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땅, 좋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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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7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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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밧세바가 임신한 것을 감추려다가 실패를 하니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 죽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셨습니다. 왕이여 들으시오 한 성에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부유했고 또 한 사람은 가난했습니다. 부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았고, 가난한 자는 작은 암양새끼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암양 새끼는 그 집의 자식들과 같이 함께 먹고 자며 딸같이 귀여움을 독차지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에게 손님이 왔는데 자기 양이나 소를 잡는 것이 아까워 가난한 자의 양 새끼를 빼앗아 그것으로 자기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다윗이 크게 분노하며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하고 양 새끼 값의 네 배를 물어 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나단이 다윗을 향하여 외칩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삼하 12:7).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네가 연약할 때 내가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고 부족함이 없게 하였는데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악을 행하였구나. 너의 충성된 부하를 암몬 사람의 손에 죽게 하고 그의 처를 빼앗아 네 처로 삼았으니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나단 선지자의 말이 다윗의 심령에 비수와 같이 꽂혔습니다.
비유는 헬라어로 ‘파라볼레’인데 사물을 ‘나란히 놓다’, ‘옆에 놓다’라는 뜻입니다. 일상적인 소재를 이용해 다른 것을 이해하도록 돕는 기법입니다. 선택된 소재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를 알기만 하면 전달자의 의도를 더 분명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연관되는지 알지 못하면 비유는 감추어진 비밀이 됩니다. 여기에 비유의 묘미가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예수님의 갈릴리 순회 사역 중에 전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요? 말씀하신 비유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행함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한 열매를 거두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여인들(1~3절)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 사역이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복음 전파 사역에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다’는 점을 덧붙입니다. 열두 제자는 6:13 이하에 거명된 열두 사도를 말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동역자로서 선택되고 세움을 받았는데, 이제 그들의 활동이 언급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순회 사역에 함께한 자들 중에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몸소 체험한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귀신의 압제에서 자유를 얻었거나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여인들은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와 수산나를 비롯한 ‘다른 여러 여자들’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었으나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최초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요안나의 남편 구사는 헤롯 안티파스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고위직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전도 여행에 여인들의 동행을 허용하시고, 여인들에게 당신의 가르침을 듣도록 격려하신 것(10:42)은 당시 랍비들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남녀 차별을 하지 않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인들은 자신의 소유로 예수님과 열두 제자를 섬겼습니다. 여인들은 사회적 약자로서 소외된 계층에 속했지만 이제 시작된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4~8절)
네 종류의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는 공관 복음서에 공통으로 등장합니다. 이 설교의 청중은 각 동네에서 나온 큰 무리였습니다. 밀과 보리를 재배하는 밭농사는 팔레스타인의 주요 산업이었기에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밀착된 소재였습니다. 지중해성 기후인지라 겨울부터 늦봄까지는 우기, 늦봄부터 가을까지는 건기인데, 우기가 시작하는 11월초에 파종을 합니다. 비유에서 언급된 네 가지 밭은 길 가, 바위 위, 가시떨기 속, 그리고 좋은 땅입니다. 이 비유를 이해하려면 팔레스타인의 농경 생활을 이해해야 합니다. 밭을 갈고 나서 씨를 뿌리는 우리의 방법과 달리 팔레스타인에서는 씨를 뿌리고 나서 경작을 합니다. 씨를 흩어 뿌릴 때 길가에 떨어지고, 바위 위에 떨어지고, 가시떨기 속에도 떨어지는 것은 씨를 뿌리는 자가 부주의해서가 아닙니다. 길가나 덤불이라도 나중에 밭을 갈 때 함께 갈아엎을 것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돌이 많은 땅에 씨앗을 떨어뜨리는 것도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밭을 갈 때 돌은 위로 드러나고 흙은 씨앗과 함께 밑으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보니 처음 세 경우에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밭에 씨가 뿌려지는데, 결실을 방해하는 요소가 나타나고, 원하지 않는 결과가 발생합니다. 길 가에 씨가 떨어졌는데 새가 나타나 씨를 쪼아 먹어 버립니다. 바위 위에 씨가 떨어졌는데 싹이 나오다가 습기가 없으니 말라 버립니다. 가시떨기 속에 씨가 떨어졌는데 가시와 함께 자라다가 가시 기운 때문에 자라는 것이 막혀 버립니다. 그런데 좋은 땅에 떨어진 씨들은 풍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씨가 떨어진 장소를 언급할 때마다 등장하는 ‘더러는’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러는’길 가, 더러는 돌밭,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져 열매를 맺지 못할지라도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러는’좋은 땅에 떨어져 100배까지도 열매를 맺습니다. 다른 곳의 손실을 덮을 만큼 풍성한 열매를 거둔다는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는 비유 설교의 끝에 덧붙여진 일종의 관용구인데 요한계시록 2~3장에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도 등장합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이 이 비유의 참뜻을 깨달을 수 있다는 암시입니다. 여기서 ‘들음’은 들은 것의 뜻을 이해하고 그것에 걸맞은 행동에까지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귀를 기울여 경청해야 합니다.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9~10절)
예수님께서 비유를 마치시며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는데, 사실 아무도 그 의미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들으라”하시는 것을 보면 누구나 듣기를 원하시는 것 같은데 아무도 그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예수님이 헛수고를 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비유의 말씀을 마치신 후 대부분의 무리는 비유의 의미를 모른 채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 주변에 남아 있었습니다. 열 두 제자를 포함하여 평소에 예수님을 가까이 한 사람들도 비유의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혼자 계시기를 기다렸다가 그 의미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밀’로 번역된 ‘무스테리온’에서 영어 단어 mystery가 나왔습니다. 여기서 ‘비밀’은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아주 난해한 수수께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의미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비유를 듣고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너희’와 ‘다른 사람’으로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너희’로 구분된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가 비유의 의미를 물었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는 진술은 이사야 6:9~10을 축약한 것으로, 읽기에 따라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유다 백성에게 보내시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실 리가 없습니다. 유다 백성의 마음이 굳어져서 더 이상 계시의 말씀, 즉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말씀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말씀 듣기를 거부하는 그들의 완악함을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탄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심령이 이미 굳어져 있는 ‘다른 사람들’이 복음을 이해하고 돌이키지 않음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은 죄 사함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불리는 그룹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기에 죄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 ‘깨달음’과 ‘죄 사함’이 일어나지 않기에 그들은 하나님 나라 밖에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려는 자세를 가진 자들은 ‘너희’로 불립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요 예수님의 참된 가족이요,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너희’가 됩니다.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막 4:13)라는 말씀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의미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 다른 모든 비유의 의미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비유의 의미(11~15절)
예수님이 비유의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땅은 ‘말씀을 받은 자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씨를 뿌린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종류의 밭인지는 겉으로 보아서 알 수 없지만, 일단 씨가 뿌려지고 나면 알 수 있습니다. 4~8절의 비유 자체에서는 ‘말씀’이 강조되는 듯하나, 9~15절에서는 말씀 자체보다 말씀을 듣는 사람이 강조됩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네 종류의 밭으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각기 다른 태도로 말씀을 받습니다.
- 길 가에 뿌려진 씨
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가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공관복음(마태복음 13장, 마가복음 4장)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복음만 유일하게 복음을 듣는 자가 믿고 구원받는 것을 막으려고 마귀가 말씀을 빼앗아 간다고 밝힙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영적 전쟁의 배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거절하는데 그 배후에는 성도가 구원받지 못하도록 말씀을 빼앗으려는 마귀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마귀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굳었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을 도무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졌을 뿐 아니라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했기에 죄 사함 받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본 후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6:2)라고 놀라면서도 예수님의 출신 배경을 알기에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 바위 위에 뿌려진 씨
다른 복음서에는 ‘바위’대신 ‘돌밭’으로 나옵니다. 말씀이 바위 위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는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말씀으로 인하여 시련을 당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누가복음에서 본격적인 시험의 시기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부터 그분의 재림까지의 기간입니다. 이 기간에 신자들은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지만 말씀 이해의 깊은 뿌리가 없는 자들은 시련이 올 때 배반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다 예수님을 버릴지라도(막 14:29) 자신은 그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다가 여종이 추궁하자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의 행동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복음을 선포하시자 열광적으로 반응했고, 오병이어 이적 후에는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던 무리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을 맺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염려는 마음이 나누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음이 나누이니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재물에 마음을 두고 향락에 빠지면 우리의 심령이 둔하게 됩니다. ‘막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질식시키다’란 뜻을 가집니다. 세상의 미혹에 빠지면 말씀을 질식시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부자 청년입니다. 그는 영생에 대한 관심도 있었고, 어려서부터 율법도 지키며 살았지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18:23). 그는 영생의 문턱까지 갔다고 실족하고 말았습니다.
- 좋은 땅에 뿌려진 씨
앞의 세 종류의 밭의 공통점은 씨가 뿌려졌지만 결국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받아 100배의 결실을 맺는 자들을 말합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은 신자의 변화된 마음을 가리킵니다. 길가의 완고하고 굳은 마음과 대조를 이룹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가 늘 유혹에 빠지고 실패하는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최고로 인정하기에 말씀을 듣고 지킵니다. ‘지키다’로 번역된 동사의 본래 뜻은 ‘굳게 붙들다’입니다. 말씀을 붙드는 이유는 사탄이 말씀을 빼앗아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굳게 붙드려면 인내가 요구됩니다. 사탄이 집요하게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바위에 떨어진 씨가 시련의 때를 참으며 견디지 못하고 신앙을 져버리는 모습에 반대되는 양상입니다. 본 비유에서는 ‘백 배’가 언급되었지만, 핵심은 얼마나 결실했느냐가 아니라 결실을 했는가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자세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열매 맺는 비결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네 가지 땅을 비유로 드셨는데, 길 가는 씨가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단단하고 완악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말씀 속에는 왕성한 생명력이 있지만 단단하고 굳은 땅에서는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편견과 여러 가지 사상, 지적 교만 등은 말씀의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좋은 결실을 얻으려면 마음속에 굳은 요소들을 제거하고 마음 밭을 부드럽고 겸손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우리는 언제나 영적으로 깨어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 지속적인 말씀의 공급이 있어야 합니다
바위 위로 비유되는 사람에게는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자마자 곧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인해 시련을 당하면 곧 넘어집니다. 성도에게는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자기 부인이 요구됩니다. 쉽게 넘어지는 이유는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두 번 말씀을 듣고 기뻐할 수 있으나 그 기쁨이 지속되지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말씀을 접하고, 말씀이 주는 힘을 공급받아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많은 이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을 제자들에게 알리십니다.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제자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좋은 토양처럼 준비된 영혼들이 있고, 그들을 통해 100배의 결실이 맺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 시험을 이겨내야 합니다
가시떨기 속에 떨어진 씨가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는 말씀을 막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 향락이 ‘들어오기’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대비책은 이 세 가지가 들어오지 못하게 차단하는 것입니다. 들어오더라도 빨리 떨쳐 버려야 합니다. 계속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결국 말씀을 질식시키고 신앙을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성경이 돈을 사랑하지 말고(딤전 6:10),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마 6:24)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질식되지 않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 말씀을 제대로 받아야 합니다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받습니다. 여기서 ‘듣다’는 분사로 되어 있으니 지속적으로 들어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누가는 좋은 땅을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이라고 합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은혜를 주시겠습니까’기대감이 있는 사람은 말씀을 대하는 자세부터 다릅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 합니다. 둘째, 절박함을 가져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주변에서 조용히 하라고 하니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제 내게 말씀하소서 내가 듣겠나이다’지금 생명의 말씀을 받으려는 절박함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최고로 인정할 때 말씀을 굳게 붙잡습니다. 인내하며 말씀을 계속해서 붙잡고 살 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은 무리에게 가르치시는데 제자들에게만 깊은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에서 ‘너희’로 바뀌려면 되려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우리의 시간과 정성을 드려야 합니다. 주일 예배는 온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주중에 목장에 참여하도록 동기를 제공합니다. 제한된 예배 시간에 서로의 삶을 충분히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장이 활성화 되어야 합니다. 목장에서 친교와 더불어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나누고, 기도의 제목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며, 말씀을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비유를 보니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그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말씀에 진실하게 반응하고 순종함으로 삶이 변화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말씀을 받는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우리의 마음 상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항상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좋겠지만, 처한 상황에 따라 우리 마음이 길 가가 되기도 하고 바위 위가 되기도 하고 가시떨기가 되기도 합니다. 너무 낙심이 되면 기도도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 점검해야 합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초점은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생명력 있는 말씀으로 임하기에 이를 받아들인 자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합니까? 이 비유에는 두 가지 들음의 자세가 나옵니다.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들음’과 ‘깨달음과 지속적 순종이 따르는 들음’입니다. 제자들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순종하여 자신들의 삶을 통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두며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기여하였습니다. 오늘날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경계해야 할 것은 세속화입니다.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속화는 교회와 복음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생명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듣고 깨닫고 행함으로 풍성한 결실을 맺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