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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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3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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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계 11:15-12:6


계시록에서 핵심 단어 셋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말씀, 그리고 교회입니다. 어느 본문을 보더라도 이 핵심단어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말씀과 교회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심판의 최종 목적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재앙은 죄의 무서운 결과를 각인시키며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일 뿐,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바라시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의에 따라 죄를 처벌하시지만, 자기 백성에게 주신 구원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며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십니다. 일곱 나팔 중에 네 나팔이 불린 후, 날아가던 독수리가 세 번 “화, 화, 화가 있으리니”라고 큰 소리로 말한 대로(8:1), 다섯째 나팔은 첫째 화(9:12), 여섯째 나팔은 둘째 화(11:14)를 불러왔습니다. 이제 일곱째 나팔이 셋째 화를 불러올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셋째 화는 첫째 화와 둘째 화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본문의 전반부인 11:15-19은 일곱째 나팔 소리와 함께 하나님과 하나님이 세우신 그리스도의 영원한 통치가 선포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은 앞서 언급된 두 증인의 사역의 결과입니다. 이십사 장로들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찬양의 내용을 근거로 예수님이 세상을 어떻게 통치하고 심판하실지 알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12:1-6은 교회, 사탄, 예수님의 관계를 소개합니다. 요한은 핍박을 당하고 있던 성도들에게 인간의 눈으로 보이는 세계 배후의 영적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 지를 설명해 줍니다. 여자와 용의 환상을 통해 장차 교회 공동체에 닥칠 엄청난 시련과 핍박의 궁극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교회와 사탄 사이의 치열한 영적 전투가 있을 것을 말해줍니다. 말세를 살아가며 그때를 준비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영원한 통치(11:15-17)
일곱 천사들의 나팔로 말미암은 종말 예언들이 하나씩 계시되는 가운데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붑니다. 일곱째 나팔 재앙이 다른 나팔 재앙과 다른 점은 천사가 나팔을 분 후 바로 재앙이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일곱째 인이 열렸을 때 특정한 재앙이 언급되는 대신에 반시간쯤 고요한 후 일곱 나팔이 등장한 것과 비슷합니다.종말적 심판을 통해 사탄의 나라와 그것에 속한 모든 자들이 제거되며, 두 증인의 예언 사역으로 불신자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됨으로 세상 나라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원한 통치는 계시록이 바라보는 종말론적 비전의 완성입니다. 그 통치는 종말론적 심판 후에 실현됩니다. 계시록 18장에서 바벨론이 멸망한 후에, 19장에서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열립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원한 통치는 21-22장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통해 묘사됩니다.

이어서 이십사 장로들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그들은 앞서 7:11에서도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계시록 곳곳에 등장하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경배를 볼 때, 계시록의 관심은 종말론적 사건들 및 그 사건들을 겪는 성도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어린양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4장로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17절과 18절에 나타납니다. 원문에는 ‘전능하신 이여’라는 말씀 다음에 ‘왜냐하면’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감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큰 권능을 가지시고 역사와 종말론적 사건들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 땅에서 짐승과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환난을 당합니다. 그런데 환난은 하나님의 묵인 아래 일시적이고, 제한적으로 행해질 뿐입니다. 앞서 언급된 하늘의 큰 음성들이 찬양하는 내용과 24장로들이 하나님께 경배하는 내용을 비교하면 ‘왕 노릇하다’라는 표현이 공통적으로 나옵니다. ‘왕 노릇하다’는 기본적으로 ‘통치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15하반절에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의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삼았다고 표현하는데, 17절에서는 언제나 계신 하나님이 이제 큰 권능을 잡으셨다고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라고 고백합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네 생물이 고백했던 내용,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4:8)와는 약간 차이가 있는데, 미래에 대한 고백인 ‘장차 오실 이’가 빠져 있습니다. 이는 일곱째 나팔이 불리는 시점 자체가 미래에 하나님이 ‘이미 오신’상태이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사탄의 권세가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지나가고 오직 하나님이 온 땅을 다스리실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사망과 애통이 다시는 없을 나라를 세우십니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사이의 하나님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또한 다른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슬퍼하고 애통하는 사람을 위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 땅에 하루 빨리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 나라가 임하는 날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따라 믿음으로 성실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심판과 상(11:18)
‘이방들이 분노하다’는 시편 2:1-3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방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하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에서는 이런 반응을 보이는 자들을 ‘땅에 사는 자들’로 언급합니다. 요한은 분노하는 이방 나라에 ‘주의 진노가 임한다’고 합니다. 죽은 자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믿지 않고 죽은 불신자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8하반절에는 심판, 멸망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상 주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문맥에서 심판 혹은 멸망과 대조되는 개념이 구원입니다. 종말이 완성될 때에 주어질 완전한 구원이 여기서 말하는 ‘상’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두 가지 상반된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는 경건하게 그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 즉 선지자와 성도,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이 누릴 기쁨의 상입니다. 큰 자와 작은 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남기든 한 달란트를 남기든 상관없습니다. 모두 주인의 칭찬과 즐거움에 기쁘게 동참합니다(마 25:21-23).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해 땅을 망하게 한 자들이 받을 멸망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짐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분노하며 하나님을 거절하다가 주의 진노를 받게 됩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겸손하게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거나 그분을 거역하여 자신의 죄를 따라가는 두 가지 삶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합니다. 선택은 자유지만 결과는 더 이상 선택할 수 없습니다.

하늘 성전의 언약궤(11:19)
19절은 나팔 심판을 마무리합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린다’는 내용은 4:1의 ‘하늘에 열린 문이 있다’라는 문구를 연상시킵니다. 두 표현 모두 종말론적인 의미로 ‘하늘의 열린 문’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다고 합니다. 언약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언약 및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지상의 언약궤는 지성소에 보관되었는데,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번만 들어가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늘의 언약궤가 보인다는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종말론적으로 완성되어 하나님의 임재가 영원히 이루어질 것을 상징합니다. 바벨론의 침공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 언약궤가 유실되었기 때문에 포로기 이후에는 대제사장이라도 더 이상 언약궤를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비록 땅에는 언약궤가 없지만 하늘에 있는 성전에 진정한 언약궤가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 되는 날에 언약궤가 나타난 것을 봅니다. 장차 모두가 하늘에 있는 언약궤를 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을 찢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이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의 재림은 땅과 하늘을 나누던 휘장을 찢어 하늘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임하게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조롱과 핍박을 당하며 살아야 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렇게 하늘 성전이 열리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나타나 온 땅을 심판하시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상 주실 날을 바라보며 큰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의 날을 기대해야 합니다.

‘언약궤’가 나타나 보인 것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제 완전히 실현하시겠다는 암시입니다. ‘번개, 음성, 뇌성, 지진, 큰 우박’과 같은 자연현상은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수반하는 현상으로서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상징합니다. 하늘 보좌로부터 나온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이것을 잘 보여 줍니다(4:5). 8장에서는 천사가 하늘 제단의 불을 향로에 담아 땅에 쏟자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났습니다. 11장에서도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찬양에 이어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발생했습니다. 8장과 11장에 언급된 초월적 자연현상은 각각 일곱 인과 일곱 나팔을 마무리하며 다음 단계를 준비합니다. 큰 지진은 하나님이 진노하신 결과입니다(16:17-21). 다섯째 나팔과 여섯째 나팔은 각각 첫째 화와 둘째 화에 해당합니다(9:12; 11:14). 일곱째 나팔은 셋째 화에 해당하는데, 셋째 화가 지나갔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여자, 아이, 용(12:1-6)
요한은 두 개의 이상을 보게 되는데, 하나는 ‘해를 입은 한 여자’이고 다른 하나는 ‘한 큰 붉은 용’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해를 입은 한 여자’와 ‘한 큰 붉은 용’과의 투쟁의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때 계시록 12장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 예언되어 있는 창 3:15의 말씀을 한 장으로 펼쳐 놓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에서 이 여자를 마리아로 봅니다. 그런데 여자가 메시아를 낳았지만, 여자의 남은 자손이 교회이기 때문에(12:17) 이 여자를 마리아로 볼 수 없습니다. 여자가 메시아를 낳았으므로 이 여자가 이스라엘과 연관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혈통적 이스라엘에 머물지 않습니다. 여자는 메시아 뿐 아니라 교회도 낳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교회의 연속성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오셨고 그 제자들도 유대인이었지만, 그로 인해 탄생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포함하는 교회, 즉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여자는 시대를 초월해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자의 발 아래 있는 달은 초월적 위엄과 영광을 나타냅니다. 열두 별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혹은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상징합니다. 여자는 메시아를 해산하느라 산고 중에 있습니다. 이는 일차적으로 메시아 예수님의 탄생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더 나아가 메시아 시대가 오기 전에 교회가 겪는 고난을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여자가 용을 피해 광야로 도망하고, 광야에서 양육 받는 것으로 보아(12:14), 여자는 박해당하는 교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용은 애굽의 바로 왕과 병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종종 사용되었습니다(시 74:13; 사 51:9).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상징합니다. 12:9에서 용을 사탄이라고 합니다.

사탄이 인간을 공격함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을 파괴하려고 시도해 왔으며 그 결과 인간의 타락을 낳았습니다. 사탄은 자신이 직접 활동하는 외에도 대리자들을 사용하여 일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인 ‘큰 붉은 용’을 상징적으로 ‘라합’(요 26:12, 사 51:9), ‘하마’(욥 40:15-24).‘리워야단’(사 27:1) 등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여기서 용을 수식하고 있는 ‘큰’이라는 형용사는 사탄의 굉장한 권세를 나타내며, ‘붉은’은 지옥과 피의 빛깔로(6:4) 사탄의 사람들을 해치는 특징을 나타냅니다(요 8:44). 한편 용의 일곱 머리에 일곱 면류관을 쓴 것은 사탄이 하나님의 용인 하에 세상을 지배하는 왕의 권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13:1, 19:12). 또한 ‘뿔’은 힘을 상징하며 사탄의 거대한 파괴력을 나타냅니다. 용이 여자가 아들을 해산하려고 할 때 그를 삼키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용은 하늘의 삼분의 일을 끌어 땅에 던질 정도로 강력한 힘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삼키려는 용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해 두 살 아래 사내아이들을 죽인 헤롯을 연상시킵니다(마 2:16). 용의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방해하는 사탄의 적대 행위를 암시합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는 문구는 이사야 66:7의 ‘시온이 ... 남아를 낳았다’에 근거합니다. 이사야 66:7-8이 이스라엘을 통해 메시아와 그 나라 백성의 탄생을 전망한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본문은 예수님이 메시아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에 대한 묘사입니다. 여자가 낳은 아들이 철장(철지팡이)으로 만국을 다스릴 것이라는 말은 시편 2:9을 배경으로 하며 철장을 든 아들은 메시아, 곧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철장을 가지고 만국을 다스린다는 표현은 계시록 2:27과 19:15에서 예수님께 적용됩니다. 특히 19:15에서 이 표현은 예수님의 강력한 심판을 상징합니다. 메시아를 죽이려는 용의 계략은 메시아의 승천으로 좌절됩니다. 그러나 혼자 남은 여자는 광야로 도망갑니다. 본 절은 예수님의 탄생과 승천 이후이므로 여기의 여자는 곧 신약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곳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간 양육 받고 민족의 영도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의 연단 후에 가나안으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여인을 그리스도의 교회로 볼 때 이 세상 안에서 교회는 언제나 세상과 대립된 상태에 놓여 있고,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훈련장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광야로 도망한 여자는 1260일 동안 하나님께 양육 받습니다. 이 시간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요한이 바라본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부터 하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양육을 받고 생존하는 공동체입니다. 여자가 천이백육십 일간 광야에 머문 것은 용의 박해를 전제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합니다. 성전 바깥마당이 마흔두 달 동안 보호받지 못한 것처럼(11:2), 여자가 상징하는 교회는 외적으로 환난을 당할 것입니다. 동시에 성전이 마흔두 달 동안 보호받은 것처럼(11:1), 여자가 상징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것입니다. 오늘도 사탄의 세력은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를 해치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믿는 자와 교회를 보호하시며 안전하게 하십니다. 교회는 사탄의 공격과 위협에 직접적인 표적이 되며 실제로도 많은 핍박을 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도우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해야 합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불꽃같은 눈동자가 우리를 주시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세
- 왕노릇 하시는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핍박을 당할 수도 있고, 사탄에게 잠시 패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곱째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예수님이 왕권을 받아가지고 오실 때, 세상 나라는 다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할 것입니다. 심판의 때가 되면 사망도 음부도 죽은 자들을 내어주어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18; 20:13).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서 이 땅을 망하게 했던 사탄과 거짓 선지자와 악한 영들이 다 불 못에 던져져 멸망당할 것입니다(18; 20:10).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절대로 악을 끝까지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잠시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고, 악이 득세하고 의인이 핍박당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서고 악인이 심판당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나 성도나, 작은 자나 큰 자나 상관없이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상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작은 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한 사람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막 9:41). 우리가 주의 일을 하다 보면, 남모르게 자신만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고생길인 줄 알면서도, 주님이 주신 사명이기 때문에 아픔과 슬픔을 삼키고 그 길을 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고 반드시 상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눈물을 씻어 주시고 주님과 복음을 위해 희생한 것에 대해 칭찬과 위로와 상으로 채워 주십니다.
- 고난을 양육의 기회로 삼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믿음의 사람, 인내의 사람, 성숙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계시록은 하늘 시민권을 가진 성도들에게 고난이 있을지라도 끝까지 어린양을 따를 것을 요구합니다. 또한 아무런 고난 없이 하늘 시민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타협하는 교인들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하나님은 어린양을 따르는 성도들이 사탄에게 박해를 받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불 기둥과 구름 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로 돌보셨듯이, 교회도 광야에서 돌봐주실 것입니다. 광야는 고통의 장소인 동시에 양육의 장소입니다. 우리는 고난으로 인하여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양육의 기회로 삼으셔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유익하게 합니다. 신실한 교회는 환난에 처하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넉넉히 이깁니다. 성도는 연단을 위한 불 시험을 이상히 여기기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해야 합니다(벧전 4:12-13).
- 이기게 하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요한이 큰 이적을 보았는데, 해를 옷 입은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느라 애를 쓰며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메시아를 낳은 진정한 이스라엘 공동체, 즉 교회 공동체를 가리키고, 아이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사탄은 메시아를 죽이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습니다. 여자가 낳은 아이는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라갔습니다. 지금도 사탄은 교회를 무너뜨릴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갖가지 시험과 유혹을 통해 교회를 흔들기도 하고, 통째로 삼킬 만한 교묘한 전략을 꾸미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이 아주 영악하고 간교한 존재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늘 깨어 기도하면서 영적 전쟁에 임해야 합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사탄의 공격과 박해를 받지만 하나님이 보호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광야 같은 세상을 산다 해도 하나님이 늘 보호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본문은 일곱 번째 나팔이 울려 퍼질 때 일어나는 사건을 보여 줍니다. 큰 소리와 이십사 장로의 찬양은 모두 영원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약속하신 모든 것을 신실하게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열린 성전의 중심에 놓인 언약궤를 통해, 예수님이 주신 새 언약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보여 주십니다. 본문은 우리 삶의 중심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분명히 깨닫게 합니다. 삶의 중심에 예수님과 말씀이 있을 때, 우리는 신실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친밀하고 영원한 관계를 누리게 됩니다. 하늘의 성전이 열리고 언약궤가 보이는 것은 구원의 완성의 때가 다가옴을 의미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늘 영광을 미리 맛보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예배를 통해 받는 영적 선물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언제나 이런 은혜로 차고 넘쳐야 합니다. 우리의 힘이 아닌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배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먼저 온전히 은혜의 감격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언제나 왕노릇 하시는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을 양육의 기회로 삼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기게 하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멸망으로 향해 가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땅에서 겪을 수 있는 고난에 대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받게 되는 어린양의 진노에 대해 전해야 합니다. 비록 광야 같은 세상을 살고 있지만 우리는 날마다 하늘 성소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통치를 고대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자로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