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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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5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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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느 7:1-73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마무리를 잘 짓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는 시작한 지 52일 만에 완공되었습니다. 비록 안팎으로 많은 반대와 위협과 음모가 있었지만, 예루살렘의 회복을 의미하는 성벽 재건 공사는 그것을 반대하던 자들은 물론 인접한 국가들에게까지도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성벽이 완성되자 느헤미야는 다른 필요한 일들에 관심을 돌려서, 먼저 예루살렘의 안정과 정착의 문제를 다룹니다. 성벽이 완성된 것만으로 예루살렘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구 재분산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성실하고 신앙이 뛰어난 사람을 지도자로 세워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고 백성을 배치해 성을 지키게 합니다. 그리고 성을 지키는 일을 위해 느헤미야는 인구조사를 시작합니다. 돌아온 포로들의 명단은 에스라 2장의 명단과 동일합니다. 느헤미야는 과거의 토대 위에 성벽을 재건한 것처럼, 이번에는 이전 세대의 수고를 바탕으로 하여 공동체를 재건합니다. 유다 백성들의 귀향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백성을 다시 데려오시는 제2의 출애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 공사 후 마무리를 짓는 과정을 보면서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는 원리를 발견하여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자 합니다.

예루살렘 성 방비(1-4절)
느헤미야는 마지막 작업으로 문짝을 달고, 성을 파수할 문지기를 세웠습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이 이방인으로부터 성별되어 하나님을 경배하는 곳임을 알게 됩니다. 본래 성전과 관련된 일을 하던 문지기들이 성벽의 파수와 성문을 지키는 일까지 담당한 것은 예루살렘 주민이 적은 까닭일 수도 있지만 성벽도 성전의 일부로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3:1에서 양문이나 성벽을 대제사장이 성별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므로 성문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안전을 위해서라기보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과 연결된 것입니다(13:22). 원래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은 성전 제사나 절기에 제사장을 돕게 되어 있었으나 이렇게 동원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당시 예루살렘 주민은 많지 않았는데 그 중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레위인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것은 효과적인 노동력 사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성전 문을 지키는 것은 원래부터 레위 사람들의 임무이기도 했지만 당시 상황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먼저 나서서 큰일을 감당하면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게 되고 나아가 올바른 신앙으로 이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니와 하나냐를 예루살렘 통치자로 임명했습니다. 하나니는 느헤미야의 친동생으로, 예루살렘 성이 훼파된 소식을 느헤미야에게 처음 알렸고(1:2) 성벽 건축에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하나냐는 영문의 관리였는데, 영문은 성전의 북쪽 문이나 망대 혹은 요새를 가리킵니다(2:8).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를 직역하면 ‘그리고 그는 많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경외했다’가 됩니다. 하나냐는 사람 됨됨이가 충성되고, 하나님을 경외함이 누구보다 뛰어난 자였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성문의 개폐와 성벽의 파수와 관련한 사항을 지시했습니다. 해가 높이 뜨기 전에 성문을 열지 말고 파수꾼이 지키고 있을 때에도 성문에 빗장을 지르라고 지시했습니다. “해가 높이 뜨기 전”은 정오에 가까운 시간으로, 백성이 일어나기 전까지 문을 열지 않은 것은 적의 기습 공격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또한 성벽의 파수 임무를 분담시켰습니다. 성벽을 주민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되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집에 가까운 성벽에 위험이 닥치게 되면 제일 먼저 자기 집에 위험에 처하기 때문에 그만큼 책임 있게 지킬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성은 광대하고’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예루살렘 성이 엄청나게 크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읍은 어느 정도 컸으나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에 집들이 많지 않았고, 따라서 집을 지을 수 있는 터전이 아주 넓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성읍이 황폐한 채로 남아 있었던 이유는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여 폐허가 된 후로 재건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로로 끌려갔고, 남아 있던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도 폐허가 되어버린 성에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구조사 실시(5-7절)
주민들의 수가 매우 적다는 것은 성 자체의 방어를 위해서 큰 문제였으므로 느헤미야는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를 직역하면 ‘나의 하나님이 나의 마음에 주셨다’가 됩니다. 하나님이 느헤미야에게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셨을 뿐 아니라 이를 수행할 수 있는 권능까지도 주셨음을 나타냅니다. 느헤미야는 귀족들과 민장들과 백성을 모아 그 계보대로 등록하게 했습니다. 여기서 “계보”는 혈연관계를 말합니다. ‘귀족’은 전통적으로 재판의 권한을 가졌을 뿐 아니라 재력으로 농업과 사업을 지배한 세력 있는 사람들(5:7; 13:7)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백성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고(4:14), 건축 감독으로 참여했습니다(4:4). ‘민장’은 ‘하위 통치자’, ‘바벨론 제국의 방백’이란 뜻으로 사용되며, 본문에서는 유다 공동체를 대표해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백성’은 포로지에서 돌아온 유다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구약 성경에 인구 조사가 여러 번 언급됩니다.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나오는 세 차례의 인구 조사는 모세가 독자적으로 판단해서 실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셔서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이 명령하지도 않으셨는데 자기 마음대로 인구 조사를 했다가 혹독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이런 역사를 모를 리 없는 느헤미야는 백성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감동에 따라 인구 조사를 행했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느헤미야는 1차 귀환자들의 계보를 얻게 되었습니다.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갔던 자들 중에서 주전 536년에 처음으로 유다 땅으로 돌아와 자기 성읍에 이른 자들의 이름과 인원이었습니다. 이 명단은 에스라 2장에 나오는 것과 거의 동일합니다. 우리에게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이름일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한 번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가계별 및 지역별 인구(8-38절)
1차 귀환자들의 계보와 인구수가 가계별, 지역별로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 족속의 인구 조사 기록이 굳이 성경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바벨론 땅에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유다 지역은 황폐화되었지만 유다 족속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귀환자들의 계보와 인원 보고서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들이 뿌리를 잃지 않고 계보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불순종한 수많은 유다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남은 자’곧 그루터기를 남겨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그루터기를 통해 훗날 메시아를 보내 주셨습니다. 유다 족속을 지키시고 회복하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특수직 인구(39-60절)
귀환한 자들의 계보와 인원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이들 중 제사장 가문, 레위 사람들,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들, 솔로몬 신하의 자손들이 소개됩니다. 느디님 사람들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주어진 노예들입니다. 그들은 혈통적으로 유다 족속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이방인들이 성전에 종으로 팔려 와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나중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되어 제사장 가문, 레위인 가문과 함께 기록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자격 없는 자들이 영광스러운 자격을 얻었으니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도 역시 자격 없는 자들인데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엡 2:10). 그렇다면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가문에 속해 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과연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계보가 불확실한 사람들(61-65절)
1차 귀환자들 중에는 종족이나 계보가 이스라엘 사람임을 입증할 증거가 없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구별하는 것은 공동체에서 이방의 요소들을 경계하려는, 거룩함에 대한 귀환자들의 의지를 보여 줍니다. 제사장들 중에도 계보가 확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호바야와 학고스와 바르실래 자손은 제사장들로 추정되지만 계보에 이름이 없기 때문에 부정하게 여겨져서 제사장 직분을 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중에 ‘바르실래’라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본래 자신의 제사장 계보를 버리고 다윗 시대의 거부였던 바르실래(삼하 19:32)의 딸을 아내로 삼고 이름을 바르실래로 바꿨습니다. 부를 따라가며 신분을 바꿨기에 자손들은 ‘본래 보계’에 속한 자기 조상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바르실래 당시에는 그렇게 바꾼 것이 좋았을지라도 나중에 그 자손은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들은 총독의 명령에 따라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에 의해 확정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지성물은 가장 거룩한 음식으로 희생 제사 후 제사장들에게 주어지는 몫을 의미합니다(레 2:3, 10; 7:33-34). 여기서 총독은 귀환 시기에 활동했던 총독을 가리키므로 이는 스룹바벨보다 먼저 귀국한 세스바살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성물을 먹지 못한다는 것은 제사장 역할이 실제적으로 금지된 것을 의미합니다. 계보가 분명하지 않는 이들을 부정한 자들로 구분하기는 했지만 최종적인 결정은 신중하게 내렸음을 보여 줍니다.

귀환자들의 합계와 역사를 위한 헌신(66-73)
인구조사 결과 온 회중의 합계는 42,360명인데, 에스라 2:64에서도 1차 귀환자들의 수가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수만 명의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정착해서 살던 바벨론을 떠나 고향인 유다 지방으로 돌아왔다는 점입니다. 그 수는 8~62절에 계수된 총 귀환자들의 수보다 많습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8~62절에서는 20세 이상의 남자를 중심으로 귀환자들의 숫자를 계수한 것이고, 여기에서는 여인들까지 포함하는 전체 회중의 수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중의 수에 포함되지 않는 노비들은 7,337명이었습니다. 또한 부유한 자들에게 고용된 노래하는 남녀들도 있었습니다. 노비와 노래하는 남녀들이 언급된 것은 1차 귀환자들 중에 경제적인 형편이 좋은 자들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1차 귀환자의 명단에 들어간 것은 특권이요, 특별한 역사적 사명을 이뤘다는 증거입니다. 비록 고향 땅으로 돌아오는 것이긴 하지만 새로운 곳에 정착하려고 기존의 생활 터전을 버리기까지 그들은 많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귀환자의 명단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용기 있는 선택을 한 자들입니다. 우리도 삶의 환경을 바꾸려고 할 때, 새로운 출발을 할 때,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믿음으로 과감히 도전해야 합니다.

1차 귀환자들 가운데 어떤 족장들은 역사를 위해 보조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는 성전 재건을 의미합니다. 에스라 2:68에는 “어떤 족장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 터에 이르러 하나님의 전을 그 곳에 다시 건축하려고 예물을 기쁘게 드리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 2:69에는 족장들이 드린 돈과 제사장의 옷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느헤미야서에는 총독이 성전 재건을 위해 보물 창고에 드린 돈과 제사장의 옷들이 언급된 후에 또 다른 족장들이 드린 돈이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더 나아가 백성이 성전 재건을 위해 드린 돈과 제사장의 의복들도 언급됩니다. 성전 재건과 관련해서 에스라서보다 느헤미야서에 더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1차 귀환자들에 대한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지만 성전 재건에 대한 귀환자들의 관심을 느헤미야서가 에스라서보다 좀 더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느헤미야는 족장들과 총독과 백성이 성전 재건에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헌신한 것을 이렇게 강조함으로써 주민이 부족한 예루살렘 성에 더 많은 사람이 거주하도록 독려하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귀환자들이 각자 그 조상들이 살던 성읍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는 과거와의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성전을 섬기는 사람들인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몇 명의 백성이 자기들의 도시에 거주했고, 그 외 온 이스라엘 자손도 그들의 도시에 거주한 것입니다. 성전을 섬기는 사람들 모두 예루살렘에 거주한 것은 아니고 그들 중 일부는 안전 때문에 오벨이나 예루살렘 인근, 유다의 여러 도시에 거주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자들이 더 많아지도록 노력했습니다.

성벽 완공의 의미
느헤미야에 의해 성벽이 완공되던 때는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로 있다가 점차로 귀환하던 시기였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는 예루살렘 성읍이 바벨론 군대가 한 세기 반 이전에 파괴했던 상태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성벽은 무너져 있었고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는 안정이 되지 못하였고, 유다 백성들은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느헤미야가 백성들과 더불어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단시간에 다시 재건하였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새로운 소망과 용기를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무엇인가 하나를 이루었다는 것은 이룬 것이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관계없이 참여한 자들에게 기쁨과 더불어 자부심을 줍니다. 문짝을 다시 달았다는 것은 곧 공사의 완료와 함께 적의 침입에 대한 방위 태세가 갖추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유다가 정치적인 회복의 길에 들어섰음을 입증해 줍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유다의 정치적인 중심지일 뿐 아니라 종교적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각종 절기와 의식, 그리고 모든 예배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고 오직 예루살렘 성전만이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 공사가 완료되었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무너진 신앙을 다시 회복하며, 잃었던 제단을 다시 쌓게 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자세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공사를 마친 후에 신실한 지도자들을 세워 성을 다스리게 하고 백성들이 분담하여 성을 지키게 했습니다. 성 안에 충분한 인구를 이주시키기 위해 1차 귀환자들에 대한 기록을 확인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자세는 무엇입니까?
- 영적인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성벽이 다 지어졌다고 해서 그 성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옛날 예루살렘 성은 견고하게 서 있었지만 바벨론 군대에 무너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인 견고함이 아닙니다. 성읍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성벽이 아무리 견고해도 안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 성은 제대로 지켜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위험한 순간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가정과 교회와 이 사회의 영적 파수꾼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항상 깨어서 말씀과 기도와 예배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 자세가 어떠한 지 항상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 하나님의 감동에 따라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감동하심은 그 감동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해야 할 일의 동기를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의 감동하심 없이는 그 어느 일도 제대로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과거 다윗이 자기 욕심대로 인구 조사를 했다가 큰 곤경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실시한 인구 조사는 하나님이 주신 감동으로 한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재앙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늘 하나님의 감동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감동대로 페르시아 왕궁에서 유다 땅으로 왔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영적인 민감함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님과 연합할 때 생깁니다.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을 따라 판단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존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 믿음을 계승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1차 귀환자들을 계수하면서 혈통별로 기록 명단을 확인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계보가 불확실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서도 혈통을 확인할 만큼 계보를 중시했던 혈족 공동체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계보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모태신앙이 아니라 자기부터 믿기 시작했으면 믿음의 명문가의 기초를 놓아야 합니다. 환경이 변해도, 시간이 지나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한결같이 지켜 나가야 합니다. 로이스의 믿음이 유니게에게, 유니게의 믿음이 디모데에게 전수된 것처럼 우리는 선진들의 순수한 믿음을 계승하고 그 믿음을 후손에게 남겨주어야 합니다.
-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벨론 포로지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유다 백성은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많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생활에 정착해서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공동으로 수행해야 할 성전 건축이라는 과업도 있었습니다. ‘어떤 족장들은 역사를 위해 보조했고 방백은 금과 대접과 제사장의 옷을 보물 곳간에 드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물을 드린 자들이 있는 반면 그러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재물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바쳤습니다. 물론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은 한 공동체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기에 권세와 부를 어느 정도 지닌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물질이 아무리 넉넉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과 감격이 없으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마음으로 예물을 드릴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제대로 하려면 몸으로 헌신하는 것 뿐 아니라 물질적인 헌신도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릴 때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않고 자원하는 심정으로 아낌없이 드려야 합니다.

나가면서
느헤미야는 성벽 건축의 완성이라는 대역사를 이루고 나서 성취감에 안주하기보다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완성을 위해 새로운 사역에 눈길을 돌리는 지도자였습니다. 포괄적인 안목으로 다음 단계를 알고 실행으로 옮기며 공동체에 동기를 부여해주는 리더십을 가졌습니다. 느헤미야서 6장과 7장에서 보여주는 외부 장애에 대한 극복 방법과 다음 단계의 사역을 내다보는 영적 통찰력은 느헤미야의 영적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잘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의 족장과 백성들은 그들을 포로 된 곳으로부터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예물을 드렸습니다. 이 같은 헌신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동과 감격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 또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참된 자유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러려면 영적인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에 따라 행해야 합니다. 믿음을 계승해야 합니다.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시오 온전케 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자 믿음으로 나아가는 신실한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