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천년왕국과 최후의 심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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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0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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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계 20:7-15


제가 중학교 들어갈 때는 입학시험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합격자 발표를 라디오 방송에서 했습니다. 제 기억에는 이른 아침에 발표했던 것 같습니다. 온 가족이 일찍 일어나 라디오 앞에 모여 들려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집중했습니다. 470, 475, 478. 제 수험번호가 가까워질수록 입에 침이 마르고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러다가 486 하며 제 번호가 불리자 온 집안 식구가 일제히 함성을 질렀습니다. 반면에 그 날 자기 번호가 불리지 않은 학생이나 그 가족들은 얼마나 실망이 컸을까요? 그런데 이것과는 차원이 다른 최후의 심판 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훗날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요한복음 5:29에 의하면,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마지막에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모두 부활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신앙생활 여부가 그때의 결과를 결정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믿는 자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둘째 사망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상급은 섬김으로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을지라도 주님을 위해 섬긴 것이 없으면 주님 앞에 섰을 때 면목이 없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을 점검해서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날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 담대하게 설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계시록 20장은 최후의 심판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전반부인 7-10절에서 사탄에 대한 심판을 언급하고, 11-15절에서 둘째 사망에 대해 언급합니다. 무저갱에서 결박되었던 사탄이 천 년이 찼을 때 잠시 풀려나 세력을 모으고 성도들을 대적해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그 전쟁에 패해 영원한 심판을 받습니다. 크고 흰 보좌 앞에서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받고,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집니다. 어떤 자들이 둘째 사망에 참여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탄의 최후(7-10)
이제 사탄이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받아 영원히 멸망할 때가 되었습니다. 사탄을 상징하는 옛 뱀, 즉 용은 천 년간 결박을 당했다가 옥에서 잠깐 풀려납니다. ‘천 년이 차다’에서 ‘차다’라는 동사는 구속 역사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에 이르렀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계시록에서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가리키는 종말론적 용어로도 쓰입니다. 3절에서 언급한 무저갱을 7절에서는 ‘옥’으로 표현합니다. ‘옥’이란 명사는 ‘감시하다’는 동사에서 나온 것으로, 사탄이 무저갱에서 엄중한 감시를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옥에서 벗어나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합니다. 3절에서 용이 ‘잠깐’놓인다고 합니다. ‘천 년’과 ‘잠깐’의 상징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비록 사탄이 제한되어 있지만 마지막 때에 세력을 규합하여 최종적인 공격을 감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잠깐일 뿐입니다. 핍박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요한은 사탄이 주는 고난은 잠시요, 하나님의 통치는 천 년이요, 영원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의식으로 초대 교회를 도전하고 격려하고자 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사탄은 사람들을 박해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미혹하여 타락시킵니다. 3절에 따르면, 무저갱에 갇혀 있는 천 년 동안 사탄은 만국을 미혹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무저갱에서 풀려난 사탄은 다시 땅의 사방 백성을 미혹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죄성은 언제든지 사탄의 먹잇감이 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자신의 최후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강력하게 활동하면서 세상을 미혹할 것입니다. 미혹의 대상이 3절의 ‘만국’에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으로 좀 더 구체화됩니다. ‘땅의 사방 백성’을 직역하면 ‘그 땅의 네 모퉁이에 있는 그 민족들’입니다. ‘그 땅의 민족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에 속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곡과 마곡’은 에스겔 38~39장의 ‘곡과 마곡’을 비유적으로 인용한 것입니다. 거기서 곡은 마곡이라는 지역을 통치하는 왕인데 강력한 연합군을 형성하여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됩니다. 결과는 곡이 이끄는 연합군이 대패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열국은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임을 알게 됩니다. 이 전쟁의 모티프가 19:19-21과 이 단락에서 쓰입니다. 곧 백마 타고 오시는 예수님과 짐승이 벌였던 전쟁이 바로 이 전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겟돈 전쟁과도 맥을 같이하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이 전쟁이 3차 세계대전이 될 것이고 그 전쟁이 중동에서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물리적인 전쟁이라기보다는 영적인 전쟁으로 보는 것이 계시록의 의도에 더 부합합니다. 사탄에게 주어진 ‘잠깐’의 시간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기간’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왜 허락하십니까? 악의 세력을 마지막 파멸로 몰아넣기 위함입니다.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무리가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포위합니다. ‘성도들의 진’을 번역하면 ‘그 거룩한 자들의 진영’입니다. 성도들의 군대는 광야의 이스라엘의 진영을 상기시키며, 이는 천년의 마지막까지 영적 행군을 멈추지 말아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사랑하시는 성’은 직역하면 ‘그 사랑받는 그 도시’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면 그곳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곳입니다. 구약에서는 대개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지리적인 예루살렘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때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악의 군대를 태워 버립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우는 모습은 엘리야의 말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오십부장과 군사 오십 명을 사른 사건을 연상시킵니다(왕하 1:10). 결국 악의 세력이 도모하는 것은 모두 실패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싸우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미혹된 땅의 사방 백성은 하늘에 내려온 불에 멸망하고, 미혹하던 사탄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집니다.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는 ‘그곳에는 그 짐승과 그 거짓 선지자 둘 다 있었다’라는 뜻입니다. 짐승과 거짓 선지자에게 임한 심판이 사탄의 심판보다 먼저 일어난 것입니다. 불과 유황 못은 영원토록 괴로움을 받는 곳입니다. ‘괴로움을 받다’는 동사는 ‘고문’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죄인이 실토할 때까지 고통을 가하다’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밤낮 섬기는 반면(7:15), 마귀와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은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탄을 이와 같이 극적으로 심판하심으로 당신과 성도들의 원수를 갚으십니다. 예수님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불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마 25:41), 바로 그곳에 사탄이 던져집니다. 이렇게 최후의 전쟁은 사탄의 패배로 끝나고 그들이 공격하려던 성도들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안전히 거합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과 마귀의 권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실한 믿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성도가 싸울 싸움은 오직 믿음의 싸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흰 보좌 심판(11-15절)
악의 근원인 사탄이 불 못에 던져지고 나니, 이제 남은 것은 미혹 당한 사람들을 향한 최후의 심판뿐입니다. 흔히 ‘백 보좌 심판’이라고도 불립니다. 요한은 땅과 하늘이 사라진 텅 빈 공간에 오직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와 사탄과 짐승에게 미혹되어 이미 죽은 자들이 서 있는 모습을 봅니다. ‘크고 흰 보좌’는 여기에만 언급됩니다. 큰 보좌는 하나님의 권세와 위엄을, 흰 보좌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상징합니다. ‘그 위에 앉으신 이’는 계시록에서 보통 성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4:2에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언급되는데 6~16장에서 소개된 인, 나팔, 대접 심판을 주관하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흰 보좌에 앉으신 이는 하나님께 심판의 권한을 위임받은 심판주 그리스도로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행 10:42). 심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며(요 10:20),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늘과 땅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이 묘사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앞에 설 수 없는 세상의 불완전함을 상징할 수도 있고, 그와 동시에 최후의 심판 후에 등장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지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21:2). 죄로 오염된 피조물이 새롭게 지음 받는 것은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입니다(롬 8:19~22). 공중에 권세 잡은 자가 활동하던 옛 땅과 옛 하늘은 하나님 앞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사 51:6)라고 했으며, 예수님은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도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벧후 3:10)라고 하였습니다.

문맥으로 볼 때 ‘죽은 자들’이란 믿지 않고 죽은 자들입니다. 계시록에서 믿는 자들의 죽음을 묘사할 때는 ‘영혼’이라는 말로 묘사합니다(6:9-10; 20:4).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의 지위와 상관없이 진행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행위대로 심판하십니다(벧전 1:17). ‘큰 자들’과 ‘작은 자들’은 일종의 은유적 표현이며 세상에서 권세와 부귀와 영화를 누리던 자에서부터 소외된 자들까지 모두 망라하는 말입니다. 크고 흰 보좌 앞에서 하는 심판이 최후의 심판입니다. 더 이상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자신에게 임할 최후의 심판, 최종 판결을 기다릴 때, 얼마나 두렵고 떨리겠습니까? 그러나 그 자리에서 결과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인생의 결말은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의 내용과 열매들의 결과가 마지막 심판에서 나타납니다.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 무엇을 근거로 심판을 받게 됩니까? 요한은 보좌 앞에 두 종류의 책이 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책들’과 ‘다른 책’, 곧 ‘생명책’입니다. 생명책은 하나님 백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책으로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만 열 수 있습니다(3:5). 두 종류의 책이 펴져 있다는 것은 그때가 최종적인 구원과 심판의 자리를 구분하는 때임을 암시합니다. 이 장면은 다니엘 7:9-10을 배경으로 합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에 대한 심판은 언급되지 않고 다만 죽은 자들이 ‘자기들의 행위를 따라’심판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심판의 대상은 불신자들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죽은 자들의 행위가 기록되어 있는 ‘책들’은 생명책과 대조되어 심판의 근거를 제공합니다. 이 땅에서 행한 부끄러웠던 일들, 죄악된 행동들,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은밀한 일들까지도 낱낱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본문의 ‘책들’과 ‘생명책’은 상징적 이미지로써 사용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최후의 심판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바다와 사망과 음부가 죽은 자들을 내준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어린 양을 따르며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는 새 예루살렘이 준비되어 있지만, 짐승을 따른 자들에게 불 못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못’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얌’은 ‘미지의 곳,’‘혼란의 장소,’‘공포의 공간’입니다. 심판의 대상으로 의인화된 사망과 음부의 최종 목적지는 괴로움을 당하는 심판의 장소, 곧 두려움의 ‘불 못’입니다. 이 ‘불 못’은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19:20), 그리고 용 곧 사탄(20:10)이 던져진 곳입니다. 그러므로 ‘불 못’이란 영원한 심판에 대한 상징적 이미지입니다. 사망과 음부가 불 못에 던져진다는 것은 더 이상 사망과 음부가 필요 없음을 의미합니다. 최후의 심판 때에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으로 나누입니다. 둘째 사망이란 첫째 사망에 이어지는 영원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둘째 사망이 소위 지옥을 가리킵니다. 첫째 사망이 믿든 믿지 않든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임하는 육체적 죽음이라면 둘째 사망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들이 영원히 던져질 불못을 뜻합니다. 음부와 지옥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음부는 죽은 자의 영혼이 임시로 머무는 곳이고, 지옥은 그들이 영원토록 머무는 곳입니다. 둘째 사망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겪는 영원한 고통입니다(사 66:24; 막 9:47-48). 신자들은 이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2:11). 15절은 14절을 좀 더 보충합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도 여기 불 못에 던져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행위대로 심판을 받아 결국 불 못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의 자세
- 역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사탄이 갇혀 있던 천 년의 시간이 다 차면 사탄은 무저갱에서 잠깐 놓이게 됩니다. 그때 사탄은 악에서 나와 또다시 미혹하는 영으로 온 땅과 그 모든 백성을 불러 모아 싸움을 일으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러한 최후의 영적 전쟁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이 활동하는 시간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 전쟁은 반드시 사탄의 세력의 패배로 끝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탄의 이러한 활동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탄과 그 추종자들을 드러내시고 그들에게 완전한 패배를 안겨주시기 위함입니다. 사탄은 제대로 힘을 써 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불로 태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사탄의 패배를 지켜보게 하십니다. 그때에는 이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지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도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시간 속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당신의 계획 가운데 진행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우리가 인정하고 인내할 때, 고난의 근원인 사탄을 멸하시는 하나님을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 구원의 열매로서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계시록 20장은 최후의 심판에 관해 말합니다. 여기에서 행함은 심판의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에도 최후의 심판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0에서는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21). 행함과 심판의 관계는 계시록의 마지막 장에서 한 번 더 강조됩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22:12). 어린 양의 신부가 입고 있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이 옳은 행실을 상징한다는 것도 역시 행함을 강조합니다(19:8). 성경은 믿음과 함께 행함을 강조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약 2:26). 구원의 조건이 아닌 구원의 열매로서 행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죄인들을 위해 이 땅에 보내 주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을 힘입어 회개와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도들은 아직도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를 의지해 불법과 불의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이 잠깐 풀려났지만 세력을 규합하여 전쟁을 하려다가 패망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을 묵상하면 큰 위로가 그 안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 내게 고의적으로 상처를 주었다면 그 사람을 용서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 상황조차 바로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건의 내막을 소상히 파악하시고 우리의 속사정을 잘 알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만 주실 뿐 아니라 능히 피할 길도 주신다는 것입니다(고전 10:13). 사탄이 제한된 권세를 가지고 있고, 최종적으로 사탄을 파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일하심을 보면서 우리의 인생이 주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살다 보면 납득할 수 없는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난이 있을지라도, 아무리 위협하는 세력이 우리를 우겨 쌀지라도 우리는 사탄에 의해서 망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싸개 속에 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나가면서
17-20장에서 악의 세력(바벨론, 두 짐승, 용을 추종하는 자들)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이 모두 마무리됩니다. 크고 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심판이 사탄을 추종했던 사람들에게 임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그리스도를 거부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지위와 부귀를 누려 왔든 상관없이, 행위에 따라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는 어떤 것으로도 그들의 죄악을 가릴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 이름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영혼은 영원히 타는 불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반면에 어린 양을 따르며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는 새 예루살렘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지만 이 세상의 일들과 상황을 살피시고 관심 있게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성실하게 믿음 가운데 살아야합니다. 살아 있을 때 더욱 주의 일에 힘써야합니다. 복음을 전하여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야합니다. 주님 안에서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고전 15:58). 계시록 22:12에서 예수님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주님은 영적 전쟁을 수행할 충성스럽게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을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는가 하는 것입니다. 심판의 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점도 없이 흠도 평강 가운데 서며 주님으로부터 책망이 아닌 칭찬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