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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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12-17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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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마 1:18-25


예수님의 탄생 스토리는 한정되어 있고 대림절 기간에 자주 다루기에 스토리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살아있는 말씀인지라 말씀을 대할 때마다 주시는 은혜가 새롭습니다. 또한 같은 메시지를 전해도 말씀을 받는 자들의 상황에 따라 반응이 다르고 열매가 다릅니다. 오늘도 우리는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받아야 합니다. 마태는 족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난 분임을 언급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이 구약의 메시아 예언의 성취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구속 드라마에 부모 역할을 감당할 자들로 평범한 시골 총각처녀인 마리아와 요셉을 택하셨습니다. 16절에 의하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요셉을 낳았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님이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 여자들은 재판의 증인으로 설 수 없었고 인구조사 할 때 숫자에 들지 못할 정도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회적인 상황에서 마리아를 ‘요셉의 아내’로 소개하지 않고, 도리어 요셉을 ‘마리아의 남편’으로 소개하는 것은 상당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16절에 대한 설명으로서 마리아의 아들이 어떻게 공식적으로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었고 요셉이 예수님의 법적인 부친이 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 기사가 누가복음에도 나오지만, 누가복음은 마리아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어야 하고,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 되려면 예수님의 법적인 아버지가 다윗의 자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이 요셉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면서도 성탄절에 상대적으로 주목을 적게 받는 편입니다. 요셉이 목수였다는 것 외에는 복음서에서 그의 생애에 대하여 별로 언급이 없고 요셉이 한 말이 한 마디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태는 요셉이 마리아와 약혼 관계에 있었고 그가‘의로운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이란 무엇인지, 하나님이 의로운 요셉을 통해 어떻게 일하셨는지 살펴봅니다. 또한 요셉의 순종을 통하여 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정리해보면서 그분을 바로 알고 그분과 동행하는 의미 있는 성탄절을 맞이하기 원합니다.

요셉의 등장(18-19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라는 표현을 통해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에 대해 언급합니다. ‘나심’은 헬라어로 genesis, 즉 ‘출생’, ‘족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1절에서는 ‘족보’로 번역됩니다. 마태는 동일한 단어를 반복함으로써 17절까지 서술한 족보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마무리됨을 강조합니다. 한 가정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아이의 출생이 그 가정에 큰 기쁨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는 과정은 자칫하면 스캔들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한 상태였습니다. 당시의 약혼은 지금보다 더 강한 법적 구속력이 있었습니다. 일단 약혼을 하면 육체적 관계를 갖지 않지만, 서로를 아내와 남편으로 간주했습니다. 약혼 중에 남자가 죽으면 여자는 과부로 여겨졌고, 파혼을 하려면 파혼 장을 줘야 했습니다. 약혼 상태는 보통 1년간 지속되었고, 그 기간에 다른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은 간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요셉도 마리아를 데려올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입니다. 어떤 경위로 드러났는지 알 수 없지만,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태는 그 소식을 한 줄로 적고 있습니다.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성령으로 잉태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로 잉태된 것을 나타냅니다. 이삭과 삼손, 사무엘 등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로 출생했지만 성령으로 잉태된 것은 아니었고, 그들은 모두 자연법에 의해 출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선물이기에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그저 하나의 기적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성령을 통해 잉태된 사실을 천사를 통해 직접 들었지만, 요셉은 아무 것도 전해들은 것이 없으니 당연히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 리가 없는 요셉은 마리아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고 그녀와 함께 미래에 꾸밀 가정에 대한 단꿈이 와르르 무너지는 안타까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요셉이 경험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종종 우리의 이해를 초월해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놀라움과 충격으로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기가 막힌 상황에서 요셉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갑니까? 약혼녀가 자신과 아무런 육체적 관계를 갖지 않았는데 애가 생겼으니, 마리아가 간음을 범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셉이 배신감을 느껴서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공개적으로 떠벌린다면 마리아는 수치를 당하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의 규례에 따르면 결혼 전 간음이나 그에 따른 임신이 발견되면 약혼이 파기될 뿐 아니라, 그 여인은 율법의 규정대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습니다(신 22:22-24). 물론 예수님 당시 로마 치하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사형 판결권과 집행권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이혼하는 것으로 처리해야 했습니다. 그럴지라도 마리아는 파혼을 당할 뿐만 아니라 평생을 수치 속에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조용히 약혼을 파기하고자 합니다. 마태는 이런 요셉을 ‘의롭다’고 평가합니다. 당시 유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요셉의 행위는 도리어 죄를 덮어 주는 불의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의로움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구하는 것을 의로 여기십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구하시려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요셉의 행동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는 덕이며, 인간에 대한 애정이고 약한 자를 배려하는 자비심입니다. 정의를 빙자해 자기의 분노를 표출하고 복수심에 불타 분풀이 하는 것을 하나님은 결코 ‘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참된 ‘의’는 하나님의 ‘헤쎄드’를 반영하는 사랑과 덕을 나타내는 자비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정의와 사랑을 겸비한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요셉이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해결하려 하는 데에서 요셉의 사랑이 보입니다. 그가 만일 율법을 지켜 죄를 드러낸다면 마리아는 돌로 쳐 죽임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끊고자 하여”라는 말에 요셉의 정의가 드러납니다. 그는 율법을 무시한 채 마리아의 허물을 그대로 덮어 두려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로 선택받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의 자질이나 성품에 달려 있지 않고 전적으로 그분의 주권적인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질이나 성품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선한 도구가 됩니다.

주의 사자의 현몽(20-21절)
고민에 빠져 있다가 지쳐서 잠들어 버린 경험을 한두 번쯤은 해 보았을 것입니다. 요셉도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고민에 빠져 있는 요셉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꿈을 통해 천사가 요셉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도록 하십니다. 개역개정에는 번역이 생략되어 있으나 헬라어 원문에는 “보라”(behold)라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거나 극적 반전을 꾀할 때 사용합니다. ‘요셉이 이런저런 생각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압니까? 보시오.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났습니다.’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꿈을 계시 수단으로 사용하실 때가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으로 불린 요셉이 꿈에서 천사를 만난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천사의 뜻은 messenger, 즉 메시지를 전달하는 심부름꾼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다윗의 자손’이란 칭호는 주로 예수님에게 사용되는데, 본문에서는 요셉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마리아가 낳게 될 예수님이 족보상 다윗의 혈통에서 나오게 될 메시아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다윗 왕조는 이미 멸망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다윗 왕조가 없어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다윗 왕조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고 예수님의 법적인 아버지이기에,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 되시는 것입니다.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두 가지를 명령하는데, 첫 번째는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문장은 문자적으로 ‘마리아를 너의 아내로 취하기를 무서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사의 해명으로 인하여 마리아의 수치가 벗겨지고, 요셉의 의심이 풀리게 됩니다. 요셉에게 주어진 두 번째 명령은 마리아가 낳을 아들의 이름을 ‘예수’로 지으라는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면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면서 이름을 짓습니다. 이름에는 부모의 소망과 기도가 담깁니다. 본문에는 아이 이름에 관한 언급이 세 번 반복됩니다(21,23,25). 이는 아버지 요셉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예수님이 그의 아들이며 다윗의 자손임을 확실히 하려는 것입니다. 21절 하반절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는데, 그 아들의 이름이 ‘예수’이어야 하는 이유와 그가 어떤 사역을 감당할지 설명합니다. ‘예수’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여호수아’를 반영합니다. 예수님의 사명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임을 마태복음 첫 부분에서부터 밝힙니다. 물론 예수님의 사명은 1세기 유대인들이 메시아에게 가졌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메시아에 관한 예언은 크게 두 줄기가 있습니다: 왕 되신 메시아와 고난 받는 메시아.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면 이방의 압제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회복시키고 다윗의 영광스러운 왕국을 재건하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백성’의 헬라어 인 ‘라오스’는 주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28:18-20에서‘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에는 모든 민족으로 그 범위를 넓힙니다. 따라서 주의 사자가 말하는 ‘백성’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포함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우리를 어떻게 죄에서 구원하십니까? 마 20:28에 의하면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줌으로써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구약 예언의 성취(22-23절)
마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심과 예수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 구약에 예언된 말씀의 성취라고 선언합니다. 성령에 의한 예수님의 잉태를 이사야 7:14과 연결시킵니다. 이사야 7장은 주전 735년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해 유다를 공격했던 상황을 역사적 배경으로 합니다. 이때 여호와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유다 왕 아하스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에 관해서 한 징조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 징조는 한 역사적 인물의 탄생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예언은 당시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구원자의 탄생도 아울러 계시합니다. 본래 이사야 7:14에 사용된 ‘알마’는 ‘젊은 여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처녀’를 의미하는 단어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70인역에서 ‘파르쎄노스’로 번역되면서 ‘처녀’를 의미하는 단어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마태는 메시아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근거를 70인역에서 찾아낸 것입니다. ‘임마누엘’은‘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과 ‘예수’라는 이름이 어떻게 연관됩니까?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에서 ‘그들’은 21절에서 말한 ‘자기 백성’으로, 예수님을 임마누엘로 인정함으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심을 알게 될 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체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기에 우리와 함께 사시면서 모든 인생의 문제를 몸소 경험하셨고 인간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에 담긴 구체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까지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임마누엘은 마태복음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 주제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 마태복음의 마지막 문장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입니다. 승천이야기 대신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약속으로 끝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인류 역사상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일회적인 사건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셉의 순종(24-25절)
요셉은 마리아와 어떻게 헤어질까를 고민하였지만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요셉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주의 사자의 말에 의하면 요셉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였다고 합니다. 성령에 의한 잉태를 제대로 믿지 못했거나 무엇인가 돌아가는 상황이 두렵게 여겨졌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사자의 분부를 듣고 요셉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때에는 방황하고 고민했으나 일단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자 더 이상 고민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즉시로 순종합니다. 물론 요셉은 예수님의 구속 드라마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순종할 뿐입니다. 요셉은 꿈에 주의 사자가 그에게 명령한 것 두 가지를 지켜 행합니다. 첫째, 마리아를 그의 아내로 맞이합니다. 천사들과 대면한 이후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을 확신한 요셉은 마리아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옵니다. 그 결과 마리아는 정식으로 요셉의 아내가 됩니다. 마태는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라는 문장을 추가로 기록합니다. 이러한 요셉의 행동은 사려 깊음과 의로움을 나타낼 뿐 아니라 마리아가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못하게 하는 증거가 됩니다. 당시 마태복음의 독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통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이 표현은 예수님을 낳은 후에는 다른 여자들처럼 부부관계를 가졌음을 암시합니다. 둘째, 마리아가 아들을 낳자 그 이름을 ‘예수’로 짓습니다. 이로써 요셉 자신이 예수님의 아버지 됨과 동시에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임을 확증합니다. 마태복음 1장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요셉의 순종으로 끝맺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 여부와 상관없이 말씀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순종할 때 기뻐하시며 우리의 순종을 통해 말씀을 이루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경건한 요셉의 역할이 필요했듯이 오늘도 요셉과 같은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이해와 감정을 초월하여 자발적으로 희생하고 순종하고 봉사하고 절제하는 것이 믿음을 가진 성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긴 결과 아담 아래 태어난 모든 인류는 원죄를 안고 태어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하나님 앞에 모두 죄인입니다. 그런데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죄를 지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죄인을 대신하여 당신의 아들이 대신 죽는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롬 5:8). 그런데 예수님이 당신의 생명으로 죄인들의 죗값을 치르시기 위해서는 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담 아래 태어나시지 않고 동정녀의 몸을 통해 성령의 잉태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죄 아래 태어나셨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의 죄를 없애기 위한 대속의 죽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탄생 스토리의 핵심은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분 앞에 우리 죄를 고백하고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받아들일 때 구원이 임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케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에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라고 모세에게 명령하신 적이 있습니다. 죄악으로 가득한 인생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친히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서 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하신 완전한 하나님이자 죄가 없으신 완전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 ‘독생자’로 부르는데, 이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자 사람과 함께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구원 사역을 이루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자세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 하나님의 사랑을 품은 의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의인입니까? 착한 사람? 순진한 사람? 법 없이도 살 사람? 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만족시키는 사람, 즉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의롭다는 것은 모세 율법대로 행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임신했으니 마리아는 신부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것으로 생각하여 요셉은 율법에 따라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은 대인 관계에도 덕을 세웁니다. 요셉은 분노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마리아가 어떻다고 떠벌이며 창피를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의로운 요셉은 기가 막힌 상황에서도 마리아를 배려했습니다. 여성의 존엄성이 무시되던 때에 요셉이 취한 행동은 시대를 앞서가는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어떤 이유로 인해 이웃과 불편한 관계를 가진 분들이 있습니까?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이유가 어떻든 무거운 짐을 새해까지 끌고 가서는 안 됩니다.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흐트러지거나 어색한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그 큰 사랑과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의 영혼이 구원을 받도록 힘쓰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때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였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또한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을 것을 명하면서, 그 아이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구원자, 곧 메시아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메시아 예언의 성취라고 했습니다. 잠에서 깨어 일어나자 요셉은 즉시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왔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시는 전능자이심을 믿었기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이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의심치 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진정 우리도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주어진 약속의 말씀 앞에 온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아름답게 쓰임 받아야합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위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기념하는 성탄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나가면서
성탄의 의미가 점차로 퇴색되고 세속주의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오는 때에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성탄절이 존재하는 유일한 근거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에 관해 하나님은 ‘내 백성이 나를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호 4:6)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문제이며, 구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이 성탄절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우리의 지식이 더욱 풍부해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아픔과 슬픔과 필요를 이해하시고 함께 나누시고 해결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과정에 마리아와 요셉의 결단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처녀로서 아기를 잉태한 마리아와 그 마리아를 데려오기로 결심한 요셉처럼, 때로는 고난과 오해와 수치와 모욕까지도 당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아 의인으로 칭함을 받았고,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본받아 예수님을 닮아 가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품은 의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을 품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이란 이름은‘하나님이 더하신다’는 뜻을 가집니다.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따라 행하면서 가정과 사역과 사업 위에 때마다 시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이 더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