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네가 아들을 낳으리니

Author
hgchoi hgchoi
Date
2022-10-10 22:24
Views
319
성경구절 : 삿 13:1-14, 25-26



결혼한 지 몇 년이 되어도 임신하지 못해 애쓰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제 육촌 동생 부부 모두 한국에서 잘 나가는 직장에서 일했는데 바쁘다 보니 출산을 일부러 늦추었습니다. 삶이 안정이 되고 나서 뒤늦게 아이를 가지려 했는데 임신이 되지 않았고 결국 아이 갖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임신하지 못해 힘들어 한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그런데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그들의 태의 문을 여시니 그들은 훌륭한 믿음의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본문에도 불임의 부부가 나옵니다. 그들이 살던 때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억압을 받던 시기였습니다. 그 부부의 불임 상황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마노아 부부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사사기에 등장하는 마지막 사사인 삼손입니다. 삼손은 영화나 연극에서도 많이 다루는 소재입니다. 삼손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들릴라 때문에 머리가 밀리고 눈이 뽑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삼손이 다시 머리카락이 자랐을 때  마지막으로 힘을 내어 기둥을 쓰러뜨리면서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일 것입니다. 삼손 이야기는 13장에서 나실인 삼손의 출생, 14~15장에서 삼손과 딤나 여인, 그리고 16장에서 삼손과 가사의 들릴라 등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구약은 장차 오실 메시아에 관한 책이라고 합니다. 삼손도 예외가 아닙니다. 삼손 이야기에서 장차 오실 완전한 사사이자 구원자이신 분에 대한 놀라운 힌트를 제공합니다.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라는 표현이 3번 나옵니다. 예수님의 수태고지 사건을 연상하게 합니다. 삼손도 비록 온전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삼손 이야기는 삼손의 출생과 그와 이방 여인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어떻게 삼손이 이방 여인들을 통해 나실인의 규례를 하나씩 어기는지 보여 줍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삼손을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암울한 사사 시대에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은 영적으로 볼 때 그때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오늘도 여전히 역동적으로 일하십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과 그 약속에 대한 우리의 반응으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무엇인지을 바로 알고 그 약속에 대해 바른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와 회복, 부흥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이가 없는 마노아 부부(1-2절)

삼손의 이야기는 다른 사사들의 이야기와 비슷하게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그런데 사사기의 결론부에 두 번 등장하는 문장과 비교해 보면, 동일한 사실을 다른 식으로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7:6; 21:25).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도 우리의 행위가 악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할거야’라는 자세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의 행위가 ‘자기들이 보기에는’악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죄책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죄를 대를 이어 저질렀습니다. 사사기에서는 ‘여호와의 눈’과 ‘사람들의 눈’이라는 개념이 대조됩니다. 아무리 사람들의 눈에 괜찮아 보여도 하나님의 눈에는 악할 수 있습니다. 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열한 명의 사사가 등장했는데도 이스라엘의 상황은 본질적으로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소사사 압돈이 8년 동안 사사로 있다가 죽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습니다. 여기서 ‘다시’라고 번역된 단어는 ‘계속’이라는 의미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악’이라는 단어 앞의 정관사는 바알을 비롯한 가나안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린 그 죄를 지칭합니다. 이번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블레셋의 압제 아래 두셨습니다. 40년은 지금까지 압제 기간 중 가장 긴 기간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 악이 아주 심각했음을 보여 줍니다. 40년의 기간 중 20년은 삼손이 사사로 있었던 기간입니다. 다른 사사들의 경우, 사사가 있던 기간에는 압제가 끝나고 평온했던 반면에, 삼손의 경우에는 그가 사사로 있던 때에도 블레셋의 압제가 계속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배교와 이방의 압제를 보여 주는 본문에는 다른 때와 달리 하나님께 대한 부르짖음이 없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이스라엘이 부르짖을 힘도 없을 만큼 무기력하거나 아니면 이방의 압제에 익숙해져 아예 하나님께 부르짖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때 소라 땅에 단 지파 마노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노아’라는 이름은 ‘휴식’또는 ‘안식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임신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지, 몇 살인지, 아이가 없음으로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하나님께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요청했는지에 대해 사사기 저자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수태고지(3-5절)

이스라엘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언약에 충실한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구원자를 보내기로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단 지파 사람인 마노아의 아내를 찾아갑니다.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처럼 불임 상태에 있는 그녀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기 위해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보라’라는 단어를 두 번 사용하여 듣고 있는 사람의 주의를 환기시키며 마노아의 아내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임을 강조합니다. 3-4절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의 아내에게 두 개의 명령을 내리고, 하나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고,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임신해서 아들을 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시지 말라’와 ‘먹지 말라’는 2개의 동사는 모두 미완료로 사용되어 그녀가 마시거나 먹지 않은 행동이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그녀에게 금지된 것은 ‘포도주’와 ‘독주’, 그리고 ‘부정한 모든 것’입니다. 나실인을 낳을 여인에게도 나실인에게 요구되는 규정이 적용된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5절에는 태어날 아이와 관련되어 하나의 명령과 두 개의 이유가 제시됩니다. 그 아이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 될 것이고, 블레셋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실인은 ‘성별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나자르’에서 유래된 말로서 ‘헌신된 자, 구분된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민수기 6:1-12에 제시된 나실인의 구체적인 행동 양식은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고, 머리털을 자르지 않고, 시체를 멀리해야 합니다. 나실인의 서원은 자발적이었고 한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비자발적 나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삼손은 평생 나실인으로 구별되어 살아야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도 포도주를 마시거나 부정한 음식을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삼손이 태중에 있을 때부터 이미 나실인의 서원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먹고 마시는 것을 삼손이 태중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삼손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이 나실인의 ‘규칙’아래 두셨습니다.

 

마노아의 아내가 남편에게 알림(6-7절)

마노아의 아내는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에게 왔는데 그 모습이 ‘하나님의 사자’같았다고 남편에게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은 선지자를 부르는 호칭이며, ‘하나님의 사자’는 천사를 뜻하는 표현입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자신이 선지자를 만났는데, 그 모습이 천사와 같아 두려웠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한 말과 비교해 볼 때, 그녀가 남편에게 전한 말에는 생략된 부분과 추가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녀는 삭도를 대지 말라는 명령과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소명 부분을 생략했고, ‘그가 죽는 날까지’라는 정보를 추가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아이가 나실인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의 머리를 자르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여인의 말은 아이가 나실인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녀가 포도주, 독주,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인에게 술을 마시지 말고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는 것은 단지 임신할 몸의 건강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영적 순결함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날 아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모하는 자, 준비된 자에게 임하는 법입니다. 은혜를 담기에 합당한 순결한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마노아(8-14절)

마노아의 아내는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서 들은 말을 남편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마노아는 아내의 말을 듣고 아내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사자를 다시 보내달라고 기도합니다. 아이에 대한 말씀을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도에 쓰인 대명사가 흥미롭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보내셔서 ‘우리’가 그 아이에게 어떻게 행해야 할지 ‘우리’에게 가르쳐 달라고 기도합니다. 마노아는 아이와 관련된 일에 자신도 참여하기 원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마노아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여인이 밭에 앉았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녀에게 임했습니다. 여인은 급히 달려가서 자신의 남편에게 알립니다. 마노아 부부가 곧 밭으로 갔는데 그 사자가 아직 거기에 있습니다.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이 이 여인에게 말씀하신 그 사람이니이까?”마노아의 첫 질문은 그의 불안함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내가 그로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마노아는 그 사자의 말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천사가 대답하는데 14절에 나오는 동사의 주어는 모두 3인칭 여성형으로, 마노아의 아내를 지칭합니다. 마노아는 태어날 아이의 양육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지 아이에 대한 규례를 물었지만, 여호와의 사자는 그의 아내가 지켜야 할 것들만 알려 주었을 뿐입니다. 기도 응답으로 아내에게 나타났던 여호와의 사자가 자신에게도 나타났지만, 마노아는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마노아가 그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려 하자,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로 제사를 드리자, 여호와의 사자는 번제가 드려지는 현장에서 제단의 불꽃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는 이적을 보여 주었습니다. 마노아에게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사 시대는 믿음의 부재의 시대입니다. 믿음이 회복되어야 영적 부흥이 시작됩니다. 우리 안에도 믿음이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치유와 회복을 경험합니다.

 

삼손의 출생(24-25절)

마노아의 아내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고 지었습니다. ‘작은 태양’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태양은 많은 가나안인들에게 신으로 여겨졌으므로, 미래의 사사가 될 사람이 이교의 풍습을 따라‘태양의 아들’이란 이름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우려되는 일입니다. 더구나 삼손이 거주한 마하네단 근처에 있던 벳세메스는 ‘태양의 집’이라는 뜻으로 태양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마노아의 아내가 믿음으로 아이가 자유과 구원의 새로운 여명을 이스라엘에 가져다주길 바라는 기대감에서 그렇게 지었을 수도 있습니다. 무슨 의도에서 이름을 지었든 삼손이 자라갈 때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을 움직이기 시작하셨습니다. ‘움직이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휘젓다’라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여호와의 영으로 인해 삼손의 격동적인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구약의 어떤 인물도 삼손만큼 복을 많이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스라엘이 삼손과 같이 복 받은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나실인 민족으로 선택받았습니다. 삼손이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해내기 시작하는 일을 위해 태에서부터 나실인으로 선택받은 것이라면, 이스라엘은 열국 중에서 여호와의 소유와 제사장의 나라 그리고 거룩한 백성이 되는 소명을 위해 아브라함 때부터 선민으로 선택받은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신 10:15). 이것이 어찌 이스라엘만의 복입니까? 우리도 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삼손처럼 거룩하고 흠이 없는 나실인으로 살아가도록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삼손은 하나님과 부모의 기대를 안고 성장한 후에 어떤 모습을 보입니까? 그가 과연 민족을 구원하는 태양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요? 앞으로 몇 주 동안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자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은총을 경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도 그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제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라고 전하는 하나님의 사자의 말을 들은 마노아의 아내는 그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마노아의 아내의 모습은 1200년 후에 나타난 마리아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설령 죽는다 해도 자기는 종이기에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마노아의 아내와 마리아 모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행하실 것을 믿었고, 주신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삼손의 어머니는 나실인의 서원을 지켰고, 예수님의 어머니는 자기 몸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내어 놓음으로 동정녀 탄생으로 인한 수치와 불명예를 견뎠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쓰임 받은 사람들은 사람이나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의 아내에게 포도주와 그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 여인을 통해 태어날 아이는 나실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현대판 나실인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소속은 정체성을 말해 줍니다. 소속에 따라 그 사람의 위치와 특권, 감당해야 할 책임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지금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소속을 잊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에 속한 자처럼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신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자로 구별시켜 주셨고, 그에 합당하게 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부어 주셨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모든 지혜와 능력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알고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사사로 사역할 삼손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습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고,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셨으며, 성령이 우리에게 인치셨다고 합니다. 성령의 인 치심은 우리가 마지막에 있을 구원에 참여하게 됨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임재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의 분명한 증거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이전의 죄악 된 삶을 끊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며 그분의 다스림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죄를 싫어하고 증오할 뿐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마지막에 주어질 의의 소망을 기다리며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성령이 임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행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가면서

사사 시대는 회개도 없고 구원에 대한 간절함도 없던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 일하셨습니다. 간절히 아이를 기다리는 가정에 아이를 태어나게 하심으로 적어도 그 아이는 나실인으로 거룩하게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영을 부으셔서 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인간의 능력과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삼손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을 했을 뿐입니다. 사사기 후, 블레셋에 대한 승리를 이룬 자는 다윗 왕입니다(삼상 16:1-13). 그러나 다윗도 불완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백성을 대적들로부터 안식하게 해 줬지만, 그의 백성의 죄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도 승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완전한 구원자이십니다. 삼손은 우리에게 다윗을 가리키고, 또한 다윗을 넘어서서 완전한 사사이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과 마노아의 아내는 죄로 말미암아 아무런 소망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불임의 여인에게 찾아오셔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죄악 가운데 거하던 이스라엘처럼,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 진노와 심판 아래에서 아무것도 소망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위해 삼손을 보내 주신 것처럼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도의 구원도, 성도의 삶도 모두 십자가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과 구별되어 살지 못하는 교회는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이제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날마다 변화되기를 간절히 원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말씀대로 행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 결실의 계절에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