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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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4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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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히 2:9-18



12월에 접어들면서 방송에서 캐롤이 부쩍 많이 들립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들으면 공연히 마음이 들뜨게 됩니다. 무엇인가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선물을 준비하고, 연말파티에 참석하고, shopping을 하는 데는 분주하면서도 정작 성탄절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성탄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누구신지, 왜 이 땅에 오셨는지 묵상하면서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고, 예수님 때문에 감사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대림절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대림절이 영어로 ‘Advent’인데 이는 ‘도착’이라는 뜻의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됐습니다. 대림절의 ‘待’자는 ‘기다릴 대’이고 ‘臨’자는 ‘임할 임’이므로, 문자적으로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입니다. 성탄절 4주 전부터 시작해 성탄일 전야까지가 대림절인데, 성도들은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오셨다는 확신과 더불어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처음 오셨을 때는 고난 받는 종으로 오셨지만, 다시 오실 때는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2000년 전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렸지만 오늘 우리들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대림절에는 주로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구절들을 중심으로 설교를 했는데, 이번 대림절에는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역을 중심으로 다루면서 예수님을 본받는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팬데믹이 2년 반 이상 계속되고 있고, 독감과 호흡기질환이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고, 물가는 여전히 많이 뛰고, 내년에 경기 침체의 조짐이 있다고 하는 등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예수님을 확신을 가지고 기다리면서 흐트러진 신앙생활이 회복되어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성탄절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떤 큰일을 시키려는데 큰 희생이 요구됩니다. 그 일을 행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아버지가 아무리 설득을 해도 아들이 싫다고 거부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자신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히 10:5-7) “세상에 임하실 때에”와 “행하러 왔나이다”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되는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의 몸을 드리시는 결단을 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인간의 몸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오셔야만 했을까요?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대속제물로 죽기 위함입니다(9절)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브리서 저자는 9절에 와서야 예수님의 이름을 처음으로 언급합니다. 9절은 시편 8:5~6의 성취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심’과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아래에 두심’이라는 표현은 메시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의미합니다. 낮아지심으로 죽음의 고난을 맛보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하셔서 높아지심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가 되셨습니다. 천사보다 못하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아들이 인간이 되신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성육신을 언급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본체’로 번역된 헬라어 ‘morphe’는 영원히 변치 않는 본질적 형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본래부터 하나님으로 존재하셨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는 과정을 ‘자기를 비우고,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자기를 낮추셨다’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영광과 특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하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여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하였는데 그때 ‘모양’으로 번역된 ‘schema’는 어떤 대상이 본질은 변하지 않은 채 외형만 변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체는 하나님이신데 한시적으로 육신을 가지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영원 전부터 존재하신 하나님이 이 땅에서 잠시 인간으로 계셨으나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여전히 하나님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는 반드시 죄의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그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아무 죄도 없으시고 영광스럽고 존귀하신 주님이 우리 대신 속죄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이 크고 놀라운 사랑을 베푸신 주님께 감사하며 견고한 믿음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구원의 창시자로 고난 받기 위함입니다(10절)
왜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의 고난을 맛보셔야만 했습니까? 10절에 그 답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은 첫 사람 아담이 잃어버린 창조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말합니다. ‘창시자’로 번역된 ‘아르케고스’는 ‘개척자’‘승리자’‘영도자’등 다양한 의미를 지닙니다. 구약의 맥락에서 이 용어와 가장 가까운 이미지는 이스라엘의 인도자(출 20:2)요,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싸우는 이스라엘의 용사(사 42:13)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 인해 막혀 있는 구원의 길을 터놓기 위해서 죄인들의 고난을 대신 담당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 역할을 예수님이 담당하시며 구원의 창시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공회에서 담대히 선언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여기서 ‘온전하게 한다’는 것은 아들이 본질상 무엇인가 부족해서 채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직무와 관련된 표현입니다. 자신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고난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이는 천사들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본래 죄의 종으로 매여 살다가 죽음의 심판을 맞이해야 했지만,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으시고 우리가 치러야 할 죄와 사망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처럼(창 15:6),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주님의 가족으로 삼기 위함입니다(11-13절)
더러운 손으로 다른 사람의 옷을 깨끗하게 하려다가 오히려 더 더럽힐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로 오염된 죄인이 다른 죄인을 거룩하게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자신이 완전히 거룩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인간으로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거룩한 존재입니다. 그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육체를 단번에 드림으로써 죄인인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11절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고, ‘거룩하게 입은 자’는 죄인인 우리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과 거룩하게 함을 입은 우리가 다 한 근원이신 아버지께 속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우리를 형제로 여기신 것을 구약성경으로 확증하려 합니다. 먼저 시편 22:22이 인용됩니다. 시편 22편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여러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기에 가장 중요한 메시아 시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편 22:22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여기에 인용한 것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 구원한 사람들을 향해 ‘형제’라 부르신다고 합니다. 주님의 백성인 교회를 ‘형제’로 언급한 것입니다. 13절에 인용한 이사야 8:18은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된 것을 언급합니다.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자녀’는 형제와 마찬가지로 한 가족의 의미를 담고 있기에 같은 개념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한 피 나눈 가족으로 여기신다고 합니다. 세상에서는 지체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과 친구가 되기 어렵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쉽게 어울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꺼이 우리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시고 사랑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죄로 인해 죽어 마땅한 피조물인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어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자매가 된 것입니다. 피를 나눈 가족 공동체는 그 어떤 것으로도 세상에서 끊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라는 신분은 돈이나 지위로 얻을 수 없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귀한 신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와 자매로서 동일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해야 합니다.

죽음의 세력을 이기기 위함입니다(14-16절)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14-15) 예수님이 가족으로 만드신 사람들은 영과 혼만이 아니라 육신을 지니고 그 한계 안에 있던 ‘인간’입니다. ‘혈과 육에 속했다’는 것은 그로 인한 약점을 안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것이 질병과 고통과 쇠약함을 가져오는 이유이며, 죽음의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물론 죽음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영혼과 혈과 육에 씌워진 굴레입니다. 인간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존재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가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가 되었습니다. 죽음의 세력으로 인간을 넘어지게 하는 마귀를 멸하는 유일한 방법은 또 다른 죽음, 곧 그리스도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통하여’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제자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제사장들과 빌라도와 헤롯까지 한 통속이 되도록 공작하고, 무리를 돌아서게 하고, 유다를 꼬여 음모를 꾸미게 해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대속의 죽음을 통해 인류의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던 우리에게 자유를 선포하시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를 돕기 위함입니다(17-18절)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17-18) 만일 예수님이 천사들을 도우려 하셨다면 인간처럼 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혈과 육을 취하시고 잠시 천사보다 못하게 되신 것은 혈과 육의 한계에 묶여 있는 인간을 도우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혈통에 따른 이스라엘이 아니라 믿음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킵니다(갈 3:7).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비하시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열심을 내셨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진 분으로서 이 땅에서 모든 시험과 고난을 친히 다 당하셨습니다. 인간은 범죄한 이후로 땀 흘리는 수고가 없이는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온갖 질병과 사고의 고통을 당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이런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누가 제대로 위로해줄 수 있습니까?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는 말처럼 같은 고난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암에 걸린 사람에게 암 투병을 했거나 그들을 가까이서 돌본 사람들의 위로가 큰 힘이 됩니다. 자식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이왕이면 자식 때문에 골머리 썩었던 분이 해주는 위로가 큰 힘이 됩니다. 공감대가 형성될 때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감대를 형성하려면 동일한 상황에 처하는 것이 제일 확실한 방법입니다. 천사는 인간을 알기는 하지만 체험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공감할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하시고, 위로하기 위해 육신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난을 다 겪으셨습니다. 배고픔을 겪으셨고, 극도의 탈진도 경험하셨습니다. 채찍에 맞았고, 머리에 가시관으로 찔렸고 마침내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까지 경험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 진정한 치유자가 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난을 다 이해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간구하면 머리털 하나까지라도 다 세신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환난 가운데 피할 길을 마련하여 주십니다.

* 우리의 자세
- 주님을 높여야 합니다
신실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죄로 인해 영원한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던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와 동일한 혈과 육을 가진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와 주님의 형제가 되게 하셨고, 마귀를 멸하셔서 우리가 죄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큰 은혜를 베푸신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엡 2:7).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만을 찬양하고 높여야 합니다.
- 우리를 낮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높이시기 위해 영광에서 수치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연약한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 위해 친히 혈과 육을 취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두려워하고 회피하는 죽음을 스스로 취함으로써 우리가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낮은 곳을 바라보기보다 높은 곳만을 보며, 섬김보다 영광의 길만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그리스도를 이용해서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지는 않습니까? 모든 사람이 잃어버린 창조의 영광을 회복하는 길을 보이려면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낮아짐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 성육신의 정신으로 섬겨야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내려오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영광을 포기하시고 이 세상에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까지 자신을 철저히 낮추신 이유는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순종의 결과가 우리의 구원입니다. 희생이 없는 섬김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고자 하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한 것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겸손과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순종을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진 것처럼 예수님을 닮아 자기를 비운 사람이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기만 하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고 품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며 성육신의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같이 울고, 같이 웃고, 같이 슬퍼할 수 있는 신앙의 공동체가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가면서
본문은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 개념인 성육신의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한계인 혈과 육을 취하신 사건의 의도를 잘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잠시 천사보다 못하게 되시고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근본적 약점은 혈과 육을 가진 한계적 존재로서 고난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마귀는 이 죽음을 이용해서 사람을 얽어매고 자신의 종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혈과 육을 지닌 인간이 되셔서 죽음을 빌미로 횡포를 부리는 마귀를 자신의 죽음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고 시험당하는 형제를 능히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위해 대속제물로 죽으시기 위하여, 구원의 창시자로 고난 받기 위하여, 우리를 주님의 가족으로 삼기 위하여, 죽음의 세력을 이기기 위하여, 시험 받는 자들을 돕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높이시기 위해 영광에서 수치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높이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분을 부끄러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의 주님이 부끄러워 주님을 자꾸만 다른 것으로 포장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어두움의 세력은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을 못 박게 하였으나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셨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성도들을 통하여 오늘날도 세상을 비추고 있습니다. 대림절 첫째 주일에 촛불 하나를 켜는 것이 전통입니다. 이 촛불은 기다림과 소망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대망하고 하나님 나라 완성을 바라봅니다. 세상에서 지치고 곤고한 자들과 어두움에 있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소망이 제시해야 합니다. 크고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감사하며 성육신의 정신을 실천해야 합니다.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며 기쁨과 소망과 평강이 충만한 성탄의 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