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위기에서 빛나는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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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1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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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느 5:1-19



초등학교 5학년쯤에 선생님이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의 시를 가르쳐 준 적이 있었습니다. 금준미주 천인혈, 옥반가효 만성고, 촉루락시 민누락, 가성고처 원성고. (황금 술통에 담긴 맛좋은 술은 만백성의 피요 옥 소반에 담긴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농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백성의 원망소리 높구나) 전형적인 탐관오리인 변학도가 자신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춘향전이 쓰인 조선시대보다 2000년은 더 오래된 시절 유대 사회의 모습이 본문에 그려지고 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으로 인한 계층 간의 갈등, 고리 대금, 인신 매매, 과도한 세금 징수, 권력자 하수인들의 횡포, 부정 축재 등등.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들어도 전혀 낯설지 않은 부정의 유형들이 느헤미야 당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다 사회에 있었습니다. 1991년에 있었던 Gulf 전에서 승리를 거둔 뒤 George Bush의 인기가 치솟았으나 이어서 닥친 경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자 지지율이 떨어졌습니다. 그때 대통령 후보로 나선 Bill Clinton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유명한 구호를 내세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경제 문제가 민심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온 백성이 다 힘을 모아도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한 빈부간의 갈등으로 인하여 성벽 중건은 또 한 차례 위기를 맞았습니다. 포로기 전에 있었던 유다의 악한 모습이 귀환 공동체에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사 5:8-12). 느헤미야가 어떻게 난국을 타개하며 성벽 중건사역을 추진하는지 살펴보면서 그에게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찾고 우리 또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가난한 백성들의 원망(1-5절)
성벽 재건 공사가 진행되고 있던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했습니다. 사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들에게 성벽 재건에 참여하는 것은 커다란 희생이 요구됩니다. 특히 “백성이 그 아내와 함께”라고 표현된 그룹 속에서 ‘아내’를 명시함으로 가정생활의 경제적 궁핍함을 강조합니다. 또 다른 그룹은 “형제 유다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귀환자들 가운데 보다 부유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 성벽 건축이 민족의 정체성 회복, 나라 바로 세우기 등 거창한 비전을 이루기 위한 것이지만 그들이 성을 쌓는다고 당장 생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상은 좋으나 현실이 따라주지 못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전자가 후자에 대해 원망을 함으로 사회적, 경제적 신분과 여력이 다른 두 그룹들 간의 갈등이 터져 나온 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이라는 표현을 3번이나 사용하면서 백성의 절박한 목소리를 직접 듣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3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류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땅이 없으니 경작할 것도 없고 그저 하루하루 노동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흉년이라 일거리도 별로 없었습니다. 딸린 식구는 많은데 먹을 것이 없으니 양식을 얻는 문제가 절박했습니다. 2절을 직역하면 ‘그리고 우리가 얻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가 먹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가 살게 하소서’가 됩니다. 이는 자비를 요청하는 백성의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수사학적인 점층법을 사용해 얻음에서 먹음으로, 먹음에서 생존으로 비중을 한 단계씩 높여 호소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부류는 밭과 포도원과 집은 있으나 흉년 때문에 곡식을 충분히 거두지 못해서 부동산을 담보로 잡히고 식량을 구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성벽 공사와 흉년으로 형편이 더 어려워지자 저당 잡힌 재산을 잃어버릴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세 번째 부류는 부과된 세금이 너무 많다보니 밭과 포도원을 저당을 잡히고 빚을 내어 세금을 내었습니다. 그들 역시 빚을 갚지 못해 저당 잡힌 것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백성의 호소에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가난한 자들은 자기들에게 피해를 준 사람들을 ‘적’이 아니라 ‘형제’로 부르고 있습니다. 부자들을 원수로 여긴다면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맞서 싸우려고 하겠지만 형제로 여길 때에는 공의가 실천되지 않는 부분만 해결되면 됩니다. 특히 가난한 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이란 표현입니다. ‘그들의 자녀가 그들에게 귀하다면 우리들의 자녀도 우리에게 귀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지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연대성의 문제가 되어 긴박한 조치를 요청한 것입니다. 돈을 빌렸는데 그 돈을 갚지 못하니 자녀들이 종으로 팔리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딸들이 종으로 팔려 가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잡일을 하기 위하여 팔려가기도 하지만 첩으로도 팔려갔을 수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포로생활을 경험하였는데 막상 고향 땅에 돌아와 전보다 더 안타까운 종살이를 하며 또 다른 포로생활을 그것도 동족으로부터 강요당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유다 지도층이 빚쟁이가 되고 가난한 자들이 빚진 자들이 되는 모순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가진 자의 그늘 아래서 가난한 자가 보호받는 공동체를 원하셨습니다(레 25:39-55). 그런데 지위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욕심을 버리지 못해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한마음으로 성을 재건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하나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대응(6-13절)
서민들이 경제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어제 오늘에 생긴 일이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부임하기 전에도 그랬습니다. 성벽 재건 때문에 이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진행하는 과정에 다시 드러났을 뿐입니다. 게다가 흉년이 겹쳤고 과도한 세금 징수가 따랐습니다. 이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지 않으면 성벽 재건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겼느니 느헤미야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느니 하는 말이 나올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느헤미야가 가난한 자들이 와서 하소연하기 전까지 그들의 심각함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성벽 재건에 온 힘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느헤미야에게 성벽 재건의 과제 외에 경제 정의의 실현이라는 또 다른 무거운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개혁이란 기득권층에서 그동안 누리던 것을 포기하려는 각오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기득권층의 지지 없이 섣불리 추진하는 개혁은 도리어 기득권층의 반발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일을 한다는 미명 아래 백성들의 불만을 무시하고 성벽 쌓는 일만을 강제적으로 추진하면 백성의 저항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에서 사회적인 개혁은 어쩌면 성벽 건축보다 더 풀기 어려운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느헤미야는 사회 지도계층이 저지른 행동을 인해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들의 탐욕에 의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백성이 어려움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막 총독으로 부임하여 예루살렘에 지지기반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지역의 기득권층을 무시하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벽재건에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깊이 생각하였다는 것은 느헤미야가 늘 해오던 대로 하나님의 인도함을 구하면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백성의 상황을 살펴보고 어떠한 대책을 세워야 할지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을 확신하였기에 정면 돌파를 했습니다.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느헤미야가 보는 문제의 본질입니다. 돈 있는 사람이 돈 없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시기와 상황입니다. 느헤미야는 귀족들과 관리들을 불러 꾸짖었습니다. ‘꾸짖다’는 말은 단지 야단을 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이 한 일을 논리적으로 지적한다는 것입니다. 지도층이 가난한 동족을 형제로 취급하지 않고 돈 버는 대상으로 여겨서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22:22~27은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처럼 과부와 고아를 보살피고 그들은 온정으로 대해야 하는 공동체적 책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설명하고 해결책을 제안하기 위해 공적 대회를 소집했습니다. 느헤미야가 귀족과 관리들의 불의를 공개적으로 꾸짖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가진 자를 타도하자고 그들을 몰아세우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문제를 지적했고 다시는 그와 같은 죄를 범치 않도록 권면을 했습니다. 개인의 회개만이 아니라 모두가 동의하는 사회질서 정립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이 지적에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 형제 유다 사람”“너희 형제”하면서 가난한 자들도 지도층의 형제임을 강조합니다. 느헤미야와 그의 부하들은 유다로 귀환한 후에 인근 이방인들에게 팔린 동족들을 몸값을 치르고 데려오고 있는데 지도층 인사들이 도리어 동족들을 종으로 팔고 있으니 이게 될법한 일이냐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안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을 비웃고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비웃지 않겠느냐?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전을 짓고 성벽을 중수하는 일의 가치가 훼손되고 또 대적들에게 공격의 명분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지적하는 느헤미야의 말에 지도층 인사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제시한 해결책
느헤미야가 귀족들과 관리들을 꾸짖은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백성들에게 돈을 꾸어 주고 이자를 받았다는 것 때문이라기보다 어려운 형편에 있는 형제에게 고리의 이자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담보로 잡혀 있는 부동산들 즉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을 당장 돌려주고, 돈과 곡식과 새 포도주와 올리브기름을 꾸어 주고서 받은 비싼 이자도 당장 돌려주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부자들이 백분지 일, 즉 한 달에 1%, 일 년에 12%의 높은 이자를 받고 빌려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담보물을 반환하게 하여 백성들이 다시 자신의 일터에서 힘써 일하면서 가족도 부양하고 빌린 돈도 갚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귀족이나 관리들은 이미 빌려 준 돈의 원금을 되찾을 수 있게 되는 동시에 담보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되지 않을 것이며, 백성들은 되찾은 집과 토지로 다시 돈을 벌 수 있게 되므로 모두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이 모든 것을 되돌려 주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다고 하자 느헤미야는 법적으로 유효하게 하기 위해 제사장들 앞에서 맹세를 시키면서 그들에게 경고했습니다. “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옷자락을 털다”는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을 경고하는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경제적으로 소외된 계층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들은 ‘아멘’을 외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가난과 압제의 이중고에 시달리던 백성은 모처럼 기쁨과 평안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제안이 먹혀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자기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느헤미야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리더였습니다.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과 자기 형제와 종자들도 이자를 받는 일에 관련되었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백성에게 꾸어 준 돈에 대한 이자를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실제로 이자를 받았다기보다 자기를 지도계층에 포함시킴으로써 귀족과 관리들만이 죄인 취급당함으로 인한 반감을 줄이고 공동체 전체의 유익과 단합을 도모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느헤미야에게서 거부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느꼈을 것입니다.

모범을 보인 느헤미야(14-19절)
느헤미야가 12년 동안 (주전 444~432) 총독으로 있는 동안 이전 총독들이 관행으로 해오던 개인의 권리들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토색하지 아니하였으며, 종자들을 통해 압제도 하지 않았으며, 땅도 사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땅을 사지 아니하였다”를 직역하면 ‘그리고 우리가 밭은 사지 않았다’가 됩니다. 이는 느헤미야와 그의 부하들이 모두 가난한 백성을 이용해 부를 축적하는 악한 행위를 하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느헤미야의 식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150명이 함께 참여했고, 이방인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려면 소와 양과 닭이 많이 필요했고, 열흘에 한 번은 각종 포도주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이 모든 비용을 개인적으로 충당했습니다.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자답게 백성을 진심으로 아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느헤미야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만 알아주시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였는데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요, 상 주시는 분임을 믿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느헤미야의 리더십의 특징
- 용기 있는 지도자
상당수 지도자들이 성벽재건 사업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그들의 협조는커녕 도리어 느헤미야에게서 등을 돌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지도층이 동족을 착취하는 행동을 묵인한다면 가난한 백성들이 점점 더 어려움을 겪게 되고 백성 중에 불만이 커질 것입니다. 기득권층을 상대로 개혁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지도자로서의 결단이 필요할 때 과감하게 일어났습니다. 느헤미야는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을 제사 드리는 것보다 더 기쁘게 여기는 하나님'(잠 21:3)을 사랑하는 공의로운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의 죄를 지적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단호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 솔선수범하는 지도자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과정에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을 지고 희생적으로 함께 짐을 나누었습니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 그는 단호함, 결단력, 그리고 옳고 그름의 판단력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느헤미야는 스스로 백성들에게 본이 됨으로 모든 백성들이 신뢰를 가지고 단합하여 일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직위를 치부의 수단으로 이용하던 이전 총독들과는 달리 사례를 받지 않았으며 백성들을 착취하지도 않았고 도리어 성벽 건축 공사를 위해 온 힘을 다했습니다. 공직 생활에서 청렴결백했으며,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늘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의 모습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오신 예수님의 예표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포기하거나 유보해야 할 것이 있으며 기꺼이 해야 합니다.
-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자
느헤미야가 백성의 필요를 우선순위에 놓을 줄 아는 포용력과 성숙함을 보여준 것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자기도 하나님 앞에서 결산해야 할 때가 있음을 알았기에 통치자로서의 직무를 충실하게 감당했으며, 백성을 사랑하며, 공의로운 정치를 펼쳤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웃의 아픔을 진정으로 알고 함께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큰 부담을 안으면서도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명목으로 불쌍한 이웃과 무관해서도 안 되며, 불쌍한 이웃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소홀해서도 안 됩니다. 느헤미야는 자기의 충성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답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하나님만을 높이는 지도자였습니다.

나가면서
유다 공동체 안에 일어난 불만의 주된 원인은 빈곤과 불평등이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에게 편중된 부는 공동체 내부의 평화를 깨뜨렸고 분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집회를 열어 귀족들과 민장들이 높은 이자 취한 것을 꾸짖었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포로가 되어 팔렸다가 돌아온 형제들을 돈 문제 때문에 다시 팔리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측근들은 이자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내려놓음의 본을 보였고 백성을 긍휼히 여겼습니다. 우리 주변에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지만, 지우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식탁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성도들을 통해 이 세상의 연약하고 소외된 자들의 아픔과 상처들이 치유되기를 원하십니다. 전에는 우리도 아픔을 가지고 상처도 받은 자였으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위로를 받고 치유를 받았기에 이제는 다른 형제나 자매들에게 눈을 돌려 그들을 돕는 하나님의 도구들이 되어야 합니다. ‘코이노니아’라는 헬라어는 단지 교제의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눔, 구제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진정한 교제는 우리의 모든 것을 함께 나누면서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느헤미야가 처한 환경과 형편은 우리와 다르지만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날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한 백성이 되고, 이웃 사랑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