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두번째 약속의 성취(2)

Author
hgchoi hgchoi
Date
2022-10-24 17:42
Views
95
성경구절 : 사사기 15:1-8,14-20

삿 15:1-20 두 번째 약속의 성취(2)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다루는 주제 중의 하나가 복수입니다. 그런데 복수는 복수를 낳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본문에도 보니 삼손과 블레셋 사람들 사이에서 주거니 받거니 복수전이 계속됩니다. 나실인인 삼손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인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힘쓰지 않고 그저 개인적인 복수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나실인인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판단이 과연 주님의 뜻을 반영합니까? 삶에 우선순위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힘쓰는 일들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연관이 있습니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점입니다. 부족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감사하며 이왕이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선한 도구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결산하시는 주님 앞에 섰을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받습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명자가 되어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많이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삼손의 첫 번째 복수(1-5절)
얼마 후 밀을 거두는 시기가 되자 삼손이 그의 아내를 찾아갑니다. ‘얼마 후’라고 번역된 표현이 여호수아 23:1에서는 ‘오랜 후’로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삼손의 화가 풀리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딤나를 떠났지만, 혼인 관계를 완전히 정리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염소 새끼’를 가지고 갔는데, 이는 나름 화해의 제스처로 보입니다. “방에 들어가 내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방으로 내 아내에게 들어가고 싶다’입니다. 아내를 단순히 ‘보고자’한 것이 아니라, 아내와 잠자리 갖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인이 가로막습니다. 결혼식에서 삼손이 보인 반응을 감안할 때 장인은 삼손이 자기 딸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결혼식에 함께 있던 블레셋 사람 중 한 명에게 줘 버렸습니다. 그의 잘못된 판단은 훗날 큰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당황한 장인은 삼손을 달래기 위해 대안을 제시합니다. 삼손 아내의 동생이 더 아름다우니 그녀를 아내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제 삼손의 분노는 한 집안이 아닌 블레셋 사람 전체에게 향합니다. 이번만큼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해를 끼쳐도 자신에게 허물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허물’로 번역된 명사는‘악’또는 ‘재난’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삼손은 장인의 처사에 복수를 감행합니다.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 꼬리와 꼬리를 연결했습니다. 두 꼬리 사이에 나무 막대 하나를 매달고 거기에 불을 붙여 여우들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밭으로 몰았습니다. 이 일로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않은 곡식, 심지어 포도원과 감람나무들까지 불탔습니다. 삼손이 딤나에 온 때는 밀을 수확하던 기간이었기에 삼손의 행동은 블레셋 지역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붙들어서, 매고 가지고, 달고, 붙이고, 몰아 들여서’등등 동사를 연속으로 사용해 모든 일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삼손의 행동은 사적인 감정에서 나온 복수이지만 하나님은 블레셋의 압제에서 구원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손을 사용하십니다.

삼손의 두 번째 복수(6-8절)
블레셋 사람들은 누가 자기들의 곡식과 밭과 나무를 태웠는지 수소문했습니다. 사람들은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 벌인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빼앗아 그의 친구에게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장인의 행동에 대한 사사기 저자의 묘사나 자신의 행동을 묘사한 장인의 말에는 ‘주다’라는 동사만 사용되었을 뿐 ‘빼앗다’라는 뜻의 동사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빼앗았다’라며 책임을 장인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블레셋 사람들은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버지를 불살랐습니다. 곡식과 포도원과 나무들이 불타 버린 것에 대한 복수를 삼손이 아닌 그의 장인과 딸에게 한 것입니다. 삼손의 아내는 그녀와 그녀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겠다는 블레셋 사람들의 협박에서 벗어나고자(14:15) 삼손을 졸라 수수께끼 답을 알아냈습니다. 그런데 삼손의 아내는 피하고자 했던 운명에 맞닥뜨리는 역설적인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이에 삼손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블레셋의 복수에 맞서 또 다른 복수극을 벌입니다. 그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 대해 첫 번째 복수할 때는 그들의 재산에만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복수 할 때는 블레셋 사람들을 쳤습니다.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쳤다는 표현은 마구잡이로 공격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그 후 삼손은 유다 땅으로 도망쳐 에담의 바위틈에 숨었습니다. 그는 블레셋을 향한 자신의 분노와 복수가 정당하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말했습니다. 아내를 이용해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낸 사람들에 대한 분노,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낸 장인에 대한 분노, 아내와 장인을 죽인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삼손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의 분노조차 구원의 기회로 사용하셨습니다.
유다 사람들의 손에 결박당한 삼손(9-13절)
삼손이 유다로 올라왔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도 삼손을 따라 유다로 올라와 진을 쳤습니다. 그 수가 많아 레히를 가득 채웠습니다. 여기서 ‘진을 치다’와 ‘가득하다’라는 단어들은 군사행동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삼손의 행동이 개인 간의 갈등을 넘어 민족 간의 전쟁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놀란 유다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유다로 올라온 이유를 묻자, 그들은 삼손을 잡기 위해(문자적으로 ‘묶으려고’) 올라왔다고 대답합니다. 그들이 삼손을 잡으려는 이유는 삼손이 자신들에게 행한 것을 그대로 갚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에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삼손이 숨어 있는 에담의 바위틈으로 내려갑니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공격한 것에 대해 감사하기는커녕 불만을 드러냅니다.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책망은 그들이 블레셋의 통치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방의 압제에 익숙해지다 보니 삼손의 저항을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키는 행위로 여깁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에게 행한 대로 갚아 주었을 뿐이라고 대답합니다. 블레셋이 유다 땅을 침략한 일이 이스라엘과 대적의 관계를 깨뜨리기 위해 하나님이 개입하신 사건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삼손 역시 깨닫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고자 왔다고 합니다. 삼손은 자기 민족과는 충돌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순순히 잡히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들도 삼손을 단단히 결박하여 넘겨주기만 할 뿐 절대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과 타협한 끝에 새 줄 두 개로 삼손을 결박한 채 에담 바위틈에서 끌어냅니다.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을 치는 삼손(14-17절)
삼손이 결박된 채 블레셋 사람들이 진 치고 있는 레히에 도착하자 블레셋 사람들은 크게 소리 지르며 그에게로 마주 나갑니다. ‘소리 지르다’로 번역된 ‘루아’는 주로 전쟁을 시작할 때 소리를 지르거나 적들을 이기고 승리를 했을 때 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들의 재산에 손해를 끼치고 동족을 죽인 삼손이 결박되어 있으니 승리의 함성을 크게 지를 만했습니다. 바로 그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십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외침을 신호로 여호와께서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삼손을 묶은 밧줄이 불탄 삼처럼 쉽게 손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자 집어 듭니다. 여기서 ‘턱뼈’는 히브리어로 ‘레히’인데, 이것은 사건의 장소 이름인 ‘레히’와 언어유희를 이룹니다. 턱뼈를 수식하는 ‘새’라는 형용사는 문자적으로 ‘신선한’이라는 의미입니다. ‘새 턱뼈’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주목할 만합니다. 첫째는 뼈가 아직 마르지 않아 단단하지 않은 상태이기에 무기로서 기능이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나귀의 뼈가 아직 신선하다는 것은 나귀 사체에서 그것을 막 떼어 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삼손이 나실인 서약을 다시 한 번 위반한 셈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번에도 그를 통해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는 약속(14:4)을 성취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이 인간의 잘못된 행동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 줍니다. 물론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 잘못을 행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삼손이 블레셋을 세 번째로 공격합니다. 나귀 턱뼈로 천명을 죽인 후에 승전가를 부릅니다.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나귀’(하모르)와 ‘더미’(하모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의 자음이 동일합니다. ‘레히’에 이어 또 하나의 언어유희를 이룹니다. 나귀 턱뼈 하나로 대적을 시체 무더기로 만들어 버렸다는 자랑입니다. 그의 노래에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없고 자신에게 모든 공로를 돌립니다. 삼손은 말을 마치고서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곳을 ‘라맛 레히’라고 부릅니다. ‘턱뼈의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삼손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자신의 업적이 잊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보잘 것 없는 턱뼈를 통해 삼손이 블레셋과 싸워 이기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삼손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습니다.

여호와를 부르는 삼손(18-20절)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생깁니다. 삼손이 몹시 심한 갈등을 느끼며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사자를 찢고 블레셋 군대를 무찌른 삼손이었으나 타는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존재 같아도 인간은 전능자의 손에 붙잡히지 않으면 길거리에 뒹구는 보잘것없는 나귀 턱뼈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제야 삼손은 자신이 거둔 승리를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으로 고백합니다.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기도에 등장하는 세 단어, ‘종’, ‘구원’, ‘할례 받지 못한 자’는 13장에서 나실인인 삼손이, 할례 받지 않은 자인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두 번째 약속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삼손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을 고백합니다.

삼손의 기도 내용은 대적을 물리쳐 이스라엘을 구원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목마름을 해결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따라 살았던 삼손이 자신을 가리켜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 것도 공허해 보입니다. 평소에 주의 종답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삼손의 기도는 그가 보인 삶의 방식만큼이나 자기중심적입니다. 그가 지금 간절히 구하는 것은 자신이 죽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례 받은 하나님의 사람임을 내세워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합니다. 삼손이 단지 개인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을 불렀는데도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이 레히에 있는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옵니다. 삼손이 그 물을 마시고 몸과 정신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그곳을 ‘엔학고레’라고 부르는데 이는 ‘부르짖은 자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이번에도 그 이름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삼손의 경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잊히지 않길 바란 삼손이 하나님을 잊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딤나에서 펼쳐진 삼손의 이야기는 그가 이스라엘을 20년 동안 다스렸다는 진술로 마무리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의 압제 아래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고 그 압제를 당연하게 여겼으며, 삼손의 블레셋 공격도 개인적인 복수 차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삼손이 사사로 다스린 기간을 ‘블레셋 사람의 때’라고 표현합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면서, 백성에게 하나님의 법을 가르쳤다거나 그 땅이 평온했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다만 구원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부족한 삼손이라도 들어 쓰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에서 구원하는 일을 시작한 여호와의 대리인이었습니다.

우리의 자세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인해 빚어진 살육의 결과들조차 블레셋을 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보지만, 삼손이란 한 신앙인의 탈선이 가져다주는 혼돈의 삶은 우리를 씁쓸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어떤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까?
- 깨어 있어야 합니다
블레셋이 군대를 거느리고 삼손을 잡기 위해 유다 족속 앞에 진을 치자,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잡아 블레셋의 환심을 사려했습니다. 한때 블레셋 도시들을 정복했던(삿 1:18) 빛나던 그 용맹과 신앙은 보이지 않습니다. 세속화의 영향이 가장 용맹했던 유다 지파조차 무기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그 땅을 점령하고 대적을 쫓아내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이행하기보다는 오히려 동족인 삼손을 대적의 손에 넘겨주고 계속 그들의 지배를 받으며 살려는 한심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현실과 타협해서 산다면 그 신앙은 시들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의 역사를 끈질기게 쓰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는 언제나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아내를 친구에게 준 장인의 행동에 화가 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밭을 태웠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와 장인을 죽였고, 삼손은 이에 대한 복수를 행하다가 블레셋 사람들을 쳤습니다. 삼손은 ‘내가’원수를 갚겠다고 말했지만, 성경은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해 나귀의 턱뼈로 천 명을 죽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사자를 맨손으로 잡아 죽일 때나 아스글론 사람 30명을 죽일 때도 여호와의 영이 강하게 임했습니다(14:6,19). 중요한 것은 성령의 임재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는다면 날뛰는 사자나 천 명의 사람보다 강할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특정한 사람에게 한시적으로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성도들이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능력을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결박된 것 같고 주어진 것이 나귀 턱뼈밖에 없을지라도 성령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응답에 대한 확신이 없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이며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셨는지 알지 못할 때, 기도하지 않습니다. 삼손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간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이미 큰 승리를 베푸셨고, 삼손 자신이 할례 받은 언약 백성임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삼손이 부르짖자 샘을 터뜨려 마시게 하시며 그가 정신을 회복하고 기운을 차리도록 하셨습니다. 삼손같이 결함 많은 자가 부르짖을 때 응답해 주셨다면,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확실하게 응답해 주시겠습니까? 믿음으로 간절하게 부르짖으며 생수의 샘이 터지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철제 무기로 무장한 블레셋에 대항하기에 나귀 턱뼈는 보잘 것 없었으나, 성령이 임한 자의 손에 잡히니 큰 승리를 거두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귀 턱뼈 같은 삼손을 붙잡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높이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에게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 4:13). 성도의 진정한 승리는 인간적인 수단이나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존재가 되었다고 자만하거나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나가면서
15장에는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삼손은 아스글론 사람 삼십 명을 죽이고 그들에게 노략한 것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후에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삼손의 장인은 삼손에게 보복이나 하듯이 자신의 딸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삼손은 분함을 참지 못하여 블레셋 사람의 재산을 태우며 보복을 했습니다. 경제적인 피해를 본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에 대한 분노를 삼손의 아내와 장인에게 쏟으며 보복했습니다. 이 일로 삼손은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들 천명을 죽이며 보복했습니다. 원수를 갚는다고 우리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받은 만큼의 상처를 타인에게 되갚아 줄지라도 참된 기쁨은커녕 허전함밖에 남지 않습니다. 원수 갚은 것은 하나님께 있으니 그분께 맡겨야 합니다. 살면서 자신의 생애가 나귀 턱뼈와 같이 쓸모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나귀 턱뼈를 통해서도 블레셋을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교회 공동체에 집중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구원을 베푸시고 우리가 부르짖을 때 응답하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마치 자기 운명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계획과 행위를 뛰어 넘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 가운데 그분의 뜻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누구의 손에 잡히는 가입니다. 삼손은 심할 갈증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샘이 터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주님의 백성들의 간구를 들으십니다. 사사 시대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시대에 살지만 언제나 깨어 있으며, 성령의 능력을 받으며, 쉬지 말고 기도에 힘쓰며, 범사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기 바랍니다. 그래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능력의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