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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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2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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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도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1월 중순으로 접어듭니다. 일 년 중 어느 달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은 달이 없지만 11월은 특별히 감사의 달로 정해져 있습니다. 감사하는 이유에 대해 말할 때, 건강해서 감사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어 감사하고, 좋은 가정을 주셔서 감사하고, 아이들 잘 자라서 감사하고, 좋은 직장을 주셔서 감사하고, 좋은 동료와 이웃과 교회를 주셔서 감사하고 등등. 하지만 이런 것들로만 감사를 한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할 사람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입니다.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을 경험했고,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경험했습니다. 그 사이에도 블레셋, 미디안, 암몬, 앗수르 등의 주변 민족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지라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지키셔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시편 107편은 바벨론 포로 귀환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편에서 하나님이 다양한 고난의 상황에 처한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죄의 종으로 살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는 단순히 이스라엘을 향한 권면을 넘어서서,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고난 속에서 헤쳐 나가는 비결을 배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라(1-3절)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벗어나 가나안 땅으로 귀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하면서 107편을 시작합니다. 개역개정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히브리 원문을 보면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가 두 번 나옵니다. 두 가지 감사 이유를 제시합니다. Oh, give thanks to Yahweh, for (he is) good, for his mercy (endures) forever. ‘선하심’은 하나님의 본성 중의 하나입니다. 히브리어로 ‘tov’인데 창세기 1장에서는 ‘좋았더라’(1:10)로 번역됩니다. ‘인자하심’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인데 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변찮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와 죄악으로 물든 자기 백성을 다른 나라로 흩으신 후에 그들에게 출바벨론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들을 위해 속량, 즉 값을 대신 치르시고,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 그들을 모으셨습니다. 시인은 구원의 은혜를 입어 돌아온 그들에게 하나님께 감사할 뿐 아니라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말하라고 요청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단순히 예수 믿고 천국에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정, 건강, 직장, 사업, 교회 등 모든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해결되고 풀리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구원입니다. 이혼 직전까지 갔던 부부가 화목해집니다. 오랫동안 시달리던 질병에서 치유가 됩니다. 다니던 직장에서 lay-off 당했으나 새로운 직장을 구합니다. 사업을 하다 파산상태에 이르렀으나 극적인 회복을 경험합니다. 서먹서먹했던 인간관계가 회복이 됩니다. 이렇듯 역경 속에서 구원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자기가 잘해서, 운이 좋아서 된 것으로 알고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돌리거나 감사하지 않고 슬그머니 넘어가든지 자기의 공로로 모든 일이 된 것같이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때문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감사할 만한 조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께 근거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살전 5:18)고 말했습니다. 형편과 처지에 상관없이. 내 뜻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상관없이 감사해야 합니다. 성도는 값없이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구원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소망 없던 삶에서 생명과 복을 누리는 삶으로 바꾸어 주신 은혜를 만민에게 전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체험한 구원(4~9절)
첫 번째 고난의 장소는 광야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광야 사막 길에서 소망의 보금자리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던 때를 연상시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가나안으로 귀환하는 여정에서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 사막 길에서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해 방황했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다 보니 배고프고 목마르며 영혼도 피곤했습니다. 피곤하다는 것은 육체적인 피곤뿐 아니라 재앙이나 고통, 슬픔으로 인해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상태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그때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광야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바른길을 보여 주시고 거주할 성읍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죽음의 광야에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권합니다. 주님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고,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을 채우십니다. 인생의 광야를 지난다고 생각합니까? 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기도의 자리로 겸손히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간절하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도 광야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우리 영혼이 피곤해집니다. 그런데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는 광야 길을 헤쳐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인생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모하는 자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만큼 은혜가 채워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에게 생명수를 부어 주십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사 55:1). 예수님은 목마른 자들에게 영원한 생수가 되십니다(요 7:37-38).
흑암에서 체험한 구원(10~16절)
10절에서는 고난의 장소가 ‘흑암’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죽임을 당하고 사슬에 매여 어둠 속에 앉아 한숨짓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한 결과입니다.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죄인이 감옥에 들어앉은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가 낯선 곳에서 살아가게 된 상황을 비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통 가운데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겸손’이란 도덕적인 덕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천의 의미를 가집니다. 따라서 12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을 받았고,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가장 비천한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엎드러졌다’는 표현은 헛디뎌 넘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갑자기 기절해 쓰러진 것처럼 위급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엎드러졌는데 아무도 그들의 생명을 귀하게 여겨서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환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해 내시고 그들을 얽어 맨 줄을 끊으셨습니다. 시인은 구원의 놀라운 은혜로 인해 놋문과 쇠빗장을 깨뜨리신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합니다.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길은 날마다 찬송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 가운데 거하시고. 그 삶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으로 채우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도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있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복된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삶에 있습니다. 불순종하면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고통 중에 부르짖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복함으로써 복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질병에서 체험한 구원(17~22절)
어리석은 자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합니다(시 53:1).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멸시하고 자신의 악한 욕망과 본성대로 삽니다. 하나님은 죄악의 길을 가는 자들을 반드시 징벌하십니다. 인간에게 질병과 죽음이 찾아온 것은 죄 때문입니다. 죄는 건강을 잃게 하고 생명을 위태롭게 만듭니다. 병이 심해지다 보니 입맛도 없고 먹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고통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하나님은 그들을 고통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말씀을 보내셔서 고치셨습니다.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셨습니다.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을 보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고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감사제’는 화목제의 일종입니다. 이 제사의 특징은 제사를 드리고 제사장에게 준 몫을 제외한 나머지를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영과 육의 질병으로 고통 중에 있다면 치유의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이 행하신 일을 찬양해야 합니다. 찬송과 감사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찬송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온 세상에 드러납니다. 우리의 삶에 찬송이 그치지 않을 때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우리는 주님이 동행하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풍랑 이는 바다에서 체험한 구원(23~32절)
이번에는 고난의 현장이 바다로 바뀝니다.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란 바다에서 ‘해상 무역’을 주로 하던 이들을 가리키는 듯합니다(왕상 9:26-28, 대하 20:36). 이는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자 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니 광풍이 일어난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섭리로 바다에 갑작스런 변화가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이 표현으로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와 주재자이심을 나타냅니다. 배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과 기이한 일들을 바다에서 보았습니다. 광풍이 부니 파도가 높이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파도가 높은지 배가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두려움으로 인하여 그들의 영혼이 녹을 정도였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이리 구르고 저리 굴렀습니다. 마치 술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고, 두려움으로 인하여 정신이 나간 자 같았습니다. 이는 바벨론과 같은 외세의 침입으로 인하여 온 나라가 극도의 어려움에 빠진 상황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하나님께서 광풍과 물결을 잠재우심으로, 죽음의 지경에서 그들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사방이 고요해졌고, 평온한 바다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바라던 항구로 인도하셨습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8,15,21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권합니다. “백성의 모임에서 그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그를 찬송”하는 일은 공적으로 그분의 행하신 일을 증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찬송은 구원받은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향해 마땅히 해야 할 응답입니다. 우리 또한 인생이라는 바다를 지나야 합니다. 여정 가운데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광풍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능력과 위엄을 보이시고 우리를 위기에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평안과 기쁨 가운데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자세
시편 107편에 언급된 고난의 상황을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도 겪을 수 있습니다.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70여 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부터 해방되어 자유의 몸으로 귀향하였습니다.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구속받은 사람들을 모두 모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힘과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환난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건져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언약을 지키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받고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실제로 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사랑으로 지금도 우리를 붙드심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렇기에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그 사랑을 깨닫고 온갖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나 같은 죄인까지도 부르시고 구속하신 이 사실로 인하여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까?
- 믿음으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는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이 안 풀리고 답답한 지경에 빠질 때 하나님께 매달리게 마련입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고난 받기를 자청하는 사람은 없으나 믿는 자에게 있어 고난은 믿음이 연단되는 과정이요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됩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고통에서 건지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십니다. 죄로 인하여 흑암과 사망의 그늘, 곤고와 사슬에 매여 있을지라도 기도할 때 건져 주십니다. 병에 걸려서 음식도 싫고 사람도 싫어지는 지경에서도 기도할 때 위기를 벗어나게 하십니다. 풍랑 속에 파선 직전에 있어도 기도할 때 광풍을 잔잔케 하시고 안전한 항구로 인도하십니다. 누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까? 교만한 자가 아니라 의인들입니다. 자기의 부족과 한계를 알고 낮아져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고 마음을 여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주리고 힘겨워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 좋은 것을 공급해 주시며 참된 안식으로 인도하십니다.
- 베푸신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의 소욕을 따라 살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수와 같은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값을 지불해 주셨습니다. 우리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 살게 될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아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형편과 처지에 상관없이. 내 뜻이 이루어지든 않든 상관없이. 나를 구원해주신 그 한 가지 사실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가장 어려운 때에도 도우실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이심을 오늘도 기억하며 소망 중에 주님을 바라보며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나가면서
시편 107편에는 도저히 감사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모두 고난에 처한 사람들입니다. 광야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어두컴컴한 감옥에 갇혀 있거나, 죽음의 문턱에 이르도록 병에 걸리거나, 풍랑에 빠져 허우적댑니다. 그들 중 누가 하나님께 감사할 만한 조건을 갖고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감사할 조건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열거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선포합니다. 감사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환란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8, 15, 21, 31)하자고 권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믿음으로 부르짖는 성도들에게 광야에서 방황할 때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고,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말씀을 보내어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고, 광풍과 물결을 주관하시며 안전한 항구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2023년에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셨습니까? 그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렸습니까? 환경은 때로 우리는 누르고 낙심케 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궁극적으로 승리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인자하신 하나님은 끈질긴 사랑으로 우리를 붙드십니다. 환난 가운데서 고쳐주시고 건져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나누며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복의 전달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기도가 깊어지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고 넘치는 감사를 날마다 때마다 드려야 합니다. 모든 교우들이 우리의 믿음의 주시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과 더불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함께 지어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