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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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4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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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느 2:1-10


금년도 교회 표어가 ‘참된 개혁을 이루는 교회’입니다. 개혁은 변화를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건강한 변화는 발전으로 나타나지만 불건강한 변화는 퇴보로 나타납니다. 퇴보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변화가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뉴턴의 제일법칙이 있습니다. 관성의 법칙입니다. 관성은 현재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성질입니다.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정지 상태에 있는 것은 계속 정지 상태에 있으려하고, 움직이는 것은 계속 움직이려고 합니다. 우리도 알게 모르게 관성의 법칙에 따라 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냥 이대로가 좋아 하며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거나 전에도 이렇게 해왔는데 하며 종전 방식을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이런 타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첫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며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서를 묵상하면 할수록 느헤미야가 얼마나 탁월한 리더였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 비전의 사람, 말씀의 사람, 열정의 사람, 위기 속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영성과 지성과 추진력을 골고루 갖춘 자로서 21세기에도 그와 같은 사람이 우리 교회는 물론 사회 모든 분야에서 필요합니다. 본문은 대부분 느헤미야와 아닥사스다 왕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대화는 느헤미야의 기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응답되어 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기도 응답과 더불어 느헤미야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것은 황폐하게 되고 불타 버린 예루살렘 성곽의 재건입니다. 그 과정에서 물론 대적들의 도전이 있을 것입니다. 1장과 2장에서 기도하는 느헤미야의 모습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와 더불어 그가 세운 목표를 이루기 위한 추진력 또한 대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를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자를 사용하시는지 살펴보며 우리도 느헤미야와 같이 믿음으로 나아가면서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시는 것을 경험하고자 합니다.

왕이 수심의 이유를 물음(1-3절)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이 허물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아닥사스다 왕 20년 기슬르월입니다(1:1). 2장은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니산월을 배경으로 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지만 당장 서둘러 무엇인가를 하려고 조급해하지 않았으며 4개월간 예루살렘과 ‘남은 자들’의 고난과 회복을 생각하며 금식기도를 해왔습니다. 느헤미야의 얼굴에 드리운 수심을 눈치 챈 왕이 그에게 무슨 근심이 있는지를 묻습니다. 왕의 신임을 받는 술 관원이지만 왕 앞에서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이는 필연’에 해당하는 단어를 직역하면 ‘이는 ...밖에 없다’라는 확신의 표현입니다. ‘근심’으로 번역된 단어‘로아’는 ‘슬픔’이라는 뜻과 함께‘부패, 악함’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느헤미야를 염려하는 표현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반역을 의심하는 표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라고 한 것은 느헤미야가 느낀 두려움이 매우 컸음을 보여 줍니다. 왕을 섬겨야 하는 신하로서 근심스러운 모습을 보였으니 자칫하면 왕의 노여움을 살 수도 있었고, 자신의 대답으로 인해 오히려 예루살렘 성의 회복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곽 재건 사업이 바로 아닥사스다 왕에 의해 중단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느헤미야가 섣불리 말하다가는 자칫 아닥사스다 왕의 진노를 살 수 있었습니다. 물론 왕이 내린 조서 내용 가운데 한 가닥 소망을 품을 수 있는 여지는 있었습니다. “이제 너희는 명령을 전하여 그 사람들에게 공사를 그치게 하여 그 성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고 내가 다시 조서 내리기를 기다리라”(스 4:21)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왕이 과거에 내린 조서를 폐지하는 조서를 다시 내릴 가능성은 일반적으로 희박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왕에게 자신이 근심하고 있는 문제를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느헤미야의 요청은 정치적인 사안이었지만 그는 지혜롭게 그 일을 개인에게 일어난 슬픈 소식으로 언급합니다. 페르시아 사람들이 조상들의 무덤을 존중하는 것을 느헤미야는 잘 알았기에 직접적으로 예루살렘 성이라 언급하지 않고 나의 열조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라 부르며 그 성을 건축하게 해달라고 그들의 관습에 호소하여 도움을 구했습니다. 느헤미야의 주요 관심은 성읍의 회복에 있지만, 조상의 무덤이 더럽혀진 문제를 먼저 강조하면 혹시라도 왕의 동정심이 유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왕의 호의적인 반응(4-6절)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상황을 설명하자 왕은 놀랍게도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왕이 느헤미야의 말에 관심을 보인 것은,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1:11)라는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를 직역하면 ‘이것에 관해 무엇’이 됩니다. ‘원하느냐’이는 구체적인 소원이나 계획을 묻는 질문을 의미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속으로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느헤미야는 지난 4개월 동안 열심히 기도했음에도 왕 앞에서 또다시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렇다고 왕 앞에서 눈을 감고 머리를 숙이고 소리를 내어 기도할 수는 없었기에 아마 왕의 얼굴은 바라보면서 마음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모든 곳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느헤미야의 신앙고백입니다. 개역개정은 그 기도를 ‘묵도’라고 번역합니다. 기도하면서 느헤미야는 그동안 생각하고 계획했던 내용을 왕에게 잘 설명할 수 있도록 정리했을 것입니다. 묵도를 마친 후 느헤미야는 조심스럽게 예루살렘을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자기를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포로 된 그가 자기 나라의 무너진 성읍을 중건하러 가겠다는 말은 자칫하면 큰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의 말을 듣고는 의외로 쉽게 허락해 주었습니다. 평소에 느헤미야가 맡은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이는 하나님의 역사였으며 느헤미야의 기도 응답이었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왕후에 대한 언급이 느헤미야와 왕의 대화 중간에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들의 대화가 사적인 자리에서 이어졌음을 말해 줍니다. 공적인 행사에는 보통 왕후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왕이 언제 돌아오느냐 물을 때 느헤미야는 구체적으로 기한을 말했습니다. 5:1에 의하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총독으로 12년을 있었는데 왕 앞에서 처음부터 예루살렘에 12년을 가있겠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중에 어떻게 연기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질문하는 왕에게 납득할 만한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재위 32년에 수산으로 돌아가 왕에게 보고했고, 그다음 두 번째 임기를 위해 예루살렘을 재방문했습니다(13:6-7).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귀환(7-9절)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는 왕이 흔쾌히 자기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에 더욱 용기를 내어 자신의 예루살렘 방문을 위해 지원 요청을 했습니다. 먼저 강 서편 총독들이 왕의 조서가 없다면 자기 지역을 지나가는 것을 방해하거나 통과시켜 주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유다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통행을 보장하는 조서를 부탁했습니다. ‘강 서쪽’은 직역하면 ‘그 강 건너편’인데, 에스라 4:10이나 5:3,6에는 ‘유브라데 강 건너편’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유브라데 강에서 지중해까지 모든 지역을 포괄합니다. 다음으로 삼림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려서 성문, 성곽, 자신이 거할 집에 사용되는 건축자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느헤미야가 부탁한 내용을 볼 때 그는 이미 유다로 가서 일하기 위해 세밀하게 계획과 전략을 세워 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문제를 놓고 기도할 만큼 영적이었으며,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만큼 실제적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왕이 느헤미야의 요청을 모두 수락해 주어 일은 순조롭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이 일이 왕의 덕이나, 자기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왕은 군대 장관과 마병을 동행시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덕분에 그는 강 서쪽의 총독들에게 왕의 조서를 전하고 유다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온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는 과정에 전혀 다른 모습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 8:22에 의하면,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하였다”고 합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 길에서의 위험을 이유로 자기들을 포로로 삼았던 나라의 군대로 호위를 받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이 군대를 붙여주는 것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으로 믿고 왕의 선처를 기꺼이 수락하고 왕이 붙여주는 군대 장관과 마병들과 함께 갔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누구의 믿음이 더 좋은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에스라는 길을 떠나기 전에 금식하고 하나님께 간구 하였는데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것을 믿지 못하고 이방의 왕이 제공하는 군대의 도움을 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군대를 붙여준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인데 에스라는 자기만 신앙이 있는 척하고 유별나게 행동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주어진 환경과 형편에 따라 다양하게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에스라나 느헤미야나 둘 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요, 기도하는 자들이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애쓴 자들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신실한 종들이었습니다. 다만 주어진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었습니다.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둘 다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에스라는 영적으로 부흥운동을 주도하고 느헤미야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유다 총독으로 백성들의 의식을 개혁했습니다.

대적들의 근심(10절)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을 받아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려 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그 일로 인해 심히 근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 같은 대적들은 그들이 성전 재건 사업에 참여하기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한 이후 (스 4:1-6) 유다 백성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느헤미야의 등장으로 그 지역에서 자신들이 누리던 기득권을 잃어버릴 것을 염려했습니다. 대적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감사하기는커녕 도리어 근심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모습입니다. 주의 일을 할지라도 고난이 없을 수 없고 문제가 없을 수 없지만 그런 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upgrade 시키고 우리를 성숙한 사람으로 빚어 가십니다.

우리의 자세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선한 손을 베풀기 원하시는 사람들은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느헤미야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느헤미야의 직업은 왕의 술관원이었습니다(1:11). 왕이 마시는 술을 미리 맛봄으로써 혹시라도 왕을 독살하려는 일을 막는 역할입니다. 이로 미루어 느헤미야는 왕으로부터 아주 신뢰를 받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4개월 동안 민족의 죄를 대신 회개하고, 회개하면 회복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 왔습니다. 당시 왕 앞에서 근심하는 표정을 짓는 것은 불경죄에 해당되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으나 조국에 대한 염려가 크다 보니 얼굴표정에 근심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네가 병이 없는데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신하가 왕의 표정을 살피며 보살펴야 할 텐데 황송하게도 왕이 신하의 형편을 염려했습니다. 느헤미야의 형편을 자상히 묻는 왕의 태도로 미루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느헤미야는 평소부터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왕에게 인정을 받은 자요, 왕은 그와 가깝다 보니 그의 개인적인 형편까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어려울 때 내게 관심을 가져주고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어려운데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고 사랑이 없다고 불평하기 전에 먼저 이웃과의 관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참 신자는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언제 어디서나 진실한 자세로 가지고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들어서 큰일을 맡기십니다.
-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의 이야기를 들은 왕은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대답하기 전에 하나님께 묵도했습니다. 왕 앞에 서 있었지만 하나님께 은혜를 구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먼저 기도부터 합니다. 할 말을 가르쳐 주시는 분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지혜와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페르시아 왕의 앞에서도 기도했습니다. 즉, 느헤미야는 자기의 일터에서 기도했습니다. 기도원이나 교회당에서만 기도해야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서나 기도는 계속해서 문을 두드림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구해야 합니다. “너희가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약 4:2-3). 언제 어디서나 믿음으로, 간절함으로 진실한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십니다. 느헤미야처럼 기도가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게 됩니다.
- 실천력이 있어야 합니다
기회는 언제나 오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과의 차이는 주어진 기회를 얼마나 잘 활용하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왕비도 함께 있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아닥사스다 왕은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하며 물었습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으로 하여금 그 성을 짓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내친 김에 성벽 재건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왕에게 통행증과 자재 사용 허가증을 부탁했습니다. 만약에 왕이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글쎄요 나무도 필요할 것 같고 벽돌도 필요할 것 같고, 좀 더 생각해 보고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하면 기회는 물 건너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대답은 상당히 구체적입니다. 그는 지난 4개월 동안 골방에 들어앉아 기도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페르시아 사람들의 관습, 예루살렘 주변 정세, 자재 보급 경로, 공사 기간 등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며 성벽의 재건에 관한 구제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기회가 오자 평소에 생각해오던 바를 왕 앞에서 하나하나 조리 있게 제시했습니다. 느헤미야의 모습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하나님이 다 해주실 것을 믿는다고 모든 일을 무작정 벌여서는 안 됩니다. 학생이 공부는 하지 않고 기도만 한다고 성적이 올라갑니까? 사업을 하는사람이 사업은 하지 않고 기도원에만 있으면 사업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구하는 기도생활과 더불어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고 준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하는 영적인 사람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며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사용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사실 왕이 느헤미야의 요구를 흔쾌히 들어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곁에서 보좌하던 사람이 오랫동안 떠나 있으면 그 사람의 역할을 대신할 다른 사람을 뽑아야 하고 훈련시켜야 했습니다. 더구나 아닥사스다 왕은 성벽 재건 사업을 중단하는 조서를 내린 장본인이었습니다. 느헤미야에게 성벽 재건을 허락한다면 자기가 내린 조서를 취소해야 했습니다(스 4:21). 왕의 체통도 있고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왕은 느헤미야가 요구한 대로 다 들어주었습니다. 보너스로 예루살렘까지 안전하게 가도록 병거와 마병을 붙여주었습니다. 왕이 느헤미야의 요청을 허락한 이유는 평소에 느헤미야가 맡은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함으로 왕의 신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허락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며 간절히 했던 느헤미야의 통곡을 들으시고 금식을 보시고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을 회복함으로 장차 메시야가 임할 여건을 준비하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던 때가 우기가 시작되는 겨울인데 왕이 공사를 하도록 허락한 때는 3월~4월인 니산월로서 공사하기에도 적합한 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환경적인 조건까지도 배려하셨습니다. 이러한 형통을 느헤미야는 어떻게 보았습니까?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였다고 확신했습니다. 자기가 열심히 기도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계획을 잘 세우고 왕을 잘 설득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우셨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형통할 수 없고 설령 이루어지는 것 같아도 제대로 되지 못합니다. 내게 있는 문제들이 해결될 때 내가 잘해서 운이 좋아서 된 것으로 생각합니까?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다가 그것이 이루어지면 언제 그랬느냐 싶게 마땅히 드려야 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감사드리는 것 게을리 하지는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 (출 20:5)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될 영광이 다른 신에게나 사람에게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의 모든 일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비결입니다.

나가면서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벽 재건이라는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넘어야 할 장벽이 너무 많았습니다. 정치적인 여건, 지리적인 여건, 경제적인 여건, 어느 것을 보아도 만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신의 경험과 직위와 권력을 의지하지 않고 먼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께 넉 달 동안 무릎을 꿇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실 때까지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단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면 아주 신속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이런 지혜는 지속적인 기도를 통하여 얻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줄 아는 지혜를 주셨기에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감각과 더불어 일을 수행하는 추진력을 가진 균형 있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들과 더불어 일하기 원하십니다. 느헤미야에게 은혜를 베푸신 좋으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그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2024년도 교회 표어가 ‘참된 개혁을 이루는 교회’입니다. 우리의 상황으로 볼 때 참된 개혁을 이루어내는 것이 결코 만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당회원들을 비롯한 온 교우들이 하나가 되어 타성을 버리고 믿음과 열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라 불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팔로마한인교회를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들이라고 불려야 합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들이 느헤미야와 같이 자기의 삶에 충실하며, 항상 기도하며, 쓰임 받을 준비를 하며, 받은바 은혜를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선한 손을 경험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