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부활의 첫 증인인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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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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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막 16:1-8


부활절은 크리스천들에게 성탄절과 더불어 가장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교회들마다 각종 행사와 다채로운 프로그램들이 준비됩니다. 그러나 부활절에는 무엇보다도 부활절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무덤이 비어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빈 무덤을 보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눈앞에 나타난 현실과 다시 사실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연결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가장 기뻐했어야 할 부활의 아침에 슬퍼하며 울기도 했습니다(막 16:11).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2000년 전 부활의 소식을 처음 들었던 그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별 다른 감동 없이 부활을 나와 상관없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여기며 조용히 기념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어떤 반응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합니까?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과정을 살펴보면서 이번 부활절을 계기로 주님에 대한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제 팬데믹이 끝났다고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으니 우리는 다시 모이기를 힘쓰고, 배우기를 힘쓰고, 섬기기를 힘써야 합니다. 무엇보다 부활의 증인으로 살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한 삶의 열매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돌로 막힌 무덤을 향해 가는 여인들(1-4절)
부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예수님의 부활을 손꼽아 기다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여러 번에 걸쳐 가장 가까이서 들었지만 예수님이 체포를 당하시자 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은 달랐을까요? 여인들도 미처 바르지 못한 향품을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무거운 돌을 누가 굴려 주겠느냐고 걱정합니다. 큰 돌로 막힌 무덤 안에 예수님의 시신이 여전히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여인들이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예수님의 시신이 안장된 무덤으로 갑니다. ‘매우 일찍이’라는 표현 자체는 해 뜨기 전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마가는 해가 돋을 때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처형 현장에 같이 있던 자들이 여인들이었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후에도 함께하려는 자들도 여인들이었음을 강조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활의 첫 증인이 된 자들이 여인들이라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그런데 무덤을 찾은 여인들의 이야기는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마가는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세 명을 소개하지만, 마태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마 28:1) 두 명을 언급합니다. 누가는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더 많은 여인들이 함께 무덤에 갔다고 합니다(눅 24:10). 그 여인들은 갈릴리로부터 예수님을 따라와 주님을 섬겼고 사역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했습니다. 이름이 언급된 여인들을 종합해 보면 막달라 마리아, 예수님의 이모(다른 야고보와 요새의 어머니 마리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 구사의 아내 요안나가 있었습니다. 누가가 언급한 더 많은 여인들을 최소 두 명 이상으로 볼 때, 적어도 여섯 명 이상의 여인들이 그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전체 사건의 모든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그들이 받은 정보를 정리하고 자신과 독자의 필요에 따라서 복음서에 수록하기도 하고 생략하기도 했습니다. 무덤을 찾은 여인들의 경험과 증언에 관한 기록이 다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인들은 십자가의 현장에 있으면서 예수님이 죽으시는 모습, 아리마대 요셉에 의하여 시신이 내려져 세마포에 싸서 무덤에 넣는 과정을 지켜보며 말할 수 없는 아픔에 사로 잡혔을 것입니다. 안식일이 되기 전에 장사가 서둘러 진행되었기에 여인들은 자기들이 직접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발라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안식일이 지나매”라는 표현은 토요일 저녁 해가 진 이후를 가리킵니다. 마가는 여인들이 안식일이 지나 향품을 샀다고 하는데 누가는 안식일이 오기 전에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종합해 보면, 여인들은 어느 정도의 향품은 가지고 있었는데 주님의 장사를 좀 더 정성껏 치르고자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향품을 추가로 더 사 놓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향품을 바르는 이유는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을 전혀 기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인들은 안식일 전에 예수님의 무덤을 이미 보아두었기에 무덤으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무덤으로 가면서 서로 말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그 당시 무덤은 도둑이 훔쳐 가거나 짐승들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혼자 힘으로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의 큰 돌로 막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장애물은 무덤을 막고 있는 돌만이 아니었습니다. 군병들이 그 무덤을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고 빌라도의 이름으로 무덤을 인봉해 놓았습니다. 돌을 굴려 무덤 문을 막는 것만을 보고 집으로 돌아간 여인들은 군병들이 무덤을 삼엄하게 지키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땅을 살피고 길을 찾으며 근심에 잠겨 아래만 보고 걷던 여인들이 무덤 앞에 와 보니 입구를 막았던 큰 돌이 옆으로 굴려진 것을 보았습니다. ‘본즉’은 3인칭 복수 현재입니다. 돌이 굴려져 있는 것을 여인들이 한참 동안 신중하게 살피고 관찰했음을 말해 줍니다. 마가는 여인들의 반응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부활의 첫 번째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그 돌이 어떻게 해서 굴려져 있었는지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지만, 마태복음 28:2에 따르면 새벽에 큰 지진이 났고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냈다고 합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돌을 치우지 않고서도 무덤에서 나오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문들이 닫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있는 집 안에 홀연히 나타나셨습니다(요 20:19,26).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덤 입구를 막은 큰 돌의 위치와 관계없이 무덤에서 나오실 수 있는데 왜 돌이 굴려졌을까요? 잠시 후 무덤을 찾아오는 여인들을 위한 배려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돌이 상징하는 바, 예수님을 가로막는 그 어떤 인간의 장애물도 예수님을 무덤에 가두어 둘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인들이 자기들의 힘으로는 큰 돌을 도저히 움직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집에만 있었다면 여인들은 부활의 첫 증인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인들은 그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책 없이 왔으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들의 중심을 보시고 그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인간적인 경험과 지식을 의존하려고 합니다. 규모 없이 무조건 일을 벌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심정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경험하게 됩니다.

부활소식을 듣는 여인들(5-6절)
여인들은 돌이 굴려진 것을 인해 놀라고 기뻐하면서도 막상 들어가기를 주저하다가 한 순간에 굴 안으로 몰려 들어갔을 것입니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는 데도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다 보니 여인들은 시신이 안치된 곳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누가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서 있었다고 기록합니다(눅 24:4). 어두컴컴한 데서 갑자기 눈부시게 흰 옷을 입은 천사들이 나타나니 너무 놀라서 어떤 여인은 한 사람을 보았다고 하고 다른 여인은 두 사람을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 천사들이 움직이며 말했다면 서 있는 장면을 보았을 수도 있고 앉아있는 장면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청년’으로 번역된 헬라어 ‘네아니스코스’는 겟세마네에서 벗은 몸으로 도망 친 청년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흰옷을 입고 있었다는 묘사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셨을 때의 묘사를 생각나게 합니다(9:3). 청년이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인들이 깜짝 놀란 것은 단순히 캄캄한 무덤에서 생각지도 않은 사람을 보았기 때문에 놀란 것이라기보다는 영적 존재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청년이란 말 대신에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눅 24:4)이라고 언급되며, 나중에 여인들은 그들을 ‘천사들’로 부릅니다(눅 24:23). 마태복음에서는 아예 ‘주의 천사’(마 28:2)라고 부릅니다.

마가복음도 다른 복음서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설명은 없고 대신 청년의 입을 통해 예수님이 살아나셨음을 선포합니다. ‘그가 살아나셨다’는 신적 수동태로, 그가 스스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으키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예수님을 3일 만에 다시 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종말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의인의 부활을 기대하였습니다(요 11:24).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 나라의 시작되었고 종말의 때가 도래했음을 의미합니다. 청년은 그분을 두었던 곳을 보라고 말합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했던 여인들은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았으나, 흰옷을 입은 청년의 말대로 무덤 속 어느 곳에도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죽지 않고 기절했다거나, 제자들의 환상을 보았다거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갔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마태는 부활에 대한 유대인들의 악의에 찬 비방 ‘제자들이 훔쳐갔다’가 유대 지도부에서 지어낸 말이며 군인들이 돈을 받고 퍼뜨린 말이라고 했습니다(마 28:15).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죽어 장사되셨고, 군인들이 무덤을 교대로 지켰으며, 상심한 제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부름 받는 여인들(7-8절)
예수님은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 14:28) 그 말씀대로 청년은 여인들에게 예수께서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제자들을 그곳에서 보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배신하며 도망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대한 사랑을 끊지 않고 그들을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시겠다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맹세하며 부인하던 현장에서 예수님과 눈까지 마주쳤습니다(눅 22:61).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주님은 고통 받는 베드로의 양심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주께 대한 사랑도 보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했지만 그래도 주님은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고 그를 만나려고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현재 우리의 초라한 모습 속에서도 신실했던 어제의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이며 능력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도 “나를 따라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7). 고난과 죽음의 현장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 서서”가셨습니다(10:32).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가시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제자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려고 하십니까?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마가복음에서 갈릴리와 예루살렘은 단순히 지리적 공간을 넘어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신 곳입니다. 예수님의 등장은 그가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요단강에 와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또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다가 4명의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그리고 두로와 시돈과 같은 인근 이방 지역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하고, 각종 이적을 행하고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곳은 갈릴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마지막 사명 부여는 마가복음의 결말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인들은 몹시 놀라 떨었습니다. 마태는 여인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마 28:8). 이것을 보면 여인들은 한편으로는 무섭고 또 한편으로는 기뻐하는 복합적인 감정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들을 통해 여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본 것을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눅 24:9-10; 요 20:2). 마태복음 28:8-9에 의하면 여인들은 크게 기뻐하며 부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달려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만나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이 말로 미루어 볼 때 여인들은 처음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 행동도 못하였으나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차분하게 되었을 때에 제자들이 있는 곳에 달려가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알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은 벌떡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이때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이 따라 갔습니다. 마리아는 자기를 바라보시는 살아계신 주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텅 빈 무덤만 바라보면서 돌아가신 예수님만을 찾았습니다. 그러다 주님이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시니 비로소 뒤에 계신 주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비로소 눈이 열리며 다시 사신 주님을 감격 속에 보았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부활 소식을 같은 이유로 슬퍼하며 울고 있던 제자들에게 전하였습니다.

마가는 여자들이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하며 이야기를 마칩니다. 현존하는 가장 초기의 사본들은 이 구절로 마가복음이 끝납니다. 이는 고대의 문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열린 결말(open ending)입니다. 이러한 열린 결말은 독자들이 마가복음의 스토리를 읽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합니다. 앞서 제자들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적이 있습니다(14:50). 마찬가지로 여인들이 청년의 지시를 듣고 무덤에서 도망해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인들처럼 도망갈 것인가 아니면 비록 두려움이 있지만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것인가 하는 선택이 주어집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위임을 받았습니다. 열린 결말은 일종의 수사학적 전략으로서 마가는 이런 종결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여인들의 도망과 침묵과 두려움이 잘못됐음을 깨닫게 하고 독자에게 두려움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파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천사의 말, 사람들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는 것 때문에 예수님은 갈릴리가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 먼저 나타나셔서 불신을 꾸짖으시고 그들이 부활 사실을 믿도록 배려하셨습니다. 갈릴리로 가신 것은 그 이후였습니다. 마가는 이런 계획의 변경을 부각시키기 위해 여인들의 침묵과 불신에서 이 이야기를 끝맺음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의 자세
여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주님을 대해야 합니까?
-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섬기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과 관련하여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러 여인들이 언급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였을 때부터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의 복음 사역을 도왔습니다. 그 여인들은 예수님께 대한 한결같은 사랑과 헌신의 마음을 가지고 예루살렘까지 따라왔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현장까지 따라왔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12명의 제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십자가의 현장에 있지 않고, 오직 여인들과 아리마대 요셉만이 있었습니다. 또한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된 무덤까지 따라갔습니다. 여인들의 예수님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이 지나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가려고 계획했습니다. 그래서 향품도 ‘미리’사다두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 다음 날 새벽 일찍이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여인들의 이런 행동이 예수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보여 줍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위해 어디까지 가실 수 있나요? 여인들은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헌신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처음 듣는 특권,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특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처음 전하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솔로몬이 쓴 아가서 8:6절에는 ‘도장 새기듯, 임의 마음에 나를 새기세요. 도장 새기듯, 임의 팔에 나를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합니다’라고 합니다. 죽음보다 강한 그 사랑으로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본받아 우리 또한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 주님께 염려를 맡겨야 합니다
여인들이 무덤에 찾아갔지만 그들에게는 염려가 있었습니다.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큰 돌을 치우는 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그 돌을 치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가보니 염려하던 돌은 이미 옆으로 굴려졌습니다. 우리는 ‘어제를 후회하고’‘미래를 염려하며’살아간다고 합니다. 어떤 글을 보니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며, 22%는 사소한 고민이고, 4%는 우리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한 것이고, 단지 걱정의 4%만 우리가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무익한 걱정으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여 열심히 봉사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걱정도 많이 합니다. 여인들의 걱정과 달리 돌은 이미 굴려져 있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예수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 문제를 해결해 놓으십니다.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이 붙들고 계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해 놓고 계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육신의 것이나 일상적인 필요만을 채우기 위하여 온 신경을 집중하고 염려하지 말고 그것을 공급하여 주시는 목숨과 몸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염려에 대해 권면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염려한다고 문제가 저절로 풀리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염려 대신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가 대속의 형벌을 의미한다면 빈 무덤은 부활의 새 생명을 가리킵니다. 십자가가 죄와 육에 속한 옛사람과의 단절을 의미한다면 빈 무덤이 증거 하는 부활은 영에 속한 새 삶의 출발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갈릴리란 하나님이 이끄시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정을 품어내고 아낌없는 헌신을 드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곳, 그곳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갈릴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앞서 갈릴리에 가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갈릴리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게 될 것입니다. “가서 이르라”유대인 법에 의하면 여자는 신빙성 있는 증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천사는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의 부활 소식을 알리도록 명함으로써 새 시대에는 여인들도 남자들과 구별 없이 사역에 참여할 수 있게 됨을 보여줍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여 고통을 당하며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이 보이신 그 크신 사랑에 감격하며 이 마지막 때에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삶의 현장에서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들이 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막 5:42), 나인 성 과부의 아들(눅 7:15), 베다니의 나사로(요 11:44). 그런데 그들은 잠시 살았으나 다시 죽었습니다. 그들이 살아난 것을 부활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고전 15:20) 되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마지막 날에 있을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보증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예수님이 잡히시고 재판 받으시고 온갖 희롱을 당하시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있어서 고통과 좌절과 절망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주님이 다시 사심으로 제자들에게 엄청난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죽었던 우리를 소생시키시고 죄악 된 우리의 과거를 씻기기 위하여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믿음의 탈선자들과 낙오자들에게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치유의 하나님으로서 회복과 소망의 메시지를 안고 우리들을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죽음보다 강한 십자가의 사랑을 전해주기 원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영접하는 자마다 영생을 얻고 부활을 경험하는 자들이 됩니다. 그러려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모든 근심과 걱정과 염려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을 헌신적으로 섬기던 여인들이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 되었듯이 우리 또한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다시 사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부활주일을 맞이하면서 주님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시고 삶의 현장에서 부활의 주님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풍성하게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