명이니 다 용사였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용사’는 ‘용맹한 전사’라는 뜻입니다. 보아스와 룻이 이루게 될 가정을 향한 베들레헴 백성의 기도가 훗날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자세
중요한 시점에서 보아스와 같이 바른 선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믿음으로 비워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중에 ‘회개의 기도’순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을 먼저 비우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것으로 제대로 채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개’란 사람은 엘리멜렉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자기의 재산을 늘릴 목적으로 나오미가 내 놓은 밭을 무르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방 여인인 룻까지 책임져야한다고 하니, 기업 무를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그는 사람을 살리는 책임보다, 자신의 경제적 손해를 우려했기 때문에 비움을 거부했습니다.​ 반면에 보아스는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 비움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 룻과의 아름다운 사랑이 이뤄지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요?​ 아무개처럼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려고 하는데, 내 것으로 가득차서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사탄은 우리가 계속해서 계산하게 만들고, 원하는 것으로 많이 채우라고 유혹을 합니다. 비움보다 채움만을 위해서 움직이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부르시고, 기도의 자리로 부르시고, 섬김의 자리, 사랑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우리 믿음의 현 주소를 살펴보며 비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가지고 누리는 것을 비우기 싫어서, 욕심을 내려놓기 싫어서 주님의 초청을 거부한다면, 예비하신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제자도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비움은 절대로 손해가 아닙니다. 미련, 집착, 욕심 때문에 벗어버릴 것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신앙의 경주를 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달리자고 합니다. 보아스는 자신에게 이득이 될 것이 없는 결정인데도 흔쾌히 룻을 아내로 삼아 죽은 남편의 기업이 잘 계승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하였고 그대로 추진했습니다. 그러자 보아스는 자신의 포기한 것 이상의 복과 더 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보아스는 모든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초조해하거나 마음을 졸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를 것이라는 빈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생각을 이뤄 주신 것입니다.
- 믿음으로 헤쎄드를 행해야 합니다
룻과 보아스의 공통점은 둘 다 베푸는 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헤쎄드를 베풀었으며, 보아스는 과부가 된 룻과 나오미에게 헤쎄드를 베풀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헤쎄드를 베푸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남을 배려하고 자비 베풀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들에게 더 큰 자비를 베푸신 것입니다. 룻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는 공동체가 어떤 자세로 서로를 바라보며, 어떻게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룻과 같이 사랑하고, 보아스 같이 인애를 베풀어야 합니다. 보아스는 손해를 감수하고 엘리멜렉과 나오미 가정의 기업 무를 책임을 감당함으로써 그 가문을 세워 주었고, 나오미와 룻의 삶을 책임져 주었습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유익과 계산보다는 율법의 정신을 존중하는 자기희생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혜는 아무런 대가없이 거저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는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더 많이 베풀 때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나가면서
룻기는 모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사사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사사들의 등장과 같은 극적인 전개나 놀라운 능력을 가진 영웅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평범한 백성의 삶 가운데 한없는 자비와 긍휼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 사랑이 지금도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습니다. 사사 시대와 비슷한 환경에 살고 있는 우리도 헤쎄드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의 시선을 의식해야 합니다. 보아스는 얼마든지 ‘기업 무는 자’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고 회피한다 해도 비난이나 손가락질 당할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희생을 감수하며 기업 무를 책임을 감당했습니다. 룻에 대한 호의와 사랑, 그리고 나오미의 가정에 대한 자비와 긍휼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보아스는 일을 추진하면서 자기 원하는 대로 밀어붙이기보다 최선을 다하되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보아스를 통해 회복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펼쳐 가셨습니다. 우리도 보아스와 같이 믿음으로 비워야 합니다, 믿음으로 헤쎄드를 행해야 합니다. 보아스과 같이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역사에 크게 쓰임 받는 신실한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