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통한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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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3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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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은 정치, 경제, 사회의 제도만을 바꾼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뿐인 개혁, 자기는 변화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변화만을 요구하는 개혁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참다운 개혁은 개혁을 주도하는 세력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의 의식이 바뀔 때 가능합니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개혁이 언제나 필요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내세운 3대 개혁 원리가 있습니다. Sola Fide (오직 믿음). 선행의 공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Sola Scriptura(오직 성경). 성경이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권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Sola Gratia (오직 은혜).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포로기 이후 유다 공동체의 재건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재건이 가능했습니까?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을 70년이 지나도 잊지 않으신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약속하신 때가 되자 하나님은 페르시아를 강성하게 하셔서 바벨론을 멸망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유다 백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조서를 내렸습니다. 물론 몇 십 년을 살았던 바벨론을 떠나 폐허가 된 고향으로 이주하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돌아온 후에 성전과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그 결과 성전은 불타버린 지 70년 만에 다시 세워졌고 성벽은 무너진 지 140년 만에 중수되었습니다. 성전도 있고 성벽도 있는 상황에서 유다 공동체는 이제 무엇을 해야 했습니까? 8장에서는 율법 선포, 9장에서는 회개와 신앙고백, 10장에서는 언약갱신을 주제로 다룸으로써 성전과 성벽을 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야할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폐허가 된 성벽을 재건한 후, 폐허가 된 영적 상태를 율법으로 새롭게 하려는 느헤미야의 사역,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대하는 자세, 듣고 난 후 변화된 모습들을 우리의 삶에 비추어보며 우리 속에 있는 폐허가 말씀을 통하여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에스라의 율법 낭독(1-8절)
“율법책 가져오기를 청하매”(1절)
성벽 중건 공사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무사히 끝나게 되자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기 위한 개혁, 곧 내적인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정치적, 행정적 개혁은 느헤미야가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지만 영적 개혁에는 에스라가 등장합니다. 일곱째 달 초하루가 되자 백성이 수문 앞 광장으로 모여들었습니다. 7월은 티쉬리월을 종교력으로 계산한 것으로 태양력으로 9~10월에 해당됩니다. 7월에는 이스라엘의 중요한 절기인 나팔절(1일), 속죄일(10일), 초막절(15~22일)이 있습니다. ‘모여’를 직역하면 ‘그리고 그들이 모였다’입니다. 모임을 주도한 행동의 주체가 ‘모든 백성’입니다. 보통 성회가 지도자의 주도로 진행되지만 이번 성회는 모든 백성의 자발적인 요청으로 시작된 점에서 특이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일제히’에 해당하는 단어를 직역하면 ‘한 사람같이’가 됩니다. 이는 강력한 요청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율법을 듣게 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 편에서 한 마음이 되어 자발적으로 학사 겸 제사장인 에스라, 요즘으로 따진다면 신학교 교수 겸 목사인 에스라를 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한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없어 보이던 자들이었습니다. 언제 대적들이 쳐들어올지 알 수 없어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달라졌습니다. 성벽을 완성하며 정체성의 회복을 경험한 그들이 영적 회복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율법은 단순히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든 삶의 분야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는 지침입니다. 그 지침을 따라 살아갈 때 이스라엘은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지는 복을 받게 됩니다. 교회의 개혁과 부흥의 출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2절)
백성의 요청으로 에스라가 율법책을 낭독한 날은 ‘칠월 초하루’였습니다. 이날은 이스라엘의 민간력으로 새해 첫날이며 나팔절이기도 합니다. 백성은 희생 제물을 드리고 양각 나팔을 크게 불어서 이날을 기념했고, 노동을 금하고 안식을 취하면서 성회로 모였습니다(레 23:24). 이는 종교력으로 안식의 달인 일곱째 달의 첫날이기에 하나님께 이날을 봉헌했으며, 민간력으로는 정월 초하루이기에 지난 한 해 동안 보살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날로 지켰습니다. 새해 첫날에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책을 모든 백성 앞에서 공개적으로 낭독했다는 것은 새해를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을 직역하면 ‘그들이 듣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모두’가 됩니다.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어린이들을 제외한 모든 유다 사람들이 지도자나 일반 백성이나 노인이나 청년이나 남자나 여자가 다 같이 에스라를 통하여 율법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수문 앞 광장에 나왔습니다. 말씀을 사모하여 몰려드는 무리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온 백성에게 충만했음을 보여 줍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 읽으매 ... 귀를 기울였는데”(3절)
백성의 요청에 따라 에스라가 새벽 곧 동틀 때부터 정오까지 수문 앞 광장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그 행사를 위해 특별히 만든 나무 강단에 올라 율법책을 읽었습니다. 나무 강단은 회중이 에스라를 볼 수 있고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만큼 높고, 에스라와 함께 13명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었을 것입니다. “읽으매”를 직역하면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그가 읽었다’가 됩니다. 이는 율법 전체를 읽은 것이 아니라 율법에서 중요한 부분을 발췌해서 읽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를 직역하면 ‘모든 백성의 귀가 율법책을 향해’가 됩니다. 이는 숨죽여 율법을 낭독하는 소리에 집중하고 있는 백성의 모습을 상상하게 합니다. 율법책을 무려 여섯 시간이나 읽었지만 어느 누구도 길다고 불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감격을 인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 상당수는 아마 생애 처음으로 율법의 말씀을 듣는 기회를 가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열심. 하나님이 그들의 모습을 보시며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우리도 본문에 나오는 유다 백성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그 말씀을 들으려고 열심을 내야합니다. 세상일에 빠져 하나님을 잊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다가 세상을 깜박 잊을 수 있는 성도들, 은혜의 바다에 풍덩 빠지기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5절)
에스라가 나무 강단에 올라서서 율법책을 펴니 모인 회중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경의를 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에스라에 대한 경의의 표시일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경의를 나타낸 것입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자 백성들은 감격 속에 손을 흔들면서 “아멘, 아멘”외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며 여호와께 경배했습니다. 손을 드는 행위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표현입니다(시 28:2). ‘아멘’은 ‘과연 그렇습니다’라는 긍정과 순종의 의미를 지니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져 감동이 될 때 경의와 확신을 가지고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유다 백성의 모습을 보면 물론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하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지 않고, 손을 흔들면서 열광하지 않더라도 지금 보여준 열정의 반만이라도 갖고 하나님을 섬겼더라면, 그들은 나라 잃은 백성이 되어 이방 땅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그래도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셔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유다 백성과 같이 매를 맞고 온갖 고난을 겪은 후에 찬송가 280장의 가사와 같이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하기보다 평소에 제대로 신앙생활 하면서 영육 간에 주시는 복을 계속해서 누려야 합니다.
“낭독하고 ...해석하여...다 깨닫게 하니”(8절)
‘낭독하고’의 주어는 3인칭 복수형으로 이를 반영하면 ‘그리고 그들이 낭독했다’가 됩니다. 이는 에스라 혼자 율법을 낭독한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강단 위에 있던 13명이 협력해서 낭독했음을 알려 줍니다. 8절 전반부를 직역하면 ‘그들이 단락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했다’가 됩니다. 모든 구절을 한 번에 읽은 것이 아니라 단락마다 끊어서 읽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읽는 사람들이나 듣는 사람들 모두 율법에 집중할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에스라와 그 좌우편에 있는 사람들이 율법을 히브리어로 낭독하면 백성 사이에 있던 13명 및 레위 사람들이 백성이 사용하던 아람어로 그 뜻을 해석하니 백성이 다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팔절 준수(9-12절)
나팔절에 에스라가 율법책을 낭독한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 운동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가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모든 유다 백성에게 임하니 교만했고, 하나님께 무관심했고, 말씀대로 살지 못했던 자신들의 모습이 깨달아졌습니다. 그 동안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 떠나 살아 왔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말씀은 운동력이 있습니다. 말씀은 인격적이며 영적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제대로 읽고 들으면 감동을 느끼고 진리를 깨닫습니다. 유다 백성에게 말씀이 제대로 임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서 회개와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지만 이날은 새해의 첫날인 나팔절로서 지난 한 해 동안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기뻐해야 하는 날이었기에(레 23:23-25; 민 10:10), 에스라와 느헤미야와 레위 사람들은 백성에게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고 위로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지식과 감정의 변화뿐 아니라 의지의 변화를 수반합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 슬퍼만 하는 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죄를 인하여 문제를 인하여 슬퍼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며 주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기쁨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증거입니다. 느헤미야가 또 백성에게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가난한 자들과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라고 위로했습니다. 여기서 ‘힘’은 히브리어 ‘마우제크’의 번역으로 ‘방파제’라는 뜻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백성의 방파제 혹은 보호자가 되어 주시니, 오직 여호와를 의지함으로써 율법의 정죄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에게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도자들의 권면에 따라 백성은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며 크게 즐거워했습니다. 유다 백성이 자기들의 죄를 인하여 슬퍼하다가 크게 즐거워 할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날이 기쁨의 절기인 나팔절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에스라가 낭독한 율법책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뜻을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주는 감동은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그러나 눈물만이 신앙의 표는 아닙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삶도 필요합니다(살전 5:10).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가 ‘희락’입니다(갈 5:22). 성도들이 주안에서 서로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초막절 준수(13-18절)
일반 백성은 나팔절에 모여 율법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다시 말하면 백성의 지도자들은 율법의 말씀을 더 알고 싶어 성회 다음날 학사 에스라에게로 모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서 초막절에 관한 명령과 이 절기를 지키는 구체적인 방법을 발견하였습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애굽의 학정에 시달리다가 해방된 후 가나안 땅을 향하여 진행하던 40 년간의 광야 생활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침 시기적으로 초막절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게 된 지도자들이 백성에게 초막을 만들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에 백성은 초막절의 규례를 따라 나뭇가지를 꺾어다 초막을 짓고 칠 일간 그 안에 거하면서 초막절을 제대로 지켰습니다. 백성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실천했다는 것을 통해 이제부터 율법을 따라 살려는 그들의 열망을 보게 됩니다. 17절에 보면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날까지 초막절을 이같이 행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초막절을 지난 천 년 동안 전혀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이 참여해서 철저하게 지키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율법책이 없어서 초막절 규례를 몰라 안 지킨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었기에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삶이 편안해지니 신앙생활이 나태해진 것입니다. 안락한 집 놓아두고 나뭇가지 주어다가 초막을 만들고 그곳에서 일주일을 지내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활력이 있고 좌우에 날선 검처럼 예리하기 때문에 혼, 영, 관절, 골수 등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침투하는 능력이 있다고 히브리 기자는 말했습니다(히 4:12).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니 초막절을 제대로 안 지키는 것이 전통처럼 되어 버린 상황에서도 그들은 초막절을 제대로 지켰습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깨달은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이 더욱 중요합니다. 에스라는 초막절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였고 무리가 이레 동안 절기를 지켰으며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습니다.
우리의 자세
느헤미야서는 유다 공동체의 진정한 회복이 성전과 성벽 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토대로 한 회개운동, 실천운동으로 이어져야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공동체의 진정한 개혁을 이루려면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까?
- 모두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에스라가 율법을 읽어주자 백성들은 마음에 감동을 받고, 율법의 말씀대로 초막절을 준수했습니다. 9장을 보면 초막절을 지킨 이후에는 하나님께 과거의 잘못을 진심으로 회개하는 기도를 드리고, 그 기도는 서약으로 이어집니다. 특이한 것은 각 단락(8:1; 13; 9:1)이 모두 ‘모이다’를 뜻하는 동사의 재귀형으로 ‘스스로 몰려들었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곧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몰려듦으로써 개혁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백성을 주어로 하는 동사가 ‘모여’, ‘청하매’(1), ‘기울였는데’(3), ‘일어서니라’(5), ‘응답하고’, ‘땅에 대고’, ‘경배하니라’(6), ‘듣고’, ‘우는지라’(9), ‘가서’, ‘먹고’, ‘마시되’, ‘나누어 주고’, ‘즐거워하니’(12)입니다. 이렇게 백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백성이 성전을 짓고 성벽을 중건했습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자신들이 힘들여 성취한 그 ‘일’의 의미를 찾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니 더욱더 하나님 백성답게 살고 싶었습니다. 유다 백성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혹시 처음 사랑을 잊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여전히 타성에 젖어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열정적인 자세로 은혜의 바다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 모두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전과 성벽이 재건된 현 상황에서 ‘그 다음은 무엇이어야 하는가’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 대답을 제시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들으며 새해 첫날을 시작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의 회복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싶어 했으며, 말씀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말씀을 깨달았을 때는 언제라도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있던 레위 사람들이 백성들의 언어로 깨닫게 해주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열리며 초막절을 제대로 지켰습니다. 신앙의 질과 수준이 달라졌습니다. 9장을 보면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기도와 회개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이 일어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들음을 통하여 말씀이 깨달아지게 되고 깨달은 내용을 우리들의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적용함으로써 변화가 나타나고 열매가 맺어지고 성도들과 더불어 나눔으로써 더욱 풍성해집니다. 그러나 세파에 휩쓸리다 보면 바쁘다, 귀찮다는 이유를 들어 말씀 생활이 게을러집니다. 그러다 보면 영적으로 갈급해집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은 유다 백성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사모하여 진지한 자세로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하던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주님 앞에 나오고 그 말씀을 통한 위로와 삶의 지혜와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 모두 개혁에 참여해야 합니다
본문에는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율법의 낭독자인 에스라와 13명의 지도자들이 단상에 있었습니다. 백성 가운데서 말씀을 해석해주는 13명과 레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9절에 보면 총독 느헤미야도 함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백성이란 단어 앞에 ‘모든’이라는 표현이 8번 나옵니다. 이런 상황은 금식하고 회개하는 모습을 묘사한 9장과 서약하고 인을 친 장면을 서술하는 10장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개혁의 주체와 객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주체이고 백성이 주체이고 에스라가 주체이고 레위 사람들이 주체입니다. 이처럼 모두가 함께 참여할 때 진정한 신앙개혁을 이루어 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나가면서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계기로 내적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하나님 말씀듣기를 사모하는 영적 부흥이었습니다. 에스라는 그 행사를 위해 특별히 만든 나무 강단에 올라 율법을 낭독했으며 백성은 진지하게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백성 가운데 있던 레위인들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백성의 언어로 말씀을 해석해주자 백성 모두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은혜를 충만하게 체험한 유다 백성들이 함께 통곡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에 믿음으로 응답하며 말씀을 통해 삶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으로 회복시키시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성도의 힘입니다. 유다 백성이 보여준 진한 감동, 넘치는 기쁨, 아름다운 나눔의 모습이 우리 교회 뿐 아니라 성도들의 가정과 삶의 현장에서 재연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모두 은혜를 체험하기를 사모하고, 모두 말씀으로 돌아가고 모두 개혁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신앙생활이 업그레이드되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여 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