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아름다운 봉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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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1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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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느 12:1-47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주전 167년에 군대와 함께 세금징수관을 보내 조공을 확보하려 했고 예루살렘의 불안정과 소요의 원인이 유대 종교에 있다고 보아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에 이방인의 제단을 세웠습니다. 이에 마카비를 중심으로 유대인들의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고 무장을 하고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여 3년 만인 164년에 시리아군을 물리치고 성전을 탈환했습니다. 되찾은 성전에서 그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성전 청소였습니다. 우상들을 끌어내고 거룩해진 성전 안에 촛불 밝혔습니다. 이날이 바로 기슬르월 25일, 즉 12월 25일입니다. 이를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수전절입니다. 영어로 Feast of Dedication. 한자로는 닦을 修, 궁궐 殿, 마디 節이 합쳐진 수전절이라고 합니다. 이방신 숭배로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이 정화시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신약성경에 수전절이라는 단어가 한 번 나옵니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요 10:22). 예수님께서 수전절에 솔로몬 행각에서 가르치시려고 성전을 거니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절기를 하누카(Hanukah)라고 부르며 지금도 지킵니다. ‘하누카’라는 단어는 원래 성막 제사에서 나온 용어로 민수기 7:10에 처음 나옵니다. “제단에 기름을 바르던 날에 지휘관들이 제단의 봉헌을 위하여 헌물을 가져다가 그 헌물을 제단 앞에 드리니라”(민 7:10). ‘봉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하누카’입니다. 이 단어가 역대하 7:9에도 나옵니다. “여덟째 날에 무리가 한 성회를 여니라 제단의 낙성식을 칠 일 동안 행한 후 이 절기를 칠 일 동안 지키니라”(대하 7:9) ‘낙성식’으로 번역된 단어가 ‘하누카’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마무리 단계인 제단 낙성식을 했습니다. 낙성식은 하나님의 거룩한 전으로 구별하여 이 전을 하나님의 원하시는 목적대로 사용하겠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본문에는 예루살렘 성벽 봉헌식이 거행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벨론에게 짓밟혀 140년간 방치된 예루살렘을 다시금 거룩한 하나님의 땅으로 회복시키신 것에 감사하며 온 백성이 행진하고 성전 앞에 모여 성벽 봉헌식을 거행합니다. 성벽 봉헌식이 귀환 공동체에 얼마나 큰 감격과 기쁨을 가져다주었을까요? 기쁨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오늘 우리의 헌신을 점검해보려고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1-11절)
1-11절은 성벽 봉헌식을 맡아 수행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정비할 필요가 있기에, 성벽 봉헌에 앞서 그들의 목록을 소개합니다.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리자 스룹바벨은 유다 사람들을 이끌고 1차로 귀환했습니다. 당시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는데, 그 시대의 제사장과 성전 예배 담당자의 명단이 언급된 것은 아무리 어려운 시대라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대제사장 예수아와 함께 귀국해 성전에서 섬긴 제사장 22명의 이름이 소개되고, 이어서 찬송하는 일과 그 외 다른 의무를 맡은 레위인들의 명단이 등장합니다. 그러한 신앙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느헤미야 시대 백성에게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백성은 그 조상들을 기억하면서 성벽을 재건하고 하나님 섬기는 일을 제대로 감당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10~11절은 스룹바벨과 함께 돌아와 성전 재건에 참여한 대제사장 예수아의 계보입니다. 예수아는 학개와 스가야서에서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로 소개됩니다(학 1:1; 슥 3:1). 요야김, 엘리아십, 요야다, 요나단, 얏두아가 예수아의 계보인데, 엘리아십과 요나단이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와 관련된 대제사장들입니다(3:1; 13:4; 스 10:6). 엘리아십은 성벽 건축에도 참여했지만 암몬 사람 도비야에게 성전 방을 제공하기도 했고, 그의 손자는 산발랏의 사위가 되기도 했습니다(13:8). 요야다에 관해 성경에 언급이 없고 요나단은 이후에 언급되는 요하난과 동일 인물로 보입니다(22-23). 얏두아는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알렉산더 대왕과 동시대 사람으로 그와 같은 시기에 죽었다고 합니다(주전 323년). 6명의 대제사장 계보는 200년의 기간에 걸쳐 있습니다.

제사장의 족장들과 레위 사람들(12-26절)
12~26절에는 요야김을 비롯한 다음 세대의 대제사장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7절에 소개된 가문과 거의 동일한 목록이지만 여섯 번째 핫두스 가문이 빠져 총 22가문에서 21가문으로 줄어들었고, 열세 번째 미야민 가문이 미냐민으로 약간 다르게 표기되어 있습니다. 23~26절에 나머지 3명의 대제사장들(엘리아십, 요야다, 요나단) 시절의 레위인 우두머리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역대지략’은 원래 국가나 한 집안의 행적을 기록한 역사책인데, 여기서는 성전 중심의 역사를 기록한 책을 말합니다. 맛다냐와 박부갸와 오바댜는 찬양에 관련된 레위 사람들이고(8~9절)이고, 므술람과 달몬과 아굽은 문지기로서 성전의 곳간을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25절).

성벽 봉헌식 시작(27-30절)
27~43절에는 예루살렘 성벽 봉헌식이 소개됩니다. 봉헌식에 찬양과 연주를 위한 레위인들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백성은 봉헌식을 담당할 레위 사람들을 찾아 각 지역으로 사람들을 보내 레위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27절에서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에서 ‘즐거이’는 상당히 역동적인 감정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성벽 봉헌식이 즐거움과 기쁨 가운데 진행된 이유는 불가능하게 보였던 성벽 공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귀환 공동체는 찬양과 감사와 악기 연주로 최상의 기쁨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솔로몬 시대의 성전 봉헌식 때처럼(대하 5:12-13) 찬양을 부르고 악기들을 연주하는 일을 위해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노래하는 자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까운 거주지를 찾았습니다. 그들은 봉헌식을 위해 임시로 머무는 처소가 아니라 영구적인 정착지를 건설했습니다. 이들의 정착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7~11장의 문맥에서 볼 때 이 행사는 단지 성벽을 봉헌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 성전과 율법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함께 봉헌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봉헌식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스 6:20). 이들은 금식, 속죄제 그리고 몸과 옷을 씻음으로 정결하게 했을 것이며(출 19:10, 14-15; 레 16:28), 성문과 성벽은 속죄의 물을 뿌려 정결하게 했을 것입니다.

봉헌식 행진(31-43절)
정결 의식 후에 느헤미야는 유다 방백들을 성벽에 오르게 하고,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둘로 나누었습니다. 발굴을 통해 발견된 사실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벽은 두세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넓이였다고 합니다. 행진은 두 무리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성벽 위를 따라 도는 형태로 진행됩니다. 각 무리가 지나가는 장소들이 39절까지 소개되는데,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예루살렘 성 서쪽 성벽의 중심인 골짜기 문에서 행진이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은 느헤미야가 처음에 성벽의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출발한 장소이기도 합니다(2:13). 성벽 위에서의 이러한 행진은 성벽을 완성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리기 위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성벽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해 드리기 위한 의식일 것입니다. 골짜기 문에서 성벽의 오른쪽으로 행진하는 무리 뒤에는 호세야가 유다 지도자들의 절반과 함께 따랐습니다. 물론 찬송을 인도하는 자들 바로 뒤에는 나팔이나 각종 악기를 잡은 제사장들을 포함한 다른 제사장들이 따랐을 것입니다. 에스라가 앞장서서 이 무리를 이끌었는데, 분문을 지나 샘문으로 전진하여 수문, 곧 수문과 마주 대한 성벽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악기”는 27절에 언급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것들이 다윗의 악기로 불린 것은 다윗의 명령에 의해 사용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대상 15:16-21). 다윗을 수식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명칭은 그가 찬양을 비롯한 예배의 모든 것을 조직한 것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제도를 율법을 통해 정립한 모세를 비유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신 33:1). 또 다른 무리는 성벽의 왼쪽 방향으로 행진했습니다. 찬양하는 무리 다음에 느헤미야가 백성의 절반과 함께 뒤따라가고 화덕 망대의 윗 성벽과 넓은 성벽 부분을 지나 옛문, 어문,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를 지나 양문에 이르러 성전 앞으로 연결된 감옥 문에서 멈추었습니다. “크게 찬송하였는데”직역하면 ‘노래하는 자들이 들리게 했다’가 됩니다. 이는 멀리 있는 사람까지 알아들을 정도로 힘을 다해 찬양했음을 의미합니다. ‘노래하는 자’들은 행렬의 선두에서 감사 찬양을 드렸던 자들과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음악 감독인 예스라히야의 지휘 아래 노래하는 자들은 큰 소리로 시편을 찬송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돌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겠습니까? 그가 처음 에루살렘에 도착해서 몇몇 사람들과 함께 성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2:11-15), 용정에서 분문까지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불탔습니다.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서는 탄 짐승이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벽 위의 길로 많은 사람들이 찬양을 부르며 행진하는 것을 보면서 감개무량했을 것입니다.

이 날에 모두가 성전에 모여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했습니다. 성벽 완공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화목제를 드리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함께 참여한 백성이 함께 제물을 나누어 먹었습니다(레 7:11-34; 신 12:17-19). 하나님이 즐거워하게 하시므로 즐거움이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즐거움의 주체로 등장하는 ‘부녀와 어른아이’는 가정의 기본 구성원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잔치였음을 강조합니다. ‘즐거워하는 소리가 ...들렸느니라’를 직역하면 ‘즐거움이 들렸다’가 됩니다. 이는 즐거움이 멀리 있어도 느껴질 정도로 컸음을 의미합니다. 43절에서 ‘즐거움’과 관련해서 동사가 3번, 명사가 2번이나 사용되면서 ‘즐거움’을 강조합니다. 이는 성벽 봉헌이 에스라-느헤미야서의 절정에 해당하는 중요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에스라-느헤미야서에서 ‘기쁨’에 대해 네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1차 귀환 공동체가 새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 백성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통곡의 소리와 함께 섞여서 멀리서는 분간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스 3:12-13). 두 번째는 성전 봉헌 때 즐거움을 의미하는 단어가 한 번 사용되었습니다(스 6:16). 세 번째는 성벽을 완성한 후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하는 집회와 초막절 때였는데 그때는 회개와 탄식으로 즐거움이 마음껏 표현되지 못했습니다(8:9,12,17). 이제 네 번째로 성벽의 봉헌식을 통해서 그동안 절제되었던 즐거움을 마음껏 표현되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준 몫(44-47절)
성벽 봉헌식을 계기로 그동안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단절되었던 성전 제사 의식과 제도가 회복되었습니다. 특히 이 날에는 곳간을 관리하는 사람들을 세워 그들로 하여금 성전에 바쳐진 각종 예물과 십일조를 보관해 두도록 했습니다. 이런 제도의 부활이 가능했던 이유는 유다 백성이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을 기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직분을 맡은 자에게 율법에서 정한 몫을 주는 데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는 율법에 규정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제사장과 레위인의 몫을 규정하셨던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온전히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레위인들에게 공급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배를 매우 중시하는 신앙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점은 모든 일들이 ‘율법에 정한 대로’또는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의 명령에 따라’행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은 성전에서 제사 의식과 정결 규례와 관련된 직무를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47절에서 “스룹바벨 때와 느헤미야 때에는 온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 몫을 주되 ...”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때 외에는 제대로 섬기지 못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느헤미야가 임기를 끝내고 페르시아로 돌아가자 백성의 본색이 다시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자세
하누카 즉, 봉헌이 오늘 설교의 핵심 단어입니다. 하누카에 합당한 삶은 어떤 삶입니까?
- 베푸신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이 인도해 주신 역사를 돌아볼 때 그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유다 백성은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 생활에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고난을 극복하고 마침내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벽 완성을 기뻐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식을 했습니다. 우리 삶을 한번 돌아봅시다. 왜 이런 고난이 닥쳤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기쁨이 사라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믿음을 잃지 말고 주님이 베푸시는 큰 은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긴 세월에 걸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두 떼의 무리가 성의 양편으로 나뉘어 행렬을 지어가다가 성전으로 모여들어 오는 모습을 상상해봅시다. 이들이 성전에 들어와 큰 소리로 찬양할 때 그 소리는 웅장했을 것입니다. 온 백성들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릴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부른 찬송의 내용은 ‘예루살렘 성’의 경이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 48:14).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승천하신 주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십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이 크고 놀라운 사랑을 생각할진대 우리 또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 찬송해야 합니다.
- 한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봉헌식을 거행할 때 두 무리로 나누어 하나는 오른쪽으로 그리고 나머지는 왼쪽으로 행진하게 하다가 성전 앞에서 함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행진은 성벽의 안전을 확인할뿐더러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한 마음으로 열방에 선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도 개인이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지만, 함께 기뻐하고 함께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일을 이루는 과정 가운데 많은 사람의 헌신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입니다(롬 12:18). 예수님이 오셔서 화목을 이루고 막힌 담을 허무셨던 것처럼 우리도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화목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요, 교회를 아름답게 세우는 길입니다.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힌 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삽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강권적인 사랑에 이끌려 관용과 화목을 실천하면서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 지속적으로 섬겨야 합니다
스룹바벨을 따라온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과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따라온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소개됩니다. 스룹바벨 세대는 두 번째 성전을 지었고, 느헤미야 세대는 예루살렘 성벽을 중수했습니다. 느헤미야 세대는 스룹바벨 세대보다 100년 후에 귀환했습니다. 세월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시작하신 일을 끝까지 완성하셨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는 동역자로 쓰임 받았습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 대한 명단을 보면 세월이 흘러도 그 가문의 직분이 거의 그대로 계승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담당자가 바뀌고 시대가 흘러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여전히 이어집니다.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하시듯이(골 2:19)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 연합하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견고히 세워집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단지 재능 있는 사람을 찾으시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우리의 우선권이 하나님과 그분이 부르신 곳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드리는 매일의 삶이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이 시대의 레위인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분명한 소명의식이 있어야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나가면서
솔로몬이 성전 낙성식을 거행했습니다. 느헤미야 때 성벽 봉헌식을 했습니다. 우리도 2014년에 이 건물을 리모델링 하면서 19년 동안 셋방살이를 청산하고 감격에 찬 봉헌식을 했습니다. 봉헌식을 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많은 기도와 정성과 물질을 드려 예배당을 준비했기에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봉헌은 드림으로 그치지 않고 드려진 물건이나 건물이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에 맞게 사용한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이것을 잊을 때 성전을 건축하고도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건축에 참여한 자들이 상처받고 떠나고 싸우고 분열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감격하고 눈물로 봉헌하였을지라도 교회 안에서 여전히 세상 탐욕과 이기심, 시기와 분쟁이 있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하누카의 현장이 아닙니다. 진정 하나님께 봉헌된 것이 아닙니다. 팔로마한인교회가 하누카의 현장에 되느냐 세상의 연장이 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팬데믹을 지나면서 신앙생활이 알게 모르게 많이 나태해졌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표어를 2021년도에 “주님과 동행하며 역동적으로 섬기는 교회”, 2022년도에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교회”, 2023년도에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는 교회”, 금년도에 “참된 개혁을 이루는 교회”로 삼았습니다. 이 표어에 걸맞은 헌신의 삶을 사셨나요? 요한복음 2:19,21을 보면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전절에 유대인들은 열심히 성전을 청소하며 자기들은 경건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모순과 위선을 깨우치고자 수전절에 성전에 가셔서 무엇이 진정한 성전인지 가르치셨습니다. 교적부에 이름이 등록된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엡 3:16,17)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강건하게 하실 때에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견고히 모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이 우리 마음에 뿌리를 내리며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 수 있습니다. 베푸신 은혜에 감사해야 하고, 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겨야 하고, 지속적으로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은혜를 충만하게 체험한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전을 섬기는 제사장, 레위인들, 노래하는 사람들, 문지기들을 열심히 섬겼듯이 우리 또한 주님의 일을 하는 자들을 잘 섬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힘쓰는 예배자, 헌신자, 전도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