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Author
hgchoi hgchoi
Date
2023-05-29 17:28
Views
250
성경구절 : 계시록 14:1-13


신앙생활을 누구나 잘해보고 싶어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으로 전락해버리면 더 이상 예수님의 사랑, 십자가, 부활, 그리고 승리의 메시지가 가슴을 뛰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면 삶에 열매가 없고 믿음의 진보도 없습니다. 주님이 주신 영광스럽고 신령한 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살아갑니다. 이럴 때 믿지 않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며 다시 한 번 복음의 감격과 위대함에 기억해야 합니다. 평소에 끼니를 거른 적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배불리 먹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지만, 며칠을 굶거나 북한 동포들이 배고픔으로 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으면 자신의 현재 상황을 인해 주님께 감사하게 되고 배고픈 이들을 위해 할 일을 찾게 됩니다. 사죄의 은총을 아는 자만이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고,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행복해 할 수 있습니다. 사방에 욱여쌈을 당하는 현실 가운데서도 우리들이 죄의 문제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한 그 사실 하나 때문만으로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본 환상을 통해 성도들에게 승리의 비전을 전하고 있습니다. 전반부인 1~5절은 위기와 환난에 놓인 교회 공동체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주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13장에서 두 짐승이 맹렬하게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공동체는 승리했고 하늘에서 영광 가운데 있는 십사만 사천 명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세상의 어떠한 세력도 교회 공동체를 파괴할 수 없음을 확신하게 합니다. 이어지는 6~13절에서 짐승에게 굴복하는 자들은 최후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음을 경고하면서 성도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경각심을 주어 위기와 환난을 이길 원동력을 제공합니다. 계시록 전체의 핵심을 이루는 14장이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당시 신자들에게 의도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어린양을 끝까지 따라가는 자들이 적대적인 세력의 강력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승리하지만, 어린양 편에 서 있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1세기와 지금을 비교해 볼 때 고난의 내용은 다르지만, 우리 모두 크든 작든 고난을 겪는다는 점에서는 그때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 땅에서 누구를 믿느냐가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144,000에 속하느냐 아니냐를 결정합니다. 이 땅에서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위치를 바로 알고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며 주님 예비하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원히 부를 새 노래(1-5절)
요한은 환상 중에 용과 짐승들이 다스리는 세상과 대립해 서 있는 구세주와 성도의 모습을 봅니다. 어린양은 시편의 예언처럼(시 2:6) 시온 산에 서시고, 그 피로 구속받은 십사만 사천이 함께 있습니다. ‘시온 산’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히 12:22). 7장에서 십사만 사천은 종말론적 재앙에 앞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성도들로 나오지만, 여기에서는 어린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서 있는 성도들로 등장합니다. 십사만 사천은 순교자들이나 마지막 환난 때의 신자들만을 가리키기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였다는 것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뜻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과 안전을 부여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13장에서 언급된 짐승의 표와 대비됩니다. 이때 하늘에서 웅장한 찬양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요한은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과도 같은데,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하면서 하나님 보좌 주변에서 경배하는 큰 무리의 소리를 묘사합니다. 그것은 마치 수천, 수만 가지의 악기를 가진 오케스트라의 연주와도 같습니다. 죄의 종이었던 우리가 풀려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거룩한 피로 우리 죗값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린양의 구속 사역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산 위에서 구원의 새 노래를 부르게 하십니다. 곡조와 가사가 새로워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기쁨과 감사로 날마다 새롭게 주님을 노래한다는 의미에서 새 노래입니다. 성도들이 ‘오늘’고난 앞에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보일 때, ‘내일’주 앞에서 정결한 모습으로 찬양하는 자로 서게 됩니다.

144,000의 특징
- 믿음의 정절을 지킨 자들
‘여자로 더불어 더럽혀지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들’이란 이스라엘 안의 거룩하고 성적으로 순결한 사람들(삼상 21:5)과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인 교회(19:7-8; 고후 11:2)라는 두 가지 이미지를 결합하고 있습니다. 11-13장의 내용을 참고하면, 말세의 때에 극심한 핍박과 목숨의 위협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믿음을 배신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정절을 지킨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죄로 물든 세상의 방식과 가치관을 거부하고 마음을 다하여 그리스도께 헌신하였습니다. 바알을 따라간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영적으로 간음하는 죄를 범했다면 그리스도를 충성스럽게 섬긴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영적으로 순결하여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 됩니다. 거룩하고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짐승의 표를 받고 짐승의 우상에게 절하는 자들과 대조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물질적 풍요로움과 향락에 마음을 빼앗겨 믿음의 중심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박해와 위협 속에서도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정절을 지키는 참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 어린양을 따라가는 자들
십사만 사천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따름’은 제자도에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마가복음 8:34에 보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려거든 자기를 당장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당장 지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본받아 살아갑니다. 또한 그들은 고난과 적대 속에서도 인내로 견디며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들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어린양을 따랐기에 하늘에서 보상이 주어집니다.
- 속량함을 받은 자들
‘사람 가운데’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온 인류 가운데서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선택받은 것은 자신들의 행위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값을 지불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 처음 익은 열매로서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
출애굽기 23:19에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수확 시에 첫 열매를 드린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린다는 뜻이 있지만 전체를 다 하나님께 다 드린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5:20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여기서 첫 열매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진정한 의미의 첫 번째 부활입니다. 또한 대표성의 원리에 따라 예수님의 부활은 마지막 날에 있을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보증이 됩니다.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했다’는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첫 수확물처럼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져 그분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 입에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
‘그 입에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이사야 53:9과 스바냐 3:13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본질적으로 악을 행하지 않고 거짓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권능으로 인침을 받은 주님의 소유답게, 하늘에 거하게 될 거룩하고 존귀한 자답게, 궁극적인 승리를 얻을 자답게 구별된 삶을 삽니다. 특히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언어생활을 주의해야 합니다. 충분한 근거 없이 한편 말만 듣고 다른 편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면 안 됩니다. 거짓말을 퍼뜨리고 선동하거나 무리를 지어 공동체를 깨뜨리려는 행위는 모양이라도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거룩함은 성도의 능력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닮아 점점 거룩해져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서는 날 변화되어 온전해집니다. 어린양 앞에 선 144,000명이 성화의 완성인 영화의 상태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시간 선포(6-7절)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세 천사를 봅니다. 이 천사들은 큰 소리로 외치며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공중에 날아가는 첫째 천사는 땅에 거하는 모든 자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이 심판하실 시간이 왔으니 그분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그분을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해 회개로의 부름입니다. 이 영원한 복음은 ‘땅에 거주하는 자들’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해집니다. ‘영원한 복음’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선포합니다. 심판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려면 먼저 하나님께 돌이켜야 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선악 간에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복음의 메시지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복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 복음은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모든 것에는 마지막이 있습니다. 마지막 때의 심판에 앞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회개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의식적인 예배보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하는 삶을 더 기쁘게 받으십니다.

바벨론을 향한 심판 선포(8절)
둘째 천사는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선포합니다. ‘무너졌다’는 말을 반복하며 엄중한 파멸을 선언합니다. 우상 숭배와 부도덕의 상징인 큰 성 바벨론은 짐승이 주관하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18장에서 자세하게 묘사됩니다. 요한 당시에 바벨론은 로마를 상징했습니다. 구약시대에 바벨론이 성전을 파괴한 것처럼, 신약시대에 로마가 성전을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이 멸망하는 이유는 그의 음행으로 인해 모든 나라가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음행에 해당하는 ‘포르네이아’는 육체적 음행을 의미하는데, 종종 영적 음행, 즉 우상 숭배를 뜻하기도 합니다. 바벨론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다양한 죄를 범했을 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을 공범으로 만들었습니다. 결코 무너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인류 문명 혹은 인간의 삶은 반드시 종말을 고할 때가 있습니다. 바벨론이 사람들을 음행의 길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했습니다.

우상 숭배자들이 당할 고통 선포(9-11절)
셋째 천사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첫째는 섞이지 않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포도주는 원액이 독하기에 보통 물로 희석시킨 후에 병에 담습니다. 그런데 섞이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독한 술을 마시는 것 같이 심판의 정도가 심하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과 그 나라를 대적하는 세력이 아무리 크고 강할지라도 파멸을 피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저주받은 영혼들이 육체적인 고통 이상의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밤낮 쉼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요한은 ‘세세토록’과 ‘밤낮’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그들이 당하는 고통이 끝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도 안식(구원)을 얻지 못한 채 불과 유황으로 세세토록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짐승을 따르는 자들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부으시는 진노의 잔을 피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경고하는 이유는 아직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 경고를 소홀히 여기며 회개할 기회를 미루면 안 됩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12-13절)
짐승의 표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13:18).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단지 머리로 아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환난을 통과하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제 요한은 천사의 음성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들리는 음성과 성령의 말씀을 소개합니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지금 이후로’는 ‘요한이 계시를 받아 적는 때로부터’를 의미합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다가 주 안에서 죽은 사람들은 안식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복이 있도다’신실한 신자들을 향한 계시록의 두 번째 약속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1:3). “성령이 이르시되”교회들을 향해 말씀하시고(2:7) 예언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시는(19:10) 성령님이 직접 말씀하시며 12-13절에 기록된 권면과 약속을 확증하십니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짐승의 표를 받아 세상에서의 평안함을 꿈꾸던 자들은 영원히 쉼을 얻지 못하지만, 주님을 섬기다 죽은 자들은 잠시 고난을 당하지만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됩니다.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는 말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 때에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어떤 모습이 증거가 됩니까? 어떤 상황에서든지 인내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께 끝까지 충성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고난이 아무리 극심해도 악인들이 심판 후에 받게 될 고통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들에게는 쉼이 없지만 거룩한 자들에게 영원한 안식이 있습니다. 본문은 성도가 죽음으로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들이 우리 곁을 떠날지라도 가장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기에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 우리의 자세
우리는 장차 영원한 안식을 누릴 자들입니다. 그러려면 이 땅에서 어떠한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 우리가 갈 곳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가나안에 이르렀습니다. 막상 와 보니 약속의 땅은 여전히 이방인들이 소유하고 있었고,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외국인이자 나그네일 뿐이었습니다. 떠나온 고향에 비하면 불편하고 불안한 환경이었지만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더 나은 본향, 하늘에 있는 기업을 사모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히 11:15).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향은 바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성, 즉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본문에는 주님의 인치심을 받고 구속함을 받은 이들이 악의 세력들이 펼치는 끈질긴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승리하여 감격의 새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도 이 땅위에 펼쳐지는 현실로 인하여 때로 힘들고 고단한 시간을 지낼 때 이 천상의 장면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신 주님과 동행하기에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는 자들이라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 하나님의 승리를 지금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 이후에 시온 산에 서게 되는 승리만이 아닙니다. 현재에도 이 승리를 맛보고 누리고 살아가야 합니다. 현실에서 고난밖에 없고 죽음 이후에 누리게 될 승리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10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예수님은 자신의 양들을 구원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문이며 참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하는 자만이 구원과 생명의 양식과 영생의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도로서 우리는 참목자이신 예수님을 신뢰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삶 속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고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어떻게 지금 우리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구원의 감격을 누리는 삶, 천국을 경험하는 삶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어린양이신 구원자를 깊이 알고 교제해야 합니다. 어린양이 친히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며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우리가 세상에서 인내하며 믿음을 지킬 때, 주님이 기억하시고 상 주실 것입니다. 승리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이를 믿고 기뻐하며 찬송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계시록은 극심한 박해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소망이 없는 상황에서 위로의 메시지를 주기 위하여 하나님은 밧모섬에 있는 요한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은 이마에 어린양과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144,000명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어린양의 구원을 노래하는 자들로, 환난 중에도 짐승의 편에 서지 않고 영적 전투에서 인내함으로 승리한 하나님 백성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사탄과 그 하수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준엄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첫째 천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영광을 돌리라고 선포합니다. 이를 거부하면 진노와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 천사는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말을 반복하며 엄중한 파멸을 선언합니다. 셋째 천사는 짐승과 우상을 경배한 사람들에게 불과 유황으로 인한 고난을 예고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사라지면 무서운 진노만 남습니다. 어린양을 따르는 교회는 인내와 순결함으로 마지막 날의 고난을 이겨야 합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인내할 때 영원한 안식을 누립니다. 그러려면 말세를 사는 우리는 갈 곳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이 땅에서 이김을 맛보며 살아야 합니다. 어린양이 고난을 지나 죽음을 통하여 승리하였던 것처럼 영원한 복음을 붙들고 인내하며 말씀대로 행하면서 서 있어야 할 곳에 서고 베푸신 은혜에 감격하며 새 노래를 부르시는 능력의 종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