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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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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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음서 모두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스토리가 나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한 여자가 나아와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고 하고, 누가복음은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그 동네의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고 하고, 요한복음은 베다니의 한 곳에서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비슷한 다른 사건들이 기록되었다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같은 사건인데 보는 관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기술되었다고 합니다. 본문의 무대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있었던 식탁 교제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주로 외식적인 사람들이요 사사건건 예수님과 대적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시몬은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하였습니다. 그가 무슨 의도로 예수님을 초청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했다는 것만으로도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세상에 구원을 전하러 오신지라 예수님은 그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할 기회를 주고자 그 초청에 응하셨습니다.
마침 그 동네에 사는 한 여인이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37절은 독자의 주목을 끄는 ‘보라’라는 문구로 시작합니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예수님께 불쑥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죄와 의에 대해서 매우 민감했던 유대인에게 ‘죄를 지은 한 여자’라는 표현은 창녀를 가리키는 통속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창녀’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인해 자신의 입이나 손이 불결하게 될 것을 우려한 유대인 저자들은 완곡적인 표현으로 창녀들을 ‘죄인’이라 했습니다. 이 여인이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일 것이라는 견해는 추측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녀가 언제 어디서 예수님을 만나 죄 사함을 받았는지 성경에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은 용서를 받았다는 점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사랑을 인해 자기도 무엇인가 보답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것이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당시의 연회는 모든 사람에게 open 되었기에 여인도 예수님께로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시몬은 죄인으로 알려진 여인이 예수님께 하는 행동을 물리치지 않으신 예수님을 ‘이 사람’이라고 부르며 경멸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 시몬의 ‘홀대’와 예수님을 찾아온 죄인인 한 여인의 ‘환대’가 대비되고 있습니다. 이름도 나와 있지 않은 여인이 구원받은 기쁨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같이 살펴보면서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분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에 참여할 뿐 아니라 여인과 같이 주님을 아름답게 섬기며 주님의 칭찬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나타난 여인이 보여준 섬김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 말 없는 섬김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향유 부은 여인의 이야기를 비교적 길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인의 대사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녀는 무엇을 바라고 온 것이 아니라, 그저 예수님을 섬기기 위하여 왔을 뿐입니다. 그날 그 집에 모인 사람들 중 그녀보다 예수님을 잘 대접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자신의 섬김을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이 한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멸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속에서 잠잠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자신이 할 바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하고 싶은 말을 가슴 속에 묻어두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우리의 불평을 하나님의 일에 대한 걱정인 듯 위장하여 뱉어 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 더 잘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털어놓는 것인지, 아니면 불만이나 시기로 말하는 것인지 아십니다. 억울할 때도 있고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그러한 것들을 사람들 앞에 떠벌리지 않고, 가슴 깊이 묻어 두는데, 그렇게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인내입니다. 그 인내는 사랑의 열매, 성령의 열매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있으면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끝없는 사랑과 희생으로 점철된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은 섬기시면서 한번도 자신의 섬김을 자랑하거나 자신의 섬김에서 오는 불만을 토로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섬김은 적고 말만 많을 때 그 섬김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지체들에게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는 대신 오히려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진정으로 섬기는 자들의 섬김에는 땀과 눈물이 있을 뿐 구차한 말이나 변명이 없습니다. 작은 일 하나를 하면서도 말이 많은 것은 그 사람의 섬김이 예수님의 섬김의 정신과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참된 섬김에는 말이 별로 필요 없습니다.
- 눈물이 있는 섬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증거 중의 하나가 눈물입니다. 주님 앞에서 죄인 된 자신의 모습을 고백하며 기도를 드릴 때 눈물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과거를 가진 여인, 그래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소외를 당하던 여인이 예수님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게 되었을 때, 그날 이후로 그녀는 날마다 구원의 감격 속에, 감사가 충만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자기 동네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예수님 곁에 섰을 때, 얼마나 가슴이 벅찼을까요? 여인은 얼마나 많이 울었던지, 그 눈물은 예수님의 발을 적실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 눈물은 감사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바치면서도 우쭐거리지 않고 도리어 감사하였습니다. 현재 가진 것이 많고 능력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어쩔 수 없이 섬기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건강할 때, 기력이 있을 때, 열정이 있을 때, 가진 것이 있을 때, 잘 섬겨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섬김의 자리에 불러 주셨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고 나의 섬김을 칭찬해주지 않아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겨야 합니다. 근래에 주님 때문에 눈물을 흘리신 적이 있습니까? 눈물은 여자나 흘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남자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 앞에 자신을 쏟아놓으며 회개할 때 눈물이 나옵니다. 아직 주님을 모르는 형제자매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드릴 때 안타까움을 인하여 눈물이 나옵니다. 고난에 처한 형제자매와 함께 아픔을 나눌 때 눈물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영접치 않아 장차 환난을 당하게 될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19:41). 눈물은 거룩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 사랑이 녹아든 섬김
팔레스타인에는 모래가 많고 먼지도 많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샌들을 주로 신었는데 걷다 보면 샌들은 물론 발에까지 먼지가 많이 묻게 됩니다. 그래서 집에 손님이 올 경우, 집주인은 제일 먼저 발 씻을 물부터 내어 놓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서셨을 때 시몬은 발 씻을 물을 내어 놓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식사 습관대로 기다란 소파 같은 의자 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계신 예수님의 곁으로 한 여인이 살며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예수님의 발치에 섰습니다. 예수님의 곁에 섰다는 사실만으로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 여인이 흘린 눈물은 그대로 예수님의 발에 떨어져 먼지로 덮인 그분의 발을 적셨습니다. 여인은 무릎을 꿇고 자기를 낮추어 예수님의 발 곁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고, 고단한 사역 가운데 지치신 그 발에 마음을 담아 입을 맞추었습니다.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7:38) 라는 표현에 ‘닦다, 입 맞추다, 붓다’라는 미완료형 동사가 사용됩니다. 계속해서 씻고, 계속해서 입 맞추고, 계속해서 향유를 부었다는 것입니다. 머리털은 여자에게 자존심과 같은 것이지만 여인은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먼지로 더렵혀지고 물로 더렵혀져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성껏 닦고 나서 이제는 예수님의 발에 계속해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요 자기는 종이라는 자세로 철저하게 낮추며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자기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조차 내어놓아도 전혀 아깝게 생각지 않을 만큼 여인은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녀의 모든 행동은 백 마디 말보다 더 간절하게 그녀의 마음을 표현했기에 예수님은 여인의 섬김을 받으셨습니다. 인생의 참된 목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베푸신 큰 사랑을 느낄 때, 비로소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기가 섬기니 하나님께서 당연히 기뻐 받으실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성품과 영광스러운 본성을 잘 모르는 데서 나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전까지 그는 스스로를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광의 빛이 그에게 비쳤을 때 그것이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 지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의 죄악 됨, 부족함, 한계를 인정하며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 전부를 드리는 섬김
우리들이 섬길 때 흔히 드러나는 모습은 섬기려 하되, 스스로 한계를 정해 놓고 그 안에서만 섬기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상보다 많은 수고를 해야 할 때 갈등을 하게 됩니다. 왜 나만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느냐 하며 불평을 쏟아 내기도 합니다. 그 결과 그의 섬김은 주님이 기뻐하는 섬김과 멀어지게 됩니다. 자신과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가치보다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일들의 가치가 훨씬 더 귀한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인에게 향유는 귀한 것이었지만 예수님보다 귀한 것은 아니었기에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에게 부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섬김을 보시면서 “그의 사랑함이 많으니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주님은 부자들이 드린 헌금보다 과부가 드린 동전 두 잎을 더 귀하게 여기셨습니다(21:3). 주님은 섬김의 절대 양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양을 보십니다. 그것이 드리는 자의 중심, 즉 정성과 마음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여인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자기의 것으로 섬기되 기꺼이 온 마음을 다해 섬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 향기로운 섬김
여인이 예수님 곁으로 다가와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께 조용히 부었습니다. 여인이 향유를 부은 것은 그저 예수님을 섬기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섬김은 예수님의 몸을 향기롭게 하였을 뿐 아니라 그 방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향기의 혜택을 누리게 했습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는 시몬의 집을 온통 향기로 채웠지만 이내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섬김은 오늘까지도 전해집니다. 그래서 그녀가 행한 아름다운 섬김의 스토리를 이 아침에 듣고 있습니다. 세상일들은 시간 속에 파묻힙니다. 선행도 악행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여인의 행위가 기억되는 까닭은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기억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거칠고 독선적인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은 주위 사람들에 대한 배려나 예의를 베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섬김에는 소리만 요란할 뿐 향기는 없습니다. 그들이 섬기고 난 자리에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쓰러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그들의 인격 속에 깊이 배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아름다운 인격의 향기가 풍기고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우리 모두 이 향기를 뿜어야 합니다.
시몬의 홀대와 여인의 환대(41~46절)
41~42절에 소개된 예수님의 짧은 비유는 시몬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시몬은 그 비유가 빚을 탕감 받은 두 사람이 자기가 죄인으로 취급하고 있는 여인과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생각을 아시고, 빚 오백 데나리온을 탕감 받은 자와 빛 오십 데나리온을 탕감 받은 자 가운데 빚을 탕감해 준 사람을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아람어나 히브리어에는 ‘감사하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어서 다른 단어(사랑하다, 찬양하다)를 ‘감사하다’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다’라는 표현은 ‘감사하다’를 뜻할 수 있습니다. 빚을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더 많이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여인이 했던 행동을 재구성해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로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눈물로 발을 씻고 머리털로 닦아 주었다. 둘째,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않았는데 이 여자는 내가 들어올 때부터 발에 입 맞추기를 멈추지 않았다. 셋째,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값비싼 향유를 내 발에 부었다. 여인의 정중하고 진심어린 행동은 도리어 시몬의 무관심과 냉정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했지만 마음으로 영접하지 않았고, 손님으로 대했지만 ‘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여인의 환대는 스스로를 의인이라 여기는 바리새인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용서 받은 사랑’에 대한 감사이고 응답이었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자각이 우리를 주의 은혜와 용서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이끕니다. 그 진한 감사와 감격이 주를 향한 사랑과 헌신을 낳습니다.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우리 가슴에서 식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몬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보통 선지자 정도가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시몬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지킴으로 의인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몬도 자신이 예수님을 통해 구원이 필요한 죄인인 것을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몬은 여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여인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통하여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용서 받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여인의 과거의 모습만 알았기에 그녀를 정죄했습니다.
예수님의 죄 사함 선언(47-50절)
사람들은 자신의 죄가 용서받는 것에 대해서 감격하고 감사합니다. 또한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관대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죄가 용서받는 것에 대해서는 정의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분노하거나 불쾌해하기도 합니다. 시몬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여인과 그녀를 용납한 예수님을 향해 불편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시몬에게 죄 용서와 사랑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사해지다’는 완료형으로, 예수님을 많이 사랑한 것은 이미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용서받았음은 그녀가 보인 감사를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물론 감사는 죄 사함 받았다는 표지일 뿐, 죄 사함의 원인은 아닙니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분명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해서 메시아의 임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은 시몬을 가리킵니다. 시몬은 이 여인과 달리 죄 사함의 체험이 없었거나, 있었다고 해도 자신의 죄가 작다고 생각해 감사하는 마음이 크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인으로 취급된 여자가 죄 사함을 얻었다고 하니 잔치자리에 앉은 자들이 갑자기 예수님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Who is this? 죄를 사한다고?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시는데 자기 뭐라고.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과 구원을 연관시키시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죄 사함 받아 구원받음을 뜻합니다. ‘구원하다’라는 동사가 ‘사해지다’와 같이 현재완료 시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녀의 죄 사함, 곧 구원은 지금 일어난 일이 아니라, 과거 어느 시점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은혜를 깨달은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선언이 누가복음에 여러 번 나옵니다(17:19; 18:42). 예수님은 구원과 더불어 평안을 선포하십니다. “평안을 네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요 14:27). 예수님은 주시는 평안은 고통 중에서도 위로와 힘을 주시는 평안입니다.
나가면서
시몬이 구원을 받았겠습니까? 성경에 그가 나중에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더라는 내용이 없기에 시몬의 구원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시몬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셨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의 초대에 응하셔서 그의 집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 죄 사함 받은 은혜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자기의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표현했습니다. 여인의 헌신은 주님에 대한 사랑에 기인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여인의 헌신은 그저 낭비로 보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담겨진 헌신에는 인간의 계산과 상상을 초월한 주님의 상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땀 흘리며 번 것을 자기를 위하여 쓰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한 모든 경건한 노력을 우습게 여깁니다. 여인의 주님을 향한 ‘봉헌’을 이웃을 향한 ‘자선’보다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창고에 보물을 가득 쌓아두었어도 하나님이 지금 오라 하시면 그대로 다 두고 가야 합니다. 여인의 헌신은 예수님을 통하여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은 자들이 주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태도이며 믿음의 바른 결과입니다. 그 여인은 자기와 같이 죄인이었던 사람, 소외된 사람, 상처받은 사람들을 돌아보고 위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사랑과 열정과 헌신에서 나오는 시간과 재물과 생명을 드리는 것은 주님을 향한 거룩한 투자입니다. 그것이 시간이든, 재물이든 생명이든 하나님을 위해 드려진 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여인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말없이 섬겼고, 눈물로 섬겼고, 사랑으로 섬겼고, 최상의 것을 전부 드리며 섬겼고, 향기롭게 섬겼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에 감격하며 여인과 같은 섬김의 삶을 살면서 주님 보시기에 좋은 일을 많이 행함으로 삶 전체가 향기 나는 제물이 되어 주님께 아름답게 드려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