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헤쎄드를 행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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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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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룻 1:1-22


각박한 이민생활 속에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일에 지치고 자신을 추스르기도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직장에서 치이고 사람들에게 치일지라도 가정에서 식구들이 서로 다독이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 줄 때 자신감을 갖게 되고 그 가정은 든든히 서게 됩니다. 특히 부모가 서로를 존중하며 사랑하는 모습은 자녀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 반면에 부모가 자주 소리 높여 싸우고 집어던지고 깨뜨리는 집에 있는 자녀들은 불안해하고 고통을 많이 받습니다. 사실 부부는 등을 돌리면 남남입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은 그렇지 않기에 부모의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풍조가 생겼는데 요즘 한국에서 이혼을 할 때 자기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자녀를 서로 안 맡겠다는 부부가 많아진다고 합니다. 결혼식을 올린다고 가정이 저절로 든든하게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가정을 세워가는 가족 구성원들의 태도입니다. 부부가 서로 살아온 환경이나 배경이 다르다 보니 긴장이나 갈등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 가는데 많은 인내와 절제가 필요합니다. 또한 부모가 자녀를 자녀가 부모를 기쁨으로 섬겨야 합니다.

룻기는 타락하고 혼돈한 시대의 한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룻이 시어머니의 권유대로 그냥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더라면 한 평생 모압 여인으로 살면서 모압의 신을 섬기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에 왔습니다. 룻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인 나오미, 룻, 보아스 나름대로 다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었습니다. 룻은 이방 여인이요 과부였습니다. 보아스는 나이 들도록 결혼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룻기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들의 모습은 가정에 문제가 있을지라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교우들의 가정을 축복합니다. 가정은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만드신 제도입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룻기를 살펴보고 각자의 가정에 적용하면서 사랑 충만, 은혜 충만, 기쁨 충만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나오미 가정에 닥친 불행(1-5절)
룻기는 엘리멜렉이 가족들과 함께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됩니다. 룻기의 배경은 사사 시대입니다. 사사 시대의 특징이 사사기 마지막 절에 나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엘리멜렉이 살던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베들레헴은 히브리어 ‘베트’(집)와 ‘레헴’(빵, 음식)의 합성어로, ‘빵집’에 먹을 것이 없어 ‘빵집’을 떠나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부각시킵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엘리멜렉은 당시 사람들처럼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엘리멜렉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왕 되신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가족과 함께 모압으로 이주했습니다. 살기 위해 간 그곳에서 죽음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모압 여인들과 결혼했는데 아들들 또한 죽고 말았습니다. 졸지에 그 가정에 나오미와 두 며느리, 즉 과부 세 사람만 남았습니다. ‘사랑스러운 자’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나오미에게 고난이 닥쳐왔습니다.

헤세드를 베푸는 나오미(6-14a절)
나오미와 모압 출신 두 며느리를 가족으로 엮어준 끈은 나오미의 두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끈이 끊어졌습니다. 더욱이 며느리들은 자녀들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오미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자식을 대신 낳아줄 다른 아들도, 재산도, 앞날도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나오미는 과부가 된 며느리들을 보면서 그저 미안해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셔서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처음에 나오미는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을 동반하고 유다로 돌아가려 했고, 두 여인도 동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유다를 향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오미의 심경에 변화가 일었습니다. 며느리들에게 ‘너희 어머니의 집’, 즉 친정으로 돌아가라 권한 것입니다.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여기서 ‘헤쎄드’에 해당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선대’입니다. ‘헤쎄드’를 하나님께 적용할 때 인애, 자비 등으로, 인간에게 적용할 때는 선대, 후대, 인자 등으로 번역됩니다. 하나님의 ‘헤쎄드’는 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룻기에는 하나님의 헤쎄드를 체험한 자들이 이웃에게 헤쎄드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남편을 먼저 잃은 나오미는 두 며느리의 슬픔과 고통을 깊이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어 새로운 가정을 이룰 수 있게 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총회에 참석이 금지된 모압 사람들과의 결혼이 유다 땅에서 환영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며느리들이 유다에 와서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린다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을 나오미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며느리들이 자신에게 익숙하고 아는 사람들이 있는 ‘어머니 집’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다는 나오미의 판단은 룻기의 중심에 흐르는 ‘인애’(헤쎄드)의 정신, 즉 상대를 위한 법적 의무 이상의 배려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나오미는 남편을 잃은 며느리들이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선택을 지지하고 격려해 준 것입니다. 사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간다는 것은 앞날을 전혀 보장받을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오르바는 나오미의 설득에 모압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헤쎄드를 베푸는 룻(14b-18절)
오르바가 돌아갔는데 룻은 시어머니를 붙좇았다고 합니다. ‘붙좇다’는 히브리어로 ‘다바트’인데, ‘착 달라붙다’, ‘엉겨 붙다’라는 뜻을 갖습니다. ‘다바크’는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에서 ‘합하여’로도 번역된 단어입니다. 즉 룻은 나오미에게 착 달라붙어 시어머니를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한 것입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다시 권했습니다.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이에 룻이 ‘어머니를 떠나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강권하지 말라’라고 한 것은 단호함을 넘어 나오미를 향한 책망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네 백성과 네 신’이라는 나오미의 표현을 압도하는 말입니다. 자기도 어머니와 똑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어머니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강력한 애정과 연대의 표현입니다. 만일 고백의 대상을 ‘어머니’대신 ‘당신’으로 바꾼다면 어떻게 됩니까? ‘당신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당신이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당신이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까? 결혼 서약할 때 ‘나는 당신을 아내/남편으로 맞아 부부의 신의를 지키고 즐거우나 괴로우나 가난할 때나 부할 때나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죽음이 우리를 나눌 때까지 사랑하고 아끼겠습니다’라고 하는 말의 기초가 됩니다. 룻의 답변을 통해 이제 룻은 여호와 신앙을 지닌 이스라엘 여인이 되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나오미도 룻을 다시 보았을 것입니다. 물론 룻도 시어머니와 함께 유다로 가면 자신의 삶이 얼마나 고달플 것인지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룻은 따라 가려 했습니다. 시어머니와 맺은 관계를 결코 깨뜨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헤쎄드를 실천하는 것이 언제나 편안하고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때로 고통스럽기까지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관계를 끊지 않으려는 신실함이 필요합니다. 며느리를 설득하려던 나오미가 도리어 며느리에게 설득 당했습니다. 룻이 나오미의 의견을 접도록 만든 힘이 바로 헤쎄드였습니다.

헤쎄드를 베푸시는 하나님(19-22절)
두 과부가 베들레헴에 이르자 온 동네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기뻐서 환호했습니다. 그들에게 나오미가 모압 여인을 며느리로 맞은 것을 비난하거나, 이민 생활 십여 년 만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빈손으로 돌아온 ‘실패’를 비아냥거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나오미를 보고 ‘이 사람이 나오미냐’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름에는 정체성을 담겨 있습니다. 그들의 외침은 자신들이 알았던 ‘사랑스러운 자 나오미’라는 정체성을 전제로 한 놀람과 충격을 담은 표현입니다. ‘당신은 여전히 우리가 아는 그 나오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자기를 ‘나오미’로 부르지 말고 ‘마라’로 부르라고 합니다. 자신을 ‘나오미’(사랑스러운 자)가 아닌 ‘마라(쓴 자)’라고 부르라는 이유는, 전능자가 자신의 삶을 괴롭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괴롭게 하다’라는 히브리어는 ‘불행을 안겼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나오미는 자기가 겪은 인생의 쓴 맛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불평을 넘는 고발과 항의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나오미의 발언을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을 부르는 기도의 언어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 불평을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언약 백성의 특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나오미의 쓴 소리를 당신을 향한 기도로 받아들이셨을까요? 그 답은 룻기를 끝까지 읽어보면 알게 됩니다. 이 시점부터 룻기의 전개는 나오미의 항의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채워지고, 그 응답의 근거와 중심에는 하나님의 인애, 즉 ‘헤쎄드’가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여전히 붙드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 바로 헤쎄드의 본질입니다.

1장에 반복되는 단어가 ‘돌아옴’입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돌아왔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룻을 ‘돌아온 이’라고 부른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모압 여인 룻이 돌아갈 곳은 모압이지 유다 베들레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어머니의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겠다는 고백했습니다. 베들레헴은 룻이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곳이었지만, 룻기 저자는 룻이 택한 베들레헴으로의 여정이 ‘타향으로의 이주’가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감’이라 적고 있습니다. 룻기에서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개입하시는 것 같지 않지만, 백성의 삶에 드러나지 않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개입하십니다. 룻기 1장의 마지막 절은 앞으로의 장면을 예견하게 합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흉년으로 시작한 1장의 마지막은 풍년을 예고합니다. 하나님께서 헤쎄드를 어떻게 실천하셨습니까? 첫째, 나오미를 혼자 돌아오지 않도록 믿음의 사람 룻을 곁에 붙이셔서 베들레헴에 오게 했다는 점입니다. 둘째, 룻이 나오미를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오르바와 룻이 함께 지냈지만 룻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특별히 임하니 나오미의 삶을 보며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셋째, 나오미 일행이 베들레헴에 도착한 시기가 하필이면 보리 추수를 시작할 때였다는 점입니다. 파랗던 보리가 누렇게 익어서 온 들판을 가득 메운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봅시다. 보리 추수는 양력으로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 즈음에 이루어졌으며, 밀 추수에 앞서 거두는 그 해의 첫 수확이어서 각별한 기쁨이 동반되는 절기였습니다. 더구나 추수와 탈곡은 고도로 집약된 노동이 필요했기에 이 시기에 이방인들의 유입이 많았고, 경제적 약자들과 이방인들을 향한 배려를 기대하기 좋은 때였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던 나오미와 룻이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베들레헴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자세
나오미와 룻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 믿음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룻은 어머니가 죽는 곳에서 자신도 죽어 거기 장사되고 자신이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룻이 맹세할 때 ‘여호와’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란 명칭은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 사회에서만 사용하는 고유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룻이 이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녀가 이제 언약 백성으로 거듭났음을 뜻합니다. 룻이 비록 이방 여인이지만 믿음 안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할 수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이 아니라 믿음임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룻은 단순히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간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 여정을 선택한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불확실했지만 룻은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희생하기로 결단했습니다. 룻의 신앙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는 룻의 충성의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훗날 룻이 다윗의 할머니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에 속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룻을 그분의 거룩한 비전을 이루는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비전이 우리를 통해 완성될 것입니다.
- 헤쎄드를 실천해야 합니다
룻기는 역경 속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손길에 자신들을 맡겨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1장의 키워드인‘헤쎄드’를 실천하려면 그 특징을 잘 알아야 합니다. 첫째, 헤쎄드는 나보다 남을 앞세웁니다. 빈 손이 된 나오미가 두 며느리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낯선 땅 유다에서 모압 출신 며느리들이 겪을 일을 생각한 나오미는 며느리들의 미래를 위해서는 모압에 남는 편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들의 동행을 만류했습니다. 자신의 생계에 도움이 될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행복을 위해 돌아가라고 강권했습니다. 둘째, 헤쎄드는 서로를 하나 되게 합니다. 나오미가 보여준 헤쎄드에 룻은 자기 방식의 헤쎄드로 보답합니다. 룻의 헤쎄드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함께하겠다는 결심을 이끌었고,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하나 됨의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익으로 뭉친 하나 됨은 이해득실이 갈릴 때 깨지지만, 서로를 위한 한결같은 인애는 죽음이 이기지 못하는 하나 됨을 이루게 합니다. 그렇게 헤쎄드로 하나가 된 룻과 나오미에게 하나님의 헤쎄드가 임하여 그들의 앞길이 환히 열리게 됩니다. 셋째, 헤쎄드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게 합니다. 나오미 일행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이방인 일꾼들이 가장 환영받는 보리 추수 시기였습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은 룻을 환영했고, 룻의 상황을 알고 있었던 보아스도 2장을 보면 일상적 호의를 뛰어넘는 특별한 헤쎄드를 베풉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룻에게 헤쎄드를 베푸셔서 메시아의 계보를 준비하시는 놀라운 섭리를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 중심의 가정
나오미의 설득에 따라 큰 며느리 오르바는 자기의 고향과 섬기던 신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달랐습니다. 나오미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지만 나오미 곁을 한사코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어머니가 가는 곳에도 자기도 가고, 머무는 곳에 자기도 있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을 자기의 운명 공동체로 삼고,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죽음이 갈라놓기 전까지는 결코 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고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습니다. 룻은 나오미를 생사고락을 같이할 가족으로 여기며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찾았습니다. 가정의 중심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 어떤 무엇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고난 속에서 나오미가 자신의 이름을 기쁨의 뜻을 가진 ‘나오미’대신 ‘쓰다’는 뜻을 가진 ‘마라’로 불러 달라고 말한 것은 단순히 원망 섞인 투정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잘못을 인정할 뿐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만 기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룻도 눈에 보이는 연결고리가 다 사라진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나오미와 룻이 진정한 가족이 된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나오미와 룻의 신앙 때문입니다. 결혼했다고 모든 가정이 저절로 끈끈한 운명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가정의 중심에 계셔서 그들을 묶어주셔야만 합니다. 룻은 자칫하면 나오미와 영원히 이별을 할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오미와 가족 관계를 갱신하였습니다. 오늘날 가정에 부부간의 갈등, 자녀와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장모와 사위의 갈등이 있습니다. 상대를 알면 알수록 실망스런 점들이 자꾸 드러나고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안 보고 갈라선다고 문제가 해결됩니까? 룻의 선택은 오늘날 가족이 무엇으로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룻과 나오미처럼 하나님만을 중심에 모시고 믿음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대는 가정은 갈등과 위기의 파도를 헤쳐갈 수 있습니다. 이제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아가페의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나가면서
대부분의 가정은 인간적인 허술한 약속, 허술한 감정, 허약한 관계들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위기가 닥치면 쉽게 흔들리고 심지어 무너지기도 합니다. 룻기는 지금부터 무려 3000년 전의 스토리를 담고 있지만 여전히 이 시대를 향한 귀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룻기는 위기를 만난 가정의 모습과 위기를 극복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함께 보여줍니다. 가족 관계가 하나님 중심으로 만들어질 때, 진정한 운명 공동체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에라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헤세드의 헌신으로 가족을 섬길 때에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합니다. 룻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믿음의 가정의 비극과 불행을 결코 외면하고 방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고난당한 가정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며, 그 가정을 통해 나라와 민족, 나아가 세계를 향해 하나님의 복을 전하게 하십니다.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정의 기초가 흔들리는 세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가정의 달에 룻기는 가족 공동체의 참 의미를 새기게 합니다. 진정한 가족 관계를 형성하는 연결고리는 돈이나 명예가 아닙니다. 두 며느리들을 향한 나오미의 헤쎄드를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나오미를 향한 룻의 헤쎄드를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룻의 출신, 문화적 배경, 혈연과 지연 등 모든 장애물조차도 하나님 중심의 헤쎄드로 나아갈 때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도 베푸신 하나님의 헤쎄드에 감사하면서 삶의 현장에서 헤쎄드를 실천해야 합니다. 각 가정이 건강한 가정이 될 때 교회가 건강해집니다. 교회가 건강해질 때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산위의 도성으로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가정의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세우고, 나오미와 룻처럼 헤쎄드를 실천해 각 가정마다 아름다고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교우들의 가정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