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어린 양의 혼인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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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30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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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계 19:1-10

2007년에 샌디에고에 있는 해군 기지에서 당시 교우였던 임인식 소령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도 그때 참석하셨던 분들이 계십니다. 그날 많은 교우들이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남녀를 무론하고 교우들이 그렇게 잘 차려입은 것이 본적이 없었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남자들은 양복을, 여자들은 블라우스를 입고 고급스런 장신구를 착용하고 참여했습니다. 결혼식에서는 신랑과 신부뿐만 아니라 하객들도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입습니다. 축하와 존중의 마음을 의복으로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예배드리러 올 때에 어떤 복장을 하고 옵니까? 장로님들이나 순서 맡은 분들 외에 정장을 하고 오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청교도들이 주일 예배에 참석할 때 입는 옷을 Sunday Best라고 했습니다. 그 뜻을 찾아보니 ‘Not super dressy, but still enough to look formal’이라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포멀하게 보이기에는 충분한 옷이라는 뜻입니다. 옷차림이 그 사람의 진면모를 다 보여주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향한 자세를 한 번 돌아볼 수는 있습니다. 본문을 보니 바벨론이 심판을 받은 이후, 감사와 찬송이 온 하늘에 가득 울려 퍼집니다. 바벨론의 압제로 고통당하던 성도들은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기쁨의 찬송을 드립니다. 그리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언급되는데, 그 잔치에 참여하는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습니다. 어린 양의 신부인 우리가 갖추어야 할 영적 모습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계시록은 밧모섬에 유배되었던 요한이 환상 가운데 목격한 말세의 비밀을 성도들만 알 수 있고 박해자는 알기 어려운 상징을 사용해 전달하기에 해석에 많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등장하는 숫자나 색깔, 동물, 혹은 자연 현상 등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 보다는 히브리 문학의 전통과 문맥에 맞게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1:19)라는 구절은 계시록 전체 구조를 설명해 줍니다. 1장은 ‘네가 본 것’을 다룹니다. 성자 예수님에 대해 묘사합니다. 2~3장은 ‘지금 있는 일’을 다룹니다. 좁게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상태를, 넓게는 신약 모든 교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4~22장은 ‘장차 될 일’에 대해 묘사합니다. 17장과 18장에서는 음녀, 즉 바벨론의 멸망으로 말세의 대환난이 종식되는 장면이 언급됩니다. 18장이 계시록 가운데 가장 슬픈 애가로 가득 채워졌다면, 이와는 반대로 19장은 가장 기쁜 할렐루야 찬양으로 가득합니다. 왜 하늘의 허다한 무리의 할렐루야 소리가 연이어 나옵니까? 그 이유는 주님의 다스림이 드디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이 계시록의 일관된 주제 가운데 하나였지만, 그동안 하나님 백성들에게 그다지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백성들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거대한 성 바벨론 때문입니다. 그런데 절대로 무너져 내릴 것 같지 않았던 바벨론의 무너짐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기쁨과 감격의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근거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찬양이 하늘 가득히 울려 퍼질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교회가 신랑이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가 아름다운 혼인 예식을 치를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심판에 대한 하늘의 찬송(1-5절)
1~5절은 18:20에서 바벨론의 심판을 기뻐하라는 요청에 대한 응답입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슬퍼하는 땅의 왕과 상인 및 뱃사람들의 애가에 이어, 19장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무리가 등장합니다. 요한은 하늘에서 허다한 무리들이 내는 큰 음성 같은 것을 듣습니다. 첫 번째 할렐루야가 언급됩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할렐루야’는 구약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으로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의미입니다(시 104:35; 113:1). ‘할렐루야’가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나오지 않는데 본문에서는 4번이나 나옵니다. ‘할렐루야!’얼마나 듣고 싶던 승리의 선언입니까? 악의 세력과의 긴 싸움이 마침내 끝났음을 온 천하에 알리는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이 하늘로부터 울려 퍼집니다. 이전에 천사들이 찬송할 때(5:12; 7:12)는 ‘구원’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찬양을 드리는 자들은 땅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므로 특별히 ‘구원’의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반적인 구속 계획의 완성을 가리키며, ‘영광과 능력’은 구원을 완성시키는 하나님의 ‘위엄과 힘’입니다. 2절은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음녀 바벨론을 심판하신 하나님이 찬양받아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참되고 의로우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참되다’는 ‘신실하다’라는 의미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합니다. 따라서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는 것임을 암시합니다(6:9-11).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습니다.’이는 바벨론에 대한 심판이 정당하고 정확한 판단에 근거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라는 표현에서 ‘더럽게 하다’는 ‘망하게 하다, 타락시키다’는 뜻을 가진 동사의 미완료형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음녀의 활동이 지속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음녀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증인들의 피에 취했습니다(17:6). 더구나 그 음녀는 성도들을 박해하면서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18:7)라고 했으니 그 오만과 자만의 죄악은 하늘에 사무칠 정도(18:5)였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와 성도들의 피를 흘린 바벨론의 죄를 잊지 않으셨습니다(18:24). 제단 아래 있는 순교자들이 자신들의 피를 갚아달라고 하나님께 탄원했을 때, 하나님은 잠시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6:10-11). 바벨론이 받는 심판은 순교자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두 번째 할렐루야는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는 광경을 보고 무리가 외칠 때 나옵니다. ‘그 연기’는 문법적으로 보면 ‘그 여자의 연기’로서 바벨론이 받는 심판을 가리킵니다. 연기가 영원토록 올라간다는 말은 바벨론이 받는 심판이 최종적이고 돌이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연기는 짐승과 사탄(용) 그리고 그 추종자들이 던져지는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서 발생하는 연기를 암시합니다(19:20; 20:10,14-15). 이어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24장로와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는 네 생물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며 ‘아멘 할렐루야’로 화답합니다. ‘진실로 그렇다. 하나님을 찬양하라’의 뜻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보좌에서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찬양하는 이들은 세 부류입니다. 첫째는 천상의 허다한 무리이고, 둘째는 24장로와 네 생물이며, 세 번째는 5절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종들의 피’라는 표현을 고려하면 하나님의 종들은 순교자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라는 표현이 있으므로 모든 믿는 자들로 보는 것이 더 낫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고(20:13),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22:12).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이 있으면 박해하는 짐승을 향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남녀노소,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구속받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모든 자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시 115:13).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충만히 받아 누려야 합니다.

어린 양의 신부가 입을 세마포(6-8절)
요한은 다시 허다한 무리의 음성 같기도 하고, 많은 물소리 같기도 하고, 큰 우렛소리 같기도 한 소리를 듣습니다. 심판의 연기가 피어나는 중에 온 세상을 꽉 채운 소리로 하나님의 통치와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선포됩니다.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구원하시는 분도 어린 양 예수님이요, 심판하시는 분도 어린 양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할렐루야가 언급됩니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에서 ‘전능하신 이’라는 칭호는 요한 당시 도미티안 황제가 자신을 ‘우리 주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에 기인합니다. 신약성경에서 계시록 외에는 단 한 번 밖에 나타나지 않으나(고후 6:18) 계시록에서는 7번이나 나옵니다(1:8; 4:8; 11:17; 15:3; 16:7; 21:22). 로마 황제가 아니라 여호와만이 모든 능력을 소유하신 주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통치하시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는 행위의 시작을 강조하는 부정과거시제이므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기 시작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요한은 앞으로 있을 종말론적 사건이 완전하고도 분명하게 성취될 것임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허다한 무리가 6절에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찬양했다면, 7-8절에서는 찬양해야 할 새로운 이유가 소개됩니다. 신랑 예수님과 신부 성도들이 결합하는 기쁨과 영광이 혼인 잔치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번역하는 것이 좋으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가 완전하게 연합하는 때가 왔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에 대한 많은 이미지 가운데 왜 하필이면 어린 양의 모습으로 드러납니까? 기쁘고 복된 자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부 된 주님의 교회가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놀라운 복이기는 하지만 신부 자체가 가지는 공로나 조건에 기인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신랑의 일방적인 사랑과 자기희생이 이 혼인 잔치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백성을 남편과 아내로 자주 표현합니다(호 2:19; 사 54:5-7; 렘 31:32; 겔 16:7-8; 마 22:1-2).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나 시온이 하나님의 아내로서 나타납니다(호 2:14-22). 그러나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내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비유는 대부분 이스라엘의 신실하지 못함을 지적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혼인 잔치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로 사용해 천국을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푼 혼인 잔치’로 설명하셨습니다(마 22:2-14; 눅 14:16-24).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일 먼저 행하신 이적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이었는데(요 2:1-11), 이는 예수님이 바로 종말론적 메시아 잔치의 성취자이심을 보여줍니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으로, 자신을 신랑의 들러리라고 하며 예수님이 메시아 시대를 여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요 3:29). 바울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 즉 혼인 관계로 비유하였습니다(고후 11:2, 엡 5:25-27). 7절의 ‘아내’로 번역된 ‘구나이’는 일반적으로 ‘성인 여자’혹은 ‘부인’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라고 하실 때 같은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정혼 상태이므로 ‘아내’보다 ‘신부’라 하는 편이 좋습니다. 신부는 하늘의 도성, 새 예루살렘을 가리키며(21:2,9),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된 교회 공동체를 상징합니다(고후 11:2). 결혼식이 신랑과 신부의 결합을 의미하듯, 어린양의 결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영원히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신부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된 자만이 자격이 있습니다. 어린양을 끝까지 따른 성도들은 새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지만, 짐승에게 미혹되거나 박해에 굴복한 자들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준비하였다’는 말은 하나님이 예비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그 아내들을 예비하지 아니하시고는 이 땅을 심판하실 수 없습니다. 요한은 이제 완전하며 종말론적인 어린 양과의 혼인이 성취될 때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에 따르면 남녀가 약혼한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신랑이 신부를 찾아와 정식으로 혼례를 올립니다. 주님은 우상을 멀리하고 끝까지 순결함을 지키는 선한 행실로 ‘자신을 준비’한 교회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십니다. ‘허락하셨다’는 ‘그에게 수여되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성도가 옳은 행동을 해서 자력으로 세마포 옷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옷을 받을 자격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만한 자격이 없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셔서 세마포 옷으로 수치를 가려 주셨습니다. 이런 까닭에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 받은 사람은 복됩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는 ‘흰 옷’과 유사한 의미입니다. 이기는 자는 흰 옷이 주어질 것이라고 약속한 바 있으며(3:5),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는 ‘흰옷을 사라’고 촉구했으며(3:18), 천상의 무리가 흰옷을 입고 있으며(7:9), 그 옷은 어린 양의 피에 씻어 희게 되었습니다(7:14), 더 나아가 19:14에서는 하늘에 있는 군대가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세마포 옷은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한 우상 숭배자들이 입던 옷과 대조됩니다(18:16).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영적 신부로서 진리를 따르는 옳은 행실로 거룩한 옷을 입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해야 함을 교훈합니다. 그들은 신랑 되신 어린 양에 대한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죄악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을 수 있는 대상은 승리한 교회임이 분명해집니다.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복된 자(9-10절)
천사는 요한에게 ‘기록하라’고 명령합니다. 계시록에서 기록명령은 자주 발견됩니다 (1:11,19; 21:5). 요한이 기록해야 하는 것은 7-8절에서 언급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는 아주 짧은 주례사로 볼 수 있습니다. ‘잔치’는 ‘만찬’의 의미를 가진 매우 친밀한 이들끼리 하는 식탁 교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에서 ‘이것’은 복수 주격대명사이니 ‘이것들’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것들은 큰 음녀의 멸망(18:1-24)과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선언(19:1-8) 전체를 가리킵니다. 천사는 요한에게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 받은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때 요한이 그 천사에게 경배하려 했지만, 천사는 자기도 요한과 그의 형제들과 같은 증인 중 하나일 뿐이라며 거절하며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천사의 영광이 아니라, 보좌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해야 합니다. 천사는 예수님의 증언이 예언의 영이라는 표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 모든 예언의 핵심입니다. 2) 예수님이 주신 증거가 예언의 핵심입니다. 3) 예수님께서 주신 증거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예언입니다. 4) 예수님에 대한 증거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예언입니다. 어린 양의 신부들은 오직 예언의 말씀을 통해 곧 오실 신랑을 기다릴 소망을 얻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1:3). 성령을 받은 성도는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 우리의 자세
- 시대의 흐름을 분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그분을 미워하기에 그분의 제자인 우리도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5:18).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성도는 악의 세력이 멸망할 때가 머지않은 것을 알고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시대의 표적을 깨닫지 못함을 책망하셨습니다(마 16:2-3). 인류 역사의 종말이 가까이 옴을 알려 주는 징조는 지진, 기근, 전염병, 테러, 전쟁의 발생, 거짓 선지자와 거짓 그리스도의 등장, 대규모 배도(마 24장), 자기중심주의와 물질주의의 만연, 가정의 붕괴(딤후 3:1-5)등입니다. 사도 바울은 종말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표징이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살후 2:3)의 등장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들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며(마 24:14), 이스라엘 가운데 충만한 수가 주님께 돌아오면 예수님은 재림하셔서 온 땅의 악을 멸하시고 최후 심판을 주관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종말의 표징이 나타남을 목격할 때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옴을 알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의 악을 허용하시기는 했지만 결코 끝까지 그 악에 대해서 방관하시지는 않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용하신 기간 동안에 당하게 되는 고난으로 불의한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거나 우리가 그들에 의해서 망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이기신다는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할렐루야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 어린 양의 신부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어린 양의 아내인 교회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습니다. 여기에 계시록의 메시지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린양의 신부로서 신앙의 순결을 지킨 자들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정결한 처녀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한다고 했습니다(고후 11:2). 신부에게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이 주어집니다. 어린 양의 신부는 세속적 아름다움에 현혹되지 않고, 영적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어린 양의 신부는 행위로도 순결함을 나타내야 합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은 성도의 옳은 행실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을 따르는 거룩한 행실은 소극적으로 바벨론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해(18:4), 적극적으로 어린양을 증언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세상 가치를 좇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바른 믿음을 지킨 경건한 성도가 훗날 하나님이 베푸신 천상 잔치에 참여합니다. 이것이 모든 핍박을 견뎌 낸 성도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미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주의 계명에 순종하며 믿음의 선한 행실로 단장한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창세부터 종말까지 역사 속에 일어날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십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 사탄의 세력은 공의의 심판으로 순식간에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환난 중에도 믿음을 지킨 성도는 공의로운 심판을 기뻐하며 ‘할렐루야’를 외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교회의 최종 모습은 신랑 되시는 예수님과의 혼인 잔치에 신부로 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랑이자 왕 되시는 예수님이 마련하신 혼인 잔치는 풍성하고 놀라운 환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우리 주님으로 인하여 모자람이 충만하게 채워지는 잔치가 벌어졌다면, 이 혼인 잔치는 처음부터 진품으로 시작하여 극상품 포도주로 마치는 잔치가 될 것입니다. 본문은 왕이신 주님이 혼인 잔치의 신랑인 어린 양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죽기까지 신부를 사랑한 신랑은 신부를 맞이할 모든 자격을 갖춘 존재입니다. 어린 양의 신부는 화려한 옷이나 온갖 장신구로 치장하지 않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 세마포 옷은 세상에 물들지 않은 거룩함과 성결함을 가리킵니다. 언젠가 바벨론은 무너질 것이며 교회는 신랑 되시는 주님과 함께 혼인 잔치에 서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성도다운 옳은 행실을 통해 거룩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천상에 울려 퍼지는 승리의 찬양 속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로 서게 될 그날을 생각하면서 이 땅에서의 모든 수고와 고난을 참아야 합니다. 그날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천상에서 벌어지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리에 함께 서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