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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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4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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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마 2:1-12


오늘은 성탄감사주일입니다. Christmas = Christ(그리스도) + mas(예배).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성탄절이 존재하기에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탄절은 우리끼리 즐거워하며 만족해하는 연례행사가 아니라 동방박사들이 구세주의 탄생을 목격하고 받았을 그런 감동을 경험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 중에 기다리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는 1장과 2장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소개합니다. 1장에서는 계보를 통해 예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알려줍니다. 또한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기 위하여 오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의 임재는 예루살렘을 넘어 이방에까지, 예수님 당시를 넘어 세상 끝날까지 이어질 것입니다(마 28:18-20). 2장에서는 예수님을 왕으로 오신 메시아로 소개합니다. 본문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구약 예언의 성취 두 번째 사건을 다룹니다.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하러 왔습니다. 비록 박사들은 이방인들이었지만 그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와 경배하는 모습을 통해 참된 예배자의 자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동방 박사들의 예루살렘 방문(1-2절)
1절은 “예수께서 나신 후에”로 시작합니다. 이는 본문이 1:18~25과 이어지고, 동방 박사들이 오기 전에 예수님이 이미 태어났음을 알려 줍니다.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이유는 갈릴리의 베들레헴(스불론 땅, 수 19:15)과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본문에서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이 4번씩이나 언급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다윗의 고향에서 탄생하셨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헤롯왕 때’를 밝힌 것은 역사적인 시기를 말하려는 것이기도 하지만, 2절의 ‘유대인의 왕’과 대조하면서 참왕이신 예수님이 새 시대를 여셨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헤롯왕은 주전 37년경에 로마에 의해 유대의 왕으로 임명되어 주전 4년에 죽을 때까지 다스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롯 대왕이 죽기 전에 태어나셨습니다. 헤롯이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죽이라고 한 것을 보면 박사들이 방문한 시기는 아기 예수가 태어나고 제법 시간이 경과했을 때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박사들의 출현을 ‘보라’라는 의미인 ‘이두’라는 감탄사로 시작합니다. ‘보라 동쪽으로부터 온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등장했다’입니다. 먼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찾게 된 것에 대한 놀라움을 암시합니다. ‘박사’로 번역된‘마고이’는 본래 페르시아의 제사장을 가리키는 말에서 기원해 ‘지혜로운 자’또는 ‘점성술사’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문맥을 볼 때 점성술사로 여겨집니다.

1절은 헤롯왕을 언급하는데, 2절은 그와 대조되는 유대인의 왕을 언급함으로써 ‘태어나신 이’가 헤롯의 자손이 아니고, 헤롯은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두메 출신 헤롯은 유대인 어머니와 에돔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정통 유대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세력을 등에 업고 유대의 왕이 되었기에 유대인들은 헤롯의 왕권에 거부감을 가졌습니다. 헤롯은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아내, 장모, 심지어 자신의 아들들까지 죽인 잔인한 인물이었습니다. 박사들은 자신들이 ‘동방으로부터’왔음을 밝힙니다. 동방의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언급했다는 사실과 메시아의 출생지에 대해서 물어보았다는 것은 그들이 이방인임이 분명합니다. 가까이 있는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아내지 못했는데, 멀리 있는 이방인들이 이를 알고 별을 따라 찾아왔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별을 좇아 온 박사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에 그곳 사람들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신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별을 보고서 그에게 경배하러 왔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특이한 별을 ‘그의 별’로 인식했습니다.

별 생각 없이 한 말이 잘못 전달이 되거나 오해를 일으켜 엉뚱한 방향으로 일이 전개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식이나 경험에 따라 행동하다가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문을 보니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박사들이 그랬습니다. 별의 인도를 받으면서 유대까지 왔으나 박사들이 예루살렘 성으로 간 것은 유대인의 왕이 당연히 왕궁에서 태어날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이 말로 인해 헤롯왕은 물론 온 예루살렘 성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 한마디 때문에 아기 예수는 부모와 함께 애굽으로 도망가야 했고 아기 예수와 비슷한 시기에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서 태어났던 많은 사내아이들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헤롯왕의 반응(3-4절)
3절은 접속사 ‘그러나’로 시작하면서 박사들의 태도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반응을 대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박사들의 말을 들은 헤롯과 온 예루살렘은 몹시 소동했습니다. ‘소동하다’로 번역된 ‘타랏소’는 두려움 속에서 당황해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헤롯왕은 자기 외에 새로운 왕이 났다고 하니 소동했을 것이고, 온 예루살렘은 헤롯의 난폭한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새로운 왕의 출현 소식이 유대 사회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헤롯왕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 놓고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라고 묻습니다. ‘물으니’가 미완료 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황한 헤롯이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는지 계속해서 물었다는 것입니다.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였는데 헤롯이 ‘그리스도’로 물어보는 것을 보면 헤롯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실 이를 메시아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메시아의 베들레헴 탄생 예언(5-6절)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헤롯왕의 질문에 그리스도가‘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지체 없이 대답합니다. 마태는 미가 5:2과 삼하 5:2을 일부 수정하고 조합해서 메시아 탄생 예언 구절로 인용합니다. 베들레헴은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아 탄생지로 생각하던 곳이었습니다(요 7:4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미 5:2).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삼하 5:2).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에서 ‘작다’는 ‘열등하다, 중요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강한 부정어가 뒤에 나와서 ‘결코 열등하지 않다’라는 뜻이니 베들레헴은 아주 중요한 곳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다스리는 자’로 번역된 ‘헤게몬’은 ‘통치자’라는 뜻입니다. 베들레헴에 가장 위대하신 통치자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탁월한 성경 지식으로 메시아 탄생 장소까지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언급은 거기까지입니다. 메시아 탄생에 관한 예언을 알려 주면서도 정작 그들은 메시아의 탄생 소식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박사들은 별을 따라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왔지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메시아가 태어날 장소를 알면서도 찾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말씀이 이끄는 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대적할 수 있습니다.

헤롯왕의 계략(7-8절)
메시아 탄생 장소를 확인한 헤롯은 가만히 동방 박사들을 불러 아기 예수의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하게 물었습니다. 박사들은 아마도 헤롯의 요청이 있기 전까지 예루살렘에 계속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을 ‘가만히’부른 것은 ‘비밀리에’불렀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헤롯에게 무슨 계략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나중에 헤롯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에 있는 사내아이를 두 살 아래로 모두 죽였다는 것으로 보아(2:16) 박사들은 별이 나타난 때와 관련해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을 헤롯에게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헤롯은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그를 찾게 되면 반드시 그와 관련된 정보를 자신에게 달라고 하며 자신도 가서 ‘그 아이’에게 경배할 의향이 있다고 합니다. 헤롯은 종교적인 경건을 가장하여 박사들을 자신의 계략에 이용하려 했습니다. 헤롯은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가만히’라는 표현이 마태복음에 2회 사용되었는데, 한 번은 요셉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1:19). 요셉은 가만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의 일을 행한 반면, 헤롯은 가만히 자신의 생각을 따라 음모를 꾸몄습니다.

동방 박사들의 경배(9-11절)
동방 박사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가다가 문득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나타나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하나님이 별을 통해 박사들을 인도하심으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시고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이끌고 계심을 보여 줍니다. 그러다가 그 별이 아기가 있는 곳에 멈춰 섰습니다. 먼 길을 왔는데 드디어 별의 임자를 만나게 되니 박사들은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였습니다. 10절의 동사는 ‘기뻐하다’이고, 목적어는 ‘기쁨’입니다. 형용사는 ‘큰’이고 부사는 ‘매우’입니다. 기쁨을 표현하는 단어들을 함께 모아놓았습니다. 그 아기를 하늘이 보내 준 왕으로 여겼기에 그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멀리 이방에서 온 박사들이 메시아의 나심을 알고 와서 기뻐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가까이 있던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메시아가 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소동을 벌였습니다. 박사들은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했습니다. ‘경배하다’로 번역된 이 용어는 ‘무릎 꿇고 예배하다’라는 의미로 마태복음에서 13회나 사용됩니다. 박사들의 고백은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이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예배의 대상이 됨을 상기시킵니다. 박사들은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립니다. 그것들은 왕이 받기에 합당한 예물입니다. 그들이 아기 예수께 예물을 드리는 모습은 열방이 메시아에 의해 복을 받고 시온으로 인도될 때 참되신 왕께 예물을 가져와 경배하리라는 구약 예언의 성취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시 72:10-11). “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사 60:5). 온 세상을 구원하실 왕이신 예수님은 모든 민족과 만왕이 엎드려 드리는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동방 박사들의 귀향(12절)
하나님은 박사들에게 꿈을 통해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지시하십니다. “지시하심을 받아”는 종종 신적 계시, 명령, 경고를 나타낼 때 쓰입니다. 헤롯은 박사들에게 아기 예수에 관한 정보를 얻어 아기를 죽이려 했지만, 하나님이 그의 계략을 막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관하고 계심을 보여 줍니다. 박사들은 다른 길을 선택해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에 들러 헤롯을 만났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아기 예수가 어디에 있는지를 헤롯에게 알려 주었을 것이고, 헤롯은 당장 그곳으로 달려가 아기 예수를 죽였을 것입니다.

우리의 자세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와 경배하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 직접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구약 성경에는 예수님의 탄생 장소(미 5:2), 고난(시 22:6-8), 부활(시 16:10), 승천(시 68:18) 등이 예언되었는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그 예언들이 하나씩 성취되어갑니다. 메시아가 오실 것을 이사야가 이미 700년 전에 예언하였지만 막상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한 사람들은 구약 성경에 능통한 종교 지도자들이나 근처에 살던 예루살렘 사람들이 아니요, 하나님의 언약과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방인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별의 한 징조'를 통하여 유대인의 왕이 나심을 알게 된 후 많은 시간과 재물을 들여 먼 길을 왔습니다. 그들이 힘든 여행을 견뎌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별의 임자를 직접 찾아가서 예배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별의 인도를 따라 아기가 있는 집까지 왔을 뿐 아니라 그 집에 들어가 아기 예수를 보고 경배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수고를 기억할 때 거리가 멀다, 바쁘다, 피곤하다, 갈 기분이 아니다 등등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사 55:6).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우리의 희생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 주님을 인해 기뻐합니다
생각대로 일이 잘 풀리고 형편이 나아지는 것이 세상에서는 기쁨의 이유가 되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가장 큰 기쁨의 이유가 됩니다. 고난과 역경이 우리의 기쁨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박사들이 예루살렘을 나섰을 때 동방에서부터 보던 별이 다시 나타나서 그들을 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약 5마일 정도 떨어졌습니다. 그 별이 아기 예수가 계신 곳에 이르러 멈추었을 때 박사들은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표현합니다(눅 2:10). ‘큰 기쁨’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슥 2:10). 주일은 주님을 기뻐하는 날입니다. 주일은 주 안에서 기뻐하는 날입니다. 주일은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를 드리는 말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면서 주님만이 주시는 위로와 평강을 누리는 날입니다.
- 주님만을 높입니다
살아가면서 사업의 어려움, 문제를 일으키는 자녀, 외로움, 슬픔 등등 다양한 문제들이 생깁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이 주님을 찾는 목적이 되어 버릴 때 문제가 해결되면 주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충성, 헌신, 봉사라는 단어들은 생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며 그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구해야 합니다. 박사들은 마리아가 아기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으나 예수님에게만 경배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기에 존경의 대상이 될 수는 있으나 경배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를 보고 엎드렸습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시 95:6). 주님 앞에 나오는 자는 만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겸손히 엎드리며 경배해야 합니다.
- 주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박사들은 귀한 예물을 미리 준비하여 먼 여행 중에도 정성껏 간직했습니다. 그들이 마침내 아기 예수를 찾아 경배한 후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초대 교부들은 황금은 예수님의 왕권, 유향은 예수님의 신성, 그리고 몰약은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세 가지 예물은 다 왕에게 드리기에 적합한 것이었습니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올 때 많은 금을 가지고 왔습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니 수행하는 자가 심히 많고 향품과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낙타에 실었더라”(왕상 10:2). 이사야는 종말에 있을 일을 예언합니다.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사 60:6).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마 15:23)과 장례(요 19:39)에서 몰약이 사용되었기에 그것이 예수님의 고난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만 구약성경에서 몰약은 도리어 기쁨과 축제의 상징이었습니다.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아 4:6).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가진 시간이나 물질이나 달란트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주님께 무엇을 드리기 원합니까? 내가 가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무엇입니까?
- 주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베들레헴에 오기 전 박사들이 헤롯에게서 메시아로 태어난 아기를 찾으면 자기에게 그 장소를 알려달라고 부탁 받았을 때 박사들은 헤롯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헤롯의 말대로 따르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사들은 꿈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길을 통해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박사들의 순종을 통해 예수님의 생명이 보존됩니다. 예배를 드릴 때만 하나님께 순종하고 교회당 안에서만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고 난 후의 삶도 예배의 연장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또한 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만난 기쁨 속에 마냥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베들레헴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은 결코 세상을 등지고 우리끼리만 은혜의 기쁨을 누리고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도들에게 위임된 사역의 터전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체험하면 할수록 그 은혜에 힘입어 세상을 향해 나아가 나누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를 오랫동안 기다려왔습니다. 기다리던 메시아가 왔으니 얼마나 기뻐했어야 합니까? 그런데 메시아의 오심이 왕권에 집착한 헤롯에게는 불안으로 나타나고, 먹고살기 힘든 백성들에게는 앞으로 있을 갈등을 예상하며 소동으로 나타나고, 성경 내용을 그저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무관심으로 나타났습니다. 본고장 유대인들의 안타까운 모습은 멀리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 찾아와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는 박사들과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는 상관없이 보이는 이방인 박사들이 도리어 가장 크게 기뻐하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왕에게 귀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만 예루살렘 사람들이 소동한 것이 아니라 생애의 마지막 때 즉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을 때에도 온 예루살렘 성 사람들이 소동했습니다(마 21:10).

성탄절은 주님만이 주목을 받으셔야 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절기가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께 온 마음을 다해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준비한 선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주님께서 성탄절에 저와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참다운 경배자들의 모습입니다. 베들레헴의 의미는 풍요를 상징하는 떡집입니다. 그런 베들레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사 시대를 거치면서 나오미와 룻이 살던 때에 기근으로 풍요롭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베들레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게 하심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풍요를 베풀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 하십니다. 자기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선한 목자가 되셔서 생명과 풍성한 삶을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팔로마 한인교회가 이 시대의 베들레헴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면에서 풍성하고 풍성하게 베푸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은혜롭고,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하고, 기도가 뜨겁고, 열심히 섬기고, 나누는 음식도 베푸는 사랑도 풍성해야 합니다. community를 섬기고 열방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죄를 대신하여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먼저 우리 마음의 보배합을 열어야 합니다. 물질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과 정성을 아울러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헌신은 주님이 기억하시는 헌신이 되고 향기로운 예물이 됩니다. 주님께 대한 바른 경배자의 자세를 회복함으로 기쁨을 누리고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그리고 풍성하게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