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진정한 영적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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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0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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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느 9:1-38

우리가 왜 역사교육을 받습니까? 인터넷만 있으면 세계 어디서나 카톡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효율적으로 대체한다는 AI가 눈부시게 발전하고, 우주 왕복선이 개발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왜 수천 년 전 말 타고 칼싸움하던 시절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까? 역사를 통하여 잘된 부분은 본받고 과거의 실수는 반복하지 않음으로 보다 나은 미래를 갖기 위함입니다. 아들이 고등학교 다녔을 때에 자기가 수강하고 있던 IB 과정 역사 과목의 프로젝트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90년대 들어선 미국의 대외정책이 1930년대 미국이 취했던 대외정책과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다는 것입니다. 1930년대에 미국의 돈이 왜 외국에서 쓰여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세력이 많아지자 대외정책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자꾸 줄여 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이 아시아 여러 나라를 차례로 점령하는 것도 방치하였고 이탈리아가 북아프리카를 침공하는 것도 막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독일, 일본,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동맹국이 이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대외정책이 그 당시처럼 공화당을 중심으로 고립주의 경향을 띠기 때문에 주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프로젝트의 이슈였습니다. 그래서 두 시대의 상황을 비교 분석하는 것이 숙제라 하기에 고등학교 프로젝트의 수준이 이렇게 높은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전에 한국에서 역사 교육을 받을 때는 주입식으로 몇 년에 누가 무엇을 했고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주로 암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역사가 대학교 입학시험 필수과목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점이 너무 아쉽습니다. 사실 지금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트럼프도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런 미국 우선주의, 고립주의를 고집하다 보면 동북아 정세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가 될지 염려가 됩니다.

본문을 보니 학사 에스라가 율법책 낭독을 계기로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통회하면서 초막절을 제대로 지켰던 이스라엘 자손이 이틀이 지나 다시 모였습니다. 왜 모였을까요? 말씀의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작된 영적인 각성이 일회적인 사건이나 한때의 흥분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그들의 삶 가운데 지속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레위 사람들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포로 생활에서 이제 막 돌아온 현재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자기들과 조상들의 잘잘못을 살펴보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요약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들 가운데 영적 각성이 어떻게 일어났으며 또한 그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살펴보며 우리도 그들처럼 영적으로 회복이 되어 헌신을 다짐하면서 하나님의 위로와 은총을 체험하고자 합니다.

유다 백성들의 영적 각성이 어떻게 진행됩니까?
1) 함께 겸비합니다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1절)
유다 백성이 초막절에 회개하고 말씀도 묵상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7월 15일부터 22일까지 초막절을 지키고 2일이 지난 24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모였습니다. ‘모여’는 문법적으로 이들이 스스로 모였음을 나타냅니다.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모두 명사로만 된 문장으로, 직역하면 ‘금식으로 그리고 베옷으로 그리고 그들 위의 땅’입니다. ‘그들 위의 땅’이라는 표현은 흙을 머리 위에 뒤집어쓴 모습에 대한 묘사로, 소멸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명사로만 구성된 문장은 전형적인 참회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깨달은 백성이 회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귀환한 이들의 또 다른 호칭으로, 언약으로 회복된 공동체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금식, 베옷, 티끌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낮아진 모습을 보여 줍니다. 금식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서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구한다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증거입니다. 금식은 사무엘상 7:6과 열왕기상 21:27 등에서 회개와 관련된 의식으로 등장하는데, 특히 스가랴서에서 금식이 예루살렘 파괴와 유다 멸망을 기억하며 회개하는 슬픈 절기와 관련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베옷을 입는 것은 탄식이나 회개와 관련된 것입니다(창 37:24; 대상 21:16). 티끌이나 땅의 먼지를 덮어쓰는 것도 탄식이나 회개와 관련된 행동입니다. 느헤미야의 이 구절과 가장 유사한 표현이 다니엘 9:3에 언급됩니다.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70년간의 포로 기간이 끝나간다는 사실을 인식한 다니엘이 탄식과 회개를 시작하기 전에 보여준 모습입니다. 포로 귀환자들이 다니엘과 같이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탄식하며 조상들의 허물과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기 위한 모인 것입니다. 이틀 전에 에스라가 낭독한 모세의 율법을 듣고 울며 탄식했는데(8:9), 이제 다시 모여서 철저한 회개의 시간을 갖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과 영적인 빈곤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겸손히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애통하는 것은 자신의 죄악 됨을 인하여 아주 슬퍼하는 것을 말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고, 자기의 모습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인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보며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면서 그것을 채우려는 자세로 사는 것이 천국 백성의 참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위로하시며 진정한 만족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바로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2절)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단지 선언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고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을 기꺼이 포기해야 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회개는 입술로만 죄를 고백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에 합당한 행동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절교하고’는 문법적으로 백성이 스스로 이방 사람들과 분리했음을 나타냅니다. 이방인들과의 교제를 끊고 구별된 삶을 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율법을 깊이 알수록 더 분명해집니다. ‘절교하고’의 주어가 개역개정에는 번역되지 않았는데 ‘이스라엘의 씨’가 주어로 등장합니다. 이는 에스라가 9:2에서 이스라엘을 ‘거룩한 씨’로 칭한 것을 상기시킵니다. 에스라는 당시 귀환자의 지도자들이 이방인의 딸을 아내와 며느리로 삼은 죄에 대해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씨’는 언약의 상속을 나타내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뭇 별과 같이 많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창 15:5). 그 언약은 다윗을 통해 이어졌으며(삼하 7:12),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에게도 이어졌습니다. 그 동안 이방인과 교류하는 것에 대해 별로 거리낌이 없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강하게 체험하고 보니 이방인들과 구별되어야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즘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방인들과 절교한다는 것은 좀 지나친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방인은 단순히 외국인이 아닙니다. 그 당시 이방인들은 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방인들과 교제함으로 이스라엘이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게 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은 그들의 역사가 보여 줍니다. “또 네가 그들의 딸들을 네 아들들의 아내로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네 아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출 34:16) 하나님께서 이미 경고하셨지만 누구보다 지혜가 뛰어나다고 한 솔로몬은 많은 이방 여자들을 취하였습니다. “솔로몬이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왕상 11:4). 하나님이 진노하신 결과 솔로몬이 죽은 후에 나라가 둘로 나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 왕 아합은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바알 종교의 선교사였습니다. 이세벨로 인해 북 이스라엘 왕국은 완전히 우상을 섬기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몰랐을 때는 이방인들과 같이 지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말씀을 깨닫고 나니 그들과 교제를 끊으면서 하나님이 구별하신 백성으로서 경건하게 살기를 다짐하고 방해가 되는 것들을 버리기로 작정합니다.

2) 함께 회개합니다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2절)
말씀에 비추어 본 자신들의 허물 된 모습을 보고 철저하게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죄를 인하여 회개했습니다. 회개란 참된 신앙 회복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라고 하셨는데, 주님을 따르는 첫 번째 단계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즉 그 동안 자기 뜻대로, 자기의 방법대로 살아왔던 삶에서 벗어나서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방법대로 살려고 하는 삶으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백한 것은 1장에 나타난 느헤미야의 기도를 연상시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이 파괴되고 귀환자들의 생활이 어렵다는 소식을 접하자 금식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의 집’이 죄를 짓고 악을 행했다고 고백했습니다(1:4-6). 다음에 전개되는 레위 사람들의 기도에서도 조상들의 허물(16~30절)과 자신들의 죄(33~37절)에 대한 고백이 이어집니다.

3) 함께 말씀을 가까이 합니다
“낮 사분의 일은 ...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3절)
이스라엘 자손이 낮 사분의 일, 곧 오전 6~9시에는 서서 율법책 낭독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회개하며 비워진 그들의 마음에 생명의 말씀이 채워집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 왔다는 것을 너무나도 뼈저리게 느꼈기에 세 시간을 서서 말씀을 들어도 힘들다거나 지루하다거나 왜 이렇게 길게 하냐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또한 말씀에 우리를 비추어 보며 허물 된 모습을 보고 고쳐야 합니다. 진정한 삶은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할 때 시작됩니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시 119:92-93) 교회가 부흥하고 성도가 영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말씀 사역을 맡은 사람은 최선을 다해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섬겨야 합니다. 성도들도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제대로 경험하려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모함과 말씀대로 살려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삶의 참된 변화를 경험합니다.

4) 함께 경배합니다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3절)
레위인은 제사장을 돕고 성전 업무 제반을 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본문에 등장하는 레위인들은 백성을 영적으로 깨우치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 과정에서 레위 사람들은 백성의 지도자로서 활약했습니다. 백성이 말씀을 읽고 회개하는 동안에 이들은 단에 올라서서 여호와 하나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백성이 영적으로 각성하도록 인도했습니다. ‘단’은 ‘계단’이라는 뜻으로 8:4에 나오는 임시로 만든 나무 연단과는 다른 것입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것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때나 죄로 인해 당하는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간구할 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삿 6:7; 삼상 8:18; 대상 5:20). 예수아를 비롯한 레위인 지도자들은 큰 소리로 부르짖고 나서 백성이 하나님을 송축하도록 권면하고, 그들도 영화롭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했습니다. 한번 이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무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단 위에 있던 레위 사람들은 일제히 목소리를 높여 하나님을 송축하자 이스라엘 자손이 화답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순간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오랜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패잔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감격이 솟구치고 담대해졌을 것입니다. 다른 성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함께 찬양하고 함께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나도 왕년에 그랬는데 살다보니 다른 일에 바쁘다보니 이제는 받은 은혜가 어디로 갔는지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성도는 언제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이 우리를 회개로, 경배와 찬양으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에스라를 도와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쳤던 레위인이 지금은 기도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기억하게 합니다.
- 의로우신 분(5-8절)
유다 백성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극적으로 귀환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상실감과 허탈감은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부터 쫓겨나 포로가 되었는지, 왜 이방의 지배를 받으며 여전히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자신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물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며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유다 공동체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선택해 부르신 분이이라고 하며 했습니다. 또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통해 가나안 땅을 주기로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여전히 지키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 하나님은 어떤 조건을 제시하였습니까?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창 17:9).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받기는 하였으나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빼앗기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에 이제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이스라엘은 다시 복된 삶을 살 수가 있다고 합니다.
- 전능하신 분(9-15절)
하나님을 찬양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겨 사용하던 소재가 출애굽입니다. 하나님은 당시 최강 대국이던 애굽을 기사와 이적을 통하여 징벌하시고 홍해를 가르셔서 쫓던 애굽 군사들을 깊은 물에 던지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 방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광야에서 만나와 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에게 경건한 백성의 삶을 살도록 정의로운 규례와 진정한 율법과 선한 율례와 계명을 주셨습니다. 과거에 역사 하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돌아보게 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 신실하신 분(16-25절)
광야 시절부터 가나안 정착까지를 회고했습니다. 레위 자손들은 조상들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반역하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무시했던 것을 지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곧아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신이라 그것을 섬기다가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요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라 이스라엘을 아주 던져 버리지 않으시고 돌아올 기회를 주셨습니다. 조상들은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가나안 족속을 물리치게 하셨고 마침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조상들과의 언약을 지키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도움으로 가나안에서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 사랑이 많으신 분(26-31절)
레위인들은 사사 시대부터 왕정 시대를 거쳐 포로 시대까지 회고했습니다. 하나님이 큰 복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단하고 율법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사사기는 350년에 걸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반역을 반복하는 사이클을 보여줍니다. 왕정 시대에 들어와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임으로 하나님을 크게 모독했습니다. 하나님은 반역한 이스라엘을 대적의 손에 넘겨서 환난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는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다를 불쌍히 여기셔서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고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중건하게 하셨습니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은 무엇을 배웠습니까?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징벌은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노 가운데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는 점입니다.

5) 함께 언약 맺기를 결단합니다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 다 인봉하나이다”(38절)
영적 각성의 주체가 ‘백성’입니다. 나팔절의 율법 낭독(8:1-12), 초막절 준수(8:13-18), 회개와 사역(9:1-10:39)으로 이어지는 주요 세 단락은 모두 ‘모이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8:1, 13, 9:1). 문법적으로 백성이 ‘스스로 몰려들었다’는 뜻으로서 백성들 안에서 자발적인 행동을 강조합니다. 출애굽 이후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율법을 선포하시고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체결하심으로써 그들을 언약 백성으로 삼으신 것과 같이 에스라의 율법 낭독은 제2의 출애굽이라 할 수 있는 바벨론 포로 귀환 후 하나님이 그 백성과 새롭게 언약을 체결하도록 이끌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백성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열정, 에스라 및 레위 사람들과 같은 지도자들의 가르침으로 말씀을 깨달은 것이야말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회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자신의 부족함과 죄악됨을 깨달았습니다. 레위 사람들을 통해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죄악과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붙드시는 하나님은 누구신지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 왕들의 시대부터 이제까지 조상들과 자신들이 환난당한 것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면서 조상들과 자신들이 당하는 환난과 어려움이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임을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에 따라 땅을 주셔서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하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계속 하나님을 섬기지 않음으로 그 땅에서 이방 왕들의 종으로 어렵게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38절은 레위 사람들의 기도가 끝났음을 암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찬양과 고백적 기도가 10장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알게 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가 이런 이해를 뒷받침합니다. 이 표현은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라고 이해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들의 현실은 이방 사람들의 지배를 받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새롭게 하겠다는 자발적 의지와 미래에 대한 소망을 암시합니다. 이렇듯 레위 사람들의 기도는 단순한 회고와 고백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세우며 율법에 순종할 것을 결단하고 있습니다.

나가면서
역사는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하신 모든 것들을 돌아보게 함으로써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귀한 교훈을 줍니다. 그들은 견고한 성들과 기름진 땅을 취하고 자기들이 짓지 아니한 좋은 집과 자기들이 심지 아니한 과목을 차지하고 파지 아니한 우물물을 마시는 등 하나님의 복을 받기는 받았으나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이방 나라들에 빼앗기고 백성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이 받은 복은 안개와 같이 사라진 복, 찢어진 복, 새어버린 복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에도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릴 뿐 아니라 이 땅에 기름진 복까지 얻어야 합니다. 한 번 받는 것으로 그치는 복이 아니라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큰 고기 153마리를 잡아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던 것과 같이 지속적인 복, 찢어지지 않고 흩어지지 않는 복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의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 보여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진정한 영적 각성을 이루려면 자기를 알고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느헤미야 시대 백성들이 같이 함께 하나님 앞에 겸비하고, 함께 신앙생활에 방해되는 것들은 버리고, 함께 철저히 회개하고, 함께 말씀을 붙들고, 함께 경배를 드리고, 함께 신앙적인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의로우시고 전능하시고 신실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이 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맡기신 사명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