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세번째 약속의 성취(1)

Author
hgchoi hgchoi
Date
2022-10-30 20:11
Views
107
성경구절 : 사사기 16:1-17

삿 16:1-17 세 번째 약속의 성취(1)

어렸을 때 보았던 만화 영화 중에 뽀빠이가 있습니다. 올리브가 악인에 의해 위험에 빠져 ‘뽀빠이 살려줘요’애처롭게 외치면 뽀빠이가 시금치 캔을 짜내 시금치를 먹고 엄청난 힘을 얻어 올리브를 구해줍니다. 본문에도 보니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들릴라가 삼손이 말한 대로 그를 묶고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외치면 삼손이 자기를 묶었던 것을 쉽게 끊어 버립니다. 삼손이 한 행동은 단순히 게임을 한 것이 아니라 생사가 달린 살벌한 현실에 맞닥뜨린 것입니다. 자칫하면 삼손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혹시 스릴을 즐긴다며 삼손처럼 행동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사사기 16장은 삼손 스토리의 마지막 부분으로 그가 어떻게 몰락하는지를 상세하게 보여 줍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 중에도 가장 힘이 셌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정욕을 따라가다가 한순간 죄의 덫에 걸려들어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본문에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단지 육체적 욕망을 채우는 대상으로 만난 여인이고 두 번째는 삼손이 사랑한 여인입니다. 두 경우 모두 삼손을 잡으려는 블레셋 사람들의 시도가 있었습니다. 특히 들릴라는 블레셋 사람들의 사주를 받아 삼손이 가진 힘의 근원과 그 힘을 제압하는 방법을 알려고 애를 썼습니다. 삼손은 들릴라를 속이면서 자신의 힘을 자랑 하는 것을 즐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생명을 노리는 블레셋 사람들의 계략에 빠지면서 점차 힘의 비밀에 접근합니다. 그러다가 들릴라의 끈질긴 재촉에 못 이겨 마침내 진실을 털어놓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 성경이 삼손이 몰락하는 과정을 이토록 자세하게 기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가 삼손 같은 성령의 사람이요 나실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방심하다가 우리도 삼손처럼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조금씩 죄를 용납하다가 죄에 대한 경계심이 풀어지면, 졸지에 사탄이 파놓은 함정에 빠집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푯대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면서 주님 뜻대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며 아름다운 마무리를 갖는 복된 인생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사의 기생에게 들어간 삼손(1-3절)
14장은 삼손이 딤나 여인을 ‘본’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6장에서도 삼손이 한 기생을 ‘본’것으로 시작됩니다. 항상 육신의 눈으로 볼 때 문제가 생깁니다. ‘기생’이라고 번역된 ‘조나’는 ‘창녀’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들어가다’라는 동사는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표현입니다. 가사는 블레셋의 주요 성읍 가운데 하나였는데, 가장 남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가사는 삼손의 고향인 소라에서 멀면서 블레셋의 가장 깊숙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인 위치는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창녀와 잠자리를 한 것과 더불어 삼손의 타락한 영적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삼손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가사 사람들이 삼손이 깊이 잘들 만한 새벽에 그를 죽이기 위해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있었습니다. 삼손에 대한 블레셋 사람들의 분노는 딤나와 주변 지역에 국한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의 공공의 적이 되었습니다. “밤중까지 누워 있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라는 표현은 밤중까지 자다가 깨서 일어났다기보다 밤중까지 창녀와 관계를 즐기다가 관계를 끝내고 나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밤에 삼손은 가사의 성 문짝들, 양쪽 기둥, 문빗장을 뽑아 어깨에 메고는 약 60km 떨어진 헤브론 맞은편 산꼭대기로 갔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무력시위입니다. 아침에 가사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보고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성문이 있던 자리는 뚫려 있고 성문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성문과 기둥의 무게가 상당했을 텐데 그것을 메고 가사에서 헤브론 근처 산꼭대기까지 간 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삼손의 행위는 그의 괴력을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삼손이 블레셋보다 강하다는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두려워하는 블레셋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블레셋이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함이 실패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사에서 위기에 빠진 삼손을 살리신 것은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인 동시에 마지막 경고였습니다. 삼손은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블레셋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영적 위기를 깨달았어야 합니다. 다시는 그런 죄에 빠지지 말았어야 합니다. 한번 죄에 빠졌는데도 은혜가 임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 크시기 때문이지, 그런 죄를 지어도 괜찮다거나 또 그런 죄를 지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죄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지금 당장 빠져 나와야 합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방심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지,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들릴라를 사랑한 삼손(4-9절)
4절에서 ‘이후’는 삼손이 가사에 있는 창녀의 집에 갔다가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들을 피한 후를 말합니다. 삼손은 소렉 골짜기에 거주하는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녀의 이름은 들릴라입니다. 삼손은 이전에 딤나의 여인과 결혼에 실패했고 가사의 기생에 갔다가 죽을 위기를 당했음에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또다시 위험한 불장난을 시작합니다. ‘들릴라’에서 ‘드’는 ‘~의’라는 의미이고 ‘릴라’는 ‘밤’을 뜻하는 히브리어와 자음이 같습니다. 그래서 ‘들릴라’를 ‘밤의 여인’이라 하기도 합니다. ‘삼손’의 의미가 ‘작은 태양’이니까, 작은 태양과 밤의 여인이 만난 것입니다. 과연 어떤 일이 둘 사이에 벌어집니까? 이번에는 블레셋의 방백들이 삼손을 무너뜨리기 위해 힘을 합쳤습니다. 그들은 들릴라에게 삼손이 가진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를 제압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면 블레셋 각 성에서 은 1,100개씩을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블레셋 성은 모두 다섯이니까 다 합하면 은 5,500개가 됩니다. 그 당시 노예 한 사람의 값이 보통 은 30개요, 가치가 떨어지는 노예의 값은 은 20개였습니다. 그러니까 은 5,500개는 노예 180명 이상을 살 수 있는 엄청난 돈이었습니다.

들릴라가 삼손에게 힘의 근원이 무엇이고 그를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묻자 삼손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합니다.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으로 결박하면 자기가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활줄’로 번역된 단어가 새번역 성경에는 ‘칡넝쿨’으로 되어 있지만, ‘활줄’이 짐승의 힘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은 사체에서 막 떼어낸 신선한 힘줄을 의미합니다. 그 ‘새 활줄’에 닿으면 짐승의 시체에 접촉한 것이 되어 부정하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마르지 않은 새 활줄 일곱 개를 들릴라에게 가져오자 그녀는 삼손을 그것으로 결박했습니다. 그녀가 사람들을 방 안에 매복시켜 놓고 삼손에게 말합니다.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그러자 삼손이 그 활줄을 불탄 삼실을 끊는 것같이 손쉽게 끊어 버렸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 힘의 근원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아쉬운 것은 들릴라가 삼손에게 힘의 근원과 제압 방법을 처음 물었을 때, 자기의 힘을 못 쓰게 하는 방법은 없다고 하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함정에 빠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들릴라를 놀리는 재미로 시작하여 나중에 혹독한 대가를 치릅니다.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하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기는 법입니다(잠 5:14).

점점 위태로워지는 삼손(10-14절)
들릴라는 삼손이 자신을 놀리고 거짓말을 했다고 불평합니다. ‘이제는 내게 말하라’라고 하면서 재촉합니다. 그러자 삼손은 ‘쓰지 아니한 새 밧줄’로 자신을 묶으면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들릴라가 삼손을 새 밧줄로 묶고 전과 같이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외치니 삼손은 새 밧줄을 실 끊듯이 간단히 끊어 버렸습니다. 이번에도 삼손을 잡아서 죽이려는 블레셋 사람들이 방 안에 매복하고 있었습니다. 삼손은 들릴라와 목숨을 건 유희를 계속합니다. 두 번이나 속은 들릴라는 더 강하게 삼손을 압박합니다. “당신이 이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삼손은 또 다른 거짓말로 둘러댑니다. 이번에는 자기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된다고 하니, 들릴라는 삼손이 알려 준 대로 실행합니다. 바디로 그의 머리털을 단단히 짜고 그에게 또 외칩니다.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이 말을 듣고 삼손이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런데 삼손의 세 번째 대답에서 위태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머리털은 삼손의 힘의 근원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힘의 비밀을 감추기 적당히 둘러 댔는데 이번에는 정답에 가깝게 말을 한 것입니다. 삼손이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기 직전입니다. 아슬아슬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삼손의 이런 모습에서 죄가 우리를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 보게 됩니다. 우리가 죄에서 돌이키지 않고 계속 그 안에 머물면, 사지로 걸어 들어가더라도 깨닫지 못합니다.

사실을 털어놓는 삼손(15-17절)
삼손이 세 번의 위험한 장난 끝에 자신의 비밀을 거의 내보입니다. 그녀의 시도가 모두 실패하자 들릴라는 자신을 향한 삼손의 사랑이 진실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속인 것까지 이중으로 비난했습니다. 들릴라가 날마다 재촉하니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마음이 번뇌했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구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마음에서 성령이 떠나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성령이 떠나시면 그렇게 불안하고 답답할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나 삼손은 부르짖지 않습니다.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라고 번역된 표현은 문자적으로 ‘그가 그녀에게 그의 온 마음을 알렸다’가 됩니다. 삼손은 이미 사자의 시체에 접촉했고 결혼식 피로연에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셨기 때문에 나실인의 두 가지 규례를 위반했습니다. 이제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나실인의 마지막 하나 남은 규례마저 위반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삼손은 처음으로 솔직하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 놓습니다. 자기의 머리털과 힘이 연결되어 있으며 자기의 머리털을 자르면 힘이 사라지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삼손이 하나님께 드려진 나실인이라는 자신의 소명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인식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았는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로 보건대, 아무리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어도 그 소명에 따라 사는 것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이 붙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욕망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쫓아가면 죄에 점점 더 깊이 빠져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됩니다. 삼손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삼손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삼손이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 우리의 자세
삼손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까?
- 죄악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요셉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죄의 유혹을 이기는 최선의 비결은 죄의 유혹을 받을 때 피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요셉은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는 보디발의 아내가 동침하자고 유혹하자 그녀가 붙잡은 겉옷을 버려둔 채 뒤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습니다(창 39:7~12). 요셉은 처음부터 단호하게 대처하여 유혹을 이겼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시 1:1).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과 들릴라의 올가미쯤은 쉬이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삼손과 같이 죄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영향력을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됩니다. 삼손이 결국 들릴라에게 힘의 근원에 대한 비밀까지 언급하고 말았습니다. 죄가 신자를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 주는 좋은 예입니다. 우리는 악이나 죄는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살전 5:22). 우리의 믿음의 현 주소는 어디입니까? 지금 죄악의 늪에 한 발을 넣고서는 괜찮다고 자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언제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고 자신합니까? 그런데 죄는 늪과 같아서 한 번 빠져들게 되면 좀처럼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금 죄 가운데 있다면 더 이상 머물지 말고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장하는 신자의 능력입니다. 죄가 주는 쾌락을 즐길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의 위기는 거룩함을 유지하지 못할 때 발생합니다.
- 사탄의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삼손은 자신의 비밀을 묻는 들릴라의 유혹에 몇 번은 맞섰고 이겨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지경에 이릅니다. 들릴라가 집요하게 삼손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시도하는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사탄이 집요하게 공격하는 모습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악한 세력이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끊임없이 유혹하고 공격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삼손에게 들릴라가 약점이었듯이, 각 사람에게는 쉽게 미혹되고 넘어지게 만드는 약점이 있습니다. 혹시 삼손처럼 육체의 정욕이나 죄성을 따르거나 그런 유혹을 받지 않습니까? 나의 ‘들릴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신 족속과 왕 같은 제사장들로 거룩한 나라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불러 주셨습니다(벧전 2:9). 작은 죄라도 경계하며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 사명감이 투철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악한 본성이 있고, 세상은 여전히 우리를 대적하며 마귀는 여전히 공격할 틈을 노립니다. 그러니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히 12:4). 그렇지 않고 육체의 소욕대로 살아간다면 우리도 삼손과 같이 부르심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서의 구별된 삶을 살지 못했고,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하는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삶의 목표는 살든지 죽든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자기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20:23-24)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예수님을 철저하게 본받아 겸손하고 눈물을 흘리며 인내하면서 성실하게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자기 생명보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더 귀하게 여겼기에 로마에서 순교하기까지 복음의 전달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우리 또한 각자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인식하며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올인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 볼 면목이 있습니다.

나가면서
사사기 저자는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했다고 기록하지만, 그녀는 블레셋 사람들의 돈을 받고 삼손을 배신했습니다. 본문은 세상을 향한 사랑이 결국 상처와 수치만을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들릴라를 향한 삼손의 행동은 사명을 버리고 세상에 빠진 하나님의 사람을 사탄이 어떻게 무기력하고 수치스럽게 만드는지를 보여 줍니다. 심각한 위기 앞에서 삼손은 장난기 섞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들릴라의 계속되는 유혹과 간청에 결국 번뇌에 빠졌습니다. 삼손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은 끝이 좋아야 합니다. 시작은 미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인생의 끝이 좋으면 성공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아무리 위대하게 시작해도 끝이 좋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평가받을 것입니다. 삼손의 인생이 그랬습니다. 삼손의 스토리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항상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깨어서 마귀의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신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오늘도 온 땅을 두루 살피시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을 찾으십니다. 지난주 임직한 아홉 분들뿐만 아니라 팔로마교회 온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고 생명보다 사명을 귀하게 여기는 열정으로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든든히 세워져 갑니다.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면서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훗날 주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