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혜쎄드의 삼총사

Author
명
Date
2024-05-26 21:16
Views
63
성경구절 : 룻 3:1-18


룻기 3장은 3명의 주인공인 나오미, 룻, 보아스가 모두 등장하여 헤쎄드를 행합니다. ‘헤쎄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인간들 사이에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로서 구약에서 246번 등장합니다. 개역성경에 따르면 같은 단어를 룻기에서만도 선대(1:18), 은혜(2:20), 인애(3:10)로 각 문맥마다 해석을 달리할 만큼 의미의 폭이 다양합니다. 룻기에서 ‘헤쎄드’라는 단어는 자기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진심으로 베푸는 이타적인 행동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제 룻기는 클라이맥스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나오미는 룻을 위해 위험 부담이 따르는 적극적인 구애전략을 수립합니다. 나오미나 룻이 계획을 진행하면서 혹시 일이 꼬이면 어떻게 될까 하는 불안한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때가 그들의 일생에 가장 큰 결단의 순간이요 긴장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룻기에서 하나님은 직접 나타나시거나 계시하시지는 않지만 헤쎄드를 실천하려는 자들을 주목하시고 선하게 인도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믿음으로 헤쎄드를 행하는 자들의 삶에 개입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헤쎄드의 의미를 바로 알고 실천하며 하나님의 헤쎄드를 때마다 시마다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룻에게 헤쎄드를 베푸는 나오미(1-5절)
3:1과 2장 마지막 절 사이에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사이에 나오미의 심경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실 베들레헴에 돌아온 이후 나오미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집안이 몰락했기 때문입니다. 앞날을 생각하면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동안 룻은 밭에 나가 힘든 이삭줍기를 해서 시어머니를 정성스럽게 섬겼습니다. 이러한 룻의 마음과 행동이 시어머니를 감동시킨 것 같습니다. 꿈이 있으면 삶에 활기가 생깁니다. 골방늙은이로 신세타령만 하고 있기 않게 됩니다. 자기도 며느리를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이전에 룻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보아스가 룻에게 호감을 갖고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어느 날 룻에게 말했습니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안식할 곳’은 히브리어로 ‘마노아흐’인데 이 단어는 ‘노아’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쉼, 안식, 의지함’이란 뜻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여자들은 때가 되면 결혼해서 가정을 이뤄 남편과 한 집에서 함께 살아야 합니다. 이런 안정된 상태를 ‘마노아흐’라고 합니다. 그런데 룻이 남편을 잃고 고향을 떠나 이국땅에서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으니 지금은‘안식’을 잃은 상태입니다. 나오미가 자신과 룻이 함께 보다 나은 삶을 만들어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하여’가 아니라 ‘너를 위하여’입니다. 룻이 결혼하여 떠나면 자신의 장래가 불투명해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룻의 ‘선한 행동’에 대해 이제는 자신의 선한 행동으로 갚아 주어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나오미는 보아스가 자기들의 가까운 친족이란 사실을 환기시킵니다. ‘우리의 친족’이란 말은 나오미가 룻을 가족의 일원으로 여기는 애정이 담긴 표현입니다. 사실 ‘기업 무를 자’의 서열에 있어서 보아스는 두 번째입니다. 단순히 ‘기업 무를 자’를 찾아 끊어진 가문의 혈통을 이어가는 것이 문제였다면 고엘 일순위 되는 사람을 찾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보아스를 더 적임자라고 판단했습니다. 나오미가 보아스의 일정을 어떻게 파악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름대로 밖에 나가 열심히 정보를 수집했던 것 같습니다. 거두어들인 곡식을 타작하면 추수가 마무리됩니다. 거두어들인 곡식을 보아스와 그의 일군들이 함께 타작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바탕 흥겹게 식사를 하고 즐거운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보아스가 타작하는 날이 왔습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세 가지를 지시합니다. 첫째로 몸단장을 하라고 합니다.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으라.’여기에 사용된 단어들은 신부의 치장과 흡사합니다. 룻도 시어머니의 이런 지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을 것입니다. 둘째로, 타작마당으로 내려가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보아스라는 이름 대신에 ‘그 남자’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룻이 몸을 단장하고 보아스를 만나러 가는 일은 혼인관계를 염두에 둔 것임을 암시합니다. 이제 룻은 보아스가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타작마당 근처에 가 있어야 합니다. 식사 시간 내내 몸을 숨기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해가 지고 어두워진 다음 잠자리에 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보아스가 어디에서 잠을 자는지 기억을 하고 있다가 접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보아스의 잠자리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누울 때에’‘들어가서’‘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거기 누우라’이 표현들은 성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보아스가 가장 유혹을 받기 쉬운 밤 시간에 매혹적인 모습으로 잠자리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개역개정은 ‘발치 이불’로 번역했지만, 원어에는 ‘이불’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발치’는 ‘발’을 뜻하는 ‘레겔’이라는 말에서 왔고 ‘발’은 ‘생식기’를 완곡하게 표현하는 어법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삿 3:24). 그러니 발과 관련된 무엇인가를 벗겨 내라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성관계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룻기 저자는 나오미의 지시를 통해 남녀가 타작마당에서 밤에 남몰래 만남에 있어서 누구나 상상해 볼 수 있는 묘사들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확증을 줄 수 있는 단어는 피하고 있습니다. 스토리의 흥미를 더함과 동시에 이러한 애매모호함을 통해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의 실상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룻의 의도를 파악하고 일을 순리에 따라 수습할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보아스의 인품과 신앙을 고려할 때 그가 가볍게 행동할 사람이 아님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이 보아스와 결혼할 의사가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전달해야 했기에 한 밤중에 단장을 하고 잠자리에 들어가는 행동을 취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나오미의 지시에 대해 룻은 ‘그렇게 하겠다’라고 답변합니다. 룻도 시어머니의 의도를 정확하게 읽고 있었습니다. 보아스와 결혼을 시켜 나오미 집안의 유익을 챙기려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시어머니가 자기를 위해 마음을 써 주는 것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룻은 이스라엘의 ‘기업 무를 자’제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룻은 자신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엘리멜렉의 가문을 이어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사실 한밤중에 보아스가 눕는 곳에 들어가서 그의 곁에 누우라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만일 보아스가 룻의 접근을 불순한 것으로 여기고 불쾌한 반응을 보인다면 일은 완전히 그르치게 됩니다. 룻에 대해 가졌던 좋은 이미지에 먹칠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베들레헴에서의 룻의 삶은 훨씬 더 어려워질 것이 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이루어지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과정에 인간의 편에서 고민하고 번민하는 순간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보아스에게 헤쎄드를 요청하는 룻(6-9절)
룻은 나오미가 지시한 대로 모든 준비를 합니다. 보아스는 하루 일과를 마친 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합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는 최적의 분위기가 만들어집니다. ‘곡식 단 더미’는 타작마당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보아스가 그 곳을 잠자리로 정한 이면에 하나님의 섭리적 간섭이 엿보입니다. 타박마당 끝부분에 잠을 자면 룻의 입장에서는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룻은 보아스가 확실하게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가만히 그에게로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그곳에 눕습니다. 자정 무렵에 보아스가 잠에서 깨어납니다. 룻이 이불을 들추고 눕는 바람에 발이 밤공기에 드러나 냉기를 느껴 잠에서 깨었을 수 있습니다. 또한 발에 무엇인가 닿는 느낌이 계속 들었기에 잠에서 깨었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 발치 아래 한 여인이 누워 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보아스는 베들레헴에서 존경을 받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한 밤중에 외떨어진 장소에서 여인과 함께 있게 되니 보아스에게 매우 당혹스런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보아스가 “네가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한 밤중이라 바로 얼굴이 식별되지 않았거나, 룻이 그렇게 몸 단장한 모습을 본적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당신의 여종 룻’이라고 대답합니다. 룻이 이삭줍기하던 밭에서 보아스를 처음 만났을 때는 ‘당신의 하녀’(2:13)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때‘하녀’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쉬프하테카’입니다. 그런데 3:9에서 ‘여종’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마테카’입니다. ‘아마테카’가 신분상으로 더 높습니다. ‘유대인의 아내 혹은 첩이 될 수 있는 여인’을 의미합니다. 룻이 의도적으로 그 단어를 사용한 것은 자신이 이삭줍기 하는 여인과 밭주인의 관계로 보아스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룻은 보아스와 새로운 차원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즉 결혼 대상으로, 그리고 친족 관계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어서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라고 말합니다. ‘옷자락으로 덮으라’는 표현은 에스겔 16:7-8에서 여호와와 이스라엘을 신랑과 신부처럼 묘사하는 대목에서 쓰인 ‘결혼’의 요청으로 해석됩니다. 또한 이 표현은 2:12에서 보아스가 룻에게 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룻이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받기를 바랐던 보아스에게 이제 그 말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 다음 말이 원어로는 세 마디로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기업 무를 자이기 때문입니다. 고엘과 결혼이 연결되어 있는 것은 구약에서 이 본문이 처음입니다. 룻이 ‘고엘’이란 용어를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잠잠히 보아스의 발치에 들어가 누워 있다가 보아스가 지시하는 말을 들으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보아스의 말을 기다리기 전에 자기가 먼저 보아스에게 어떻게 할 것을 요구합니다. 룻이 보아스에게 자기와 결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는 것에만 초점을 두지 않고 나오미 집안의 자손을 이어주어야 한다는 의무에 초점을 둡니다. 룻은 보아스에게 두 가지를 부탁한 것입니다. 하나는 경제적인 회복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결혼입니다.

룻에게 헤쎄드를 약속하는 보아스(10~13절)
‘고엘’의 의무만을 원한다면 그것은 공적으로 우선순위에 정해진 순차에 따라 처리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룻이 원한 것은 그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보아스만이 할 수 있고 그가 헤쎄드를 베풀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4장에 잘 나타나는데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해 주는 자손에 대한 요청이었습니다. 그래서 룻은 결혼을 원했고, 기업을 물어줄 것을 원했습니다.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보아스는 자세를 흩트리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룻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룻의 태도를 칭찬합니다.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처음 인애’는 룻이 가족과 친척과 고향을 버리고 시어머니를 따라 나선 일을 말합니다. ‘나중 인애’는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한 것’과 자기와 같은 나이 든 고엘과 결혼하여 나오미 가족의 자손을 이어가려는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사랑과 재물도 아닌 가족을 구하려는 신실함을 인해 자기를 선택한 것이라는 사실에 감동을 받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룻이 앞일을 걱정하는 것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녀를 위로합니다. 그러면서 룻이 말한 대로 모두 다 행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다’행한다는 것은 룻의 간단한 말 속에 여러 가지 요청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룻의 요청은 ‘헤쎄드’를 가진 ‘고엘’의 자격이 있는 자만이 자원함으로 이루어 줄 수 있는 일인데, 보아스가 그 일에 동의한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현숙한 여인’인줄 성읍 백성이 다 안다고 말합니다. 비록 가문이 몰락했고, 먹을 것이 없어 이삭을 주워야 했지만, 룻은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헤쎄드’의 선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현숙한 여인’에 관한 언급은 잠언 31:10-31에 나옵니다. 룻이 이상적인 아내가 될 자질을 충분히 갖춘 사람으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 사용된 ‘현숙한’이란 단어는 2:1에서 보아스를 언급할 때 사용된 ‘유력한’이란 형용사와 같은 단어입니다. 보아스 역시 베들레헴에서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성읍 사람들이 룻을 현숙한 여자로 알고 있다는 말은 결국 룻이 보아스와 대등한 입장에 있음을 인정한 셈이 됩니다. 보아스와 룻이 맺어진다면 아주 이상적인 부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고엘이 있다는 사실이 룻을 매우 긴장하게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보아스의 성품이 드러납니다. 룻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기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결하겠다고 장담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율법이 정한 수순을 밟겠다는 의사를 밝힙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하는 모습입니다. 결과론적이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보아스가 룻과 결혼했기 때문에 법적인 하자가 전혀 없게 되고 주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지 않게 됩니다. 의도가 좋다고 모든 것이 용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일을 행하는 과정과 방식도 바르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보아스(14~18절)
룻이 보아스의 발치에 누워 있다가 일어납니다.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는 사람의 형체는 알아볼 수 있어도 누구인지는 정확히 볼 수 없는 때를 말합니다. 14절 후반부는 보아스가 혼자 생각한 내용입니다. ‘룻이 여기에 온 것을 사람들이 몰라야 하는데’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룻이 자신과 결혼할 의사를 밝혔고, 자신도 룻의 결혼의사를 받아들이기로 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행여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챌 새라 새벽에 일어나서 조심스레 움직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보아스는 룻에게 겉옷을 펴라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다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담고 그것을 잘 묶어 룻에게 지워 줍니다. 보아스가 굳이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그 곡식은 나오미를 위해 보내는 것입니다. 보아스도 나오미를 위해 움직이는 룻의 마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둘째, 룻이 새벽 미명에 밭에 나왔다고 돌아가는 구실을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설령 룻이 길에서 사람들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룻은 밭에 나온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어려운 형편이라 곡식을 더 모으려고 밭에 나온 것이라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룻과 결혼하기로 한 사실에 대한 확증으로 보낸 것입니다. 룻이 밭에 나와 이삭줍기를 할 때 관대함을 베풀었던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이삭줍기는 타작하기 전에 타인이 땅에 떨어진 것을 줍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미 타작이 끝난 보리는 주인의 몫입니다. 그 타작한 보리를 준다는 것은 보아스가 룻을 가족같이 생각한다는 징표가 됩니다. 보아스가 직접 그 보리 꾸러미를 룻에게 지워줍니다. 룻에 대한 대접이 전격적으로 달라진 것을 보여 줍니다.

나오미는 그 밤을 거의 뜬 눈으로 지새웠을 것입니다. 룻이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타작마당까지 잘 갔는지, 그곳에 가서 자기가 시킨 대로 했는지, 보아스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등등. 그러던 차에 룻이 보리를 지고 집으로 들어오자 나오미가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묻습니다. 그 말을 직역하면 ‘너는 누구냐 내 딸아’입니다. 지금 나오미에게는 룻이 지고 온 보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밤중에 깬 보아스가 놀라서 ‘누구냐’하고 룻에게 질문했던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보아스의 경우 자기 발치에 정체불명의 사람이 있어서 질문한 것이었지만, 나오미의 경우는 ‘내 딸아’로 부른 것으로 보아 룻인지 몰라서 한 질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룻은 보아스가 자기에게 행한 모든 것을 보고합니다. 룻도 나오미의 질문을 자신의 정체를 묻는 질문으로 듣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오미의 질문은 룻이 보아스를 만나고 난 다음에 룻의 신상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묻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네가 보아스의 부인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룻의 이야기를 들은 나오미는 룻에게 일이 어떻게 결말지어질지 알 수 있을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나오미는 보아스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여기서 ‘마치다’는 동사는 나오미와 룻의 고된 여정이 끝날 것이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의 고생과 수고의 마침은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아스의 치밀함과 성실함 그리고 지혜로움을 들어 쓰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제 룻과 나오미가 할 수 있는 일은 잠잠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 후에는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다려야 합니다. 성실히 일하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자들은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자세
- 헤쎄드의 삶을 통해 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룻기는 헤쎄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줌으로 사람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갈 때에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헤쎄드의 삶을 산다는 것이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헤쎄드는 서로에게 요구되는 책임의 한계를 넘어서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의 다른 사람에 대한 의무가 100이라면 헤쎄드는 130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100만 베풀더라도 그 누구도 우리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했기 때문입니다. 헤쎄드는 이처럼 우리의 의무를 초월해서 남을 배려하고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에는 사방이 막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룻을 위하여 무엇인가 하기로 생각했을 때에 길이 열렸습니다. 나오미가 룻의 삶에 ‘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룻도 나오미를 생각함으로 그녀에게 ‘복의 통로’가 되었고, 보아스도 나오미와 룻에게 ‘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들을 통해서 메시아의 선조인 다윗이 탄생했으며 하나님의 구속사의 계획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복의 통로’역할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도 모든 족속을 위한 ‘복의 통로’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 헤쎄드의 삶을 살려면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합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라 나올 때 결과는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과부 혼자도 처신하기 어려운데 과부인 시어머니까지 모셔야 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었습니다. 이방여인으로 베들레헴에 거주하는 것은 보장된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한 가지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신은 시어머니가 필요 없지만 시어머니는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헤쎄드를 행했습니다. 나오미가 룻을 재혼시키기로 작정했을 때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고 자기를 봉양하던 며느리를 떠나보낸다는 것은 자신의 안녕에 대한 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옳은 일을 하기로 선택했습니다. 보아스가 룻의 요청을 들어준다면 그것은 많은 재정손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룻이 이방여인이면서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도 생각하지 못한 ‘죽은 자의 가문과 기업을 이어가는 데 대한 헌신’의 거룩한 목적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헤쎄드의 삶을 위해 위험부담을 감수했으며 어떤 보장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옳은 것을 선택했습니다.

나가면서
룻은 나오미를 전혀 따라올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그렇게까지 호의를 베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타작마당의 밤을 계획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룻은 보아스에게 죽은 자의 이름을 잇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요청을 다 들어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세 사람은 다 헤쎄드의 삶을 살았습니다. 비록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신분과 지위는 다 달랐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다른 사람들이 기대한 것 이상을 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며 자신을 던져 사랑을 표현한 룻에게 하나님은 성숙한 인격을 지닌 보아스를 허락하시고, 그로부터 따뜻한 응답과 배려를 받도록 이끄셨습니다. 룻을 철저하게 배려하는 보아스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헤쎄드의 정신은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주님은 머리 두실 곳도 없으신 분이 굶주린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셨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교우들은 자기 소유를 팔아 나누고 베풀었더니 그 교회에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했습니다(행 4:33). 하나님의 헤쎄드를 갈망하는 자는 남에게 먼저 헤쎄드를 베풀 줄 알아야 하며, 이웃에게 헤쎄드를 베푸는 자야말로 진정한 믿음을 소유한 것이라는 것이 룻기의 메시지입니다. 치열한 경쟁과 이기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헤쎄드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다면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 그리고 이 세상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헤쎄드의 의미를 바로 알고 삶의 현장에서 헤쎄드를 실천하며 하나님의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