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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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2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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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막 11:1-10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실 것을 이미 세 번씩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유월절이 다가오자 갈릴리를 떠나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유월절은 430년간 노예로 있던 애굽에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나오게 된 것을 기념하는 유대인 최대의 명절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전 세계에서 몰려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순례자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오신 것입니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 주간이요, 사역을 마무리 짓는 중대한 시점에서 이전 방문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누구나 볼 수 있고 알 수 있게 무리의 환호 속에 성으로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이 스토리에 누가 등장합니까?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 나귀 새끼 근처에 있던 어떤 사람들, 예수님이 행진할 때 곁에 섰던 많은 무리입니다. 또한 나귀 새끼는 벳바게에서 예루살렘 성안까지 짧은 여정에 빠질 수 없는 소품 역할을 합니다. 왜 하필이면 나귀 새끼입니까? 구약 예언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왕이신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의 행진을 하십니다.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베드로의 예수님께 향한 신앙고백(8:27-30)과 변화산 사건(9:1-8)이후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가로질러(9:30),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9:33). 요단강 동편을 통해 유대 건너편 베레아 지역을 지나(10:1)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는 길에 여리고를 지나(10:46) 감람산에 오셨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공개 수배를 하고 있었으며 예루살렘 주민들은 이번 유월절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어떤 일이 발생할 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요 11:55-57). 어두움의 영으로 덮인 예루살렘에 유대인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주님의 결연한 모습은 긴장감을 느끼게 됩니다. 1절은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직전의 일로 이 사건의 배경과 상황을 묘사합니다. 2-3절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지시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4-7절은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끌어오고 예수님이 그 위에 타신 장면을 묘사합니다. 8-10절은 군중들의 반응과 예수님이 어떠한 모습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지를 묘사합니다. 예루살렘 입성 스토리를 통해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의 모습을 알고 주님의 마음에 합한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귀 새끼를 준비하시는 예수님(1-3절)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이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서 예수께서는 친히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리려고 하십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편에 위치해 있고, 예루살렘 성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신 아주 의미 있는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기도하셨던 겟세마네 동산도 여기에 있고, 주님의 승천도 바로 이 산에서 일어났습니다. 베다니는 주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를 살리신 곳입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감람산의 동쪽에 있는 베다니 동네에서 출발하여 벳바게로 갔습니다. 벳바게는 산봉우리 가까이에 있는 곳인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여기서 나귀를 구하여 타셨습니다. 군중이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한 것은 바로 이 산의 내리막길입니다(눅 19:37,38).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라는 말은 예수님이 겪으셔야 할 고난과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8:31). 예수님이 요구하신 것은 다름 아닌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였습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요청하신 상황은 스가랴 9:9이 배경이 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 상황과 그분이 나귀 새끼를 준비하라고 하신 말씀 그리고 10:47-48에서 그분이 ‘다윗의 자손’으로 불린 것은 스가랴 9:9에 예언된 내용이 현실로 성취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종말에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의 귀환의 실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둘을 벳바게로 추정되는 ‘맞은 편 마을’로 보내어 아직 아무도 타지 않은 매어 있는 나귀새끼를 가져올 것을 명하십니다.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예수님이 무엇에 쓰실지 이유는 몰랐지만 말씀에 순종하여 지정하신 곳으로 갑니다. 제자들이 가보니 과연 그곳에 나귀들이 있어 끌고 오려고 합니다. 나귀 새끼의 임자의 이름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주가 쓰시겠다’고 하니 기꺼이 자기의 나귀 새끼를 내어놓았습니다. 그의 자발적인 드림을 통하여 구약의 예언을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그 나귀 새끼의 주인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꺼이 자신을 드림으로 우리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 삶 속에서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소유에 대한 ‘징발권’이 있으십니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언제든지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귀 새끼를 타시는 예수님(4-7절)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향해 가시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으십니다. 그 일이 하나님 뜻을 이루는 것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일을 주도하십니다. 입성할 때 타고 갈 나귀 새끼까지 준비해 놓으시고 그것을 끌고 오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십니다. 제자들은 나귀 새끼가 문 앞의 거리에 매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나귀 새끼가 ‘매여 있다’는 표현은 스가랴 9:9와 함께 창세기 49:8-12을 또 하나의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창세기의 구절들은 장차 유다 지파에서 모든 백성이 복종할 치리자가 나온다는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49:11의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라는 구절이 직접적인 배경이 됩니다. 예수님은 유다 지파에서 나올 종말의 통치자가 되십니다.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풀 때 어떤 사람들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묻자 그들은 예수님이 지시하신 대로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에 적극적으로 헌신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에는 안장이 없기에 제자들은 나귀 등에 겉옷을 얹은 후 예수님을 태웁니다. 이제 예수님이 스가랴의 예언대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십니다. 예수님이 어떤 왕이신지는 로마의 개선장군처럼 군사용 말을 타시지 않으시고, 나귀 새끼를 타신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는 예수님이 세상이 기대했던 왕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줍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상징적 행동을 통해서 그분이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라는 사실과 함께 이제부터 고난과 겸손의 길이 시작될 것을 암시합니다.

찬송을 받으시는 예수님(8-10절)
제자들이 나귀 새끼 위에다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은 행위나 무리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 위에 펼쳐 놓는 행위는 구약 시대 이스라엘 왕의 즉위식과 관련되는 것으로서 예수님께서 왕이심을 뜻합니다. 무리가 예수님을 향해 외친 찬송도 마찬가지로 그가 메시아임을 암시합니다. 시편 118편은 유대인들의 큰 연중행사 때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을 향한 일종의 환영가로서 순례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했고 포로 귀환 이후로 메시아의 오심을 사모하는 의미가 더해졌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118:26)가 예수님 개인에게 적용되어 예수님이 다윗의 나라를 가져오는 메시아로 선포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를 지닌 ‘호산나’가 2회 사용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을 이루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무리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환대하며 겉옷과 나뭇가지를 깔고,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친 것은 약속되었던 다윗의 나라가 회복된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떤 식의 다윗의 나라를 기대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윗의 나라가 회복되는 때가 임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더욱이 시편 118:25-26의 배경이 되는 118:22-23은 매우 의미 깊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물론 다윗의 나라를 외치며 환호하던 군중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 한 가운데서 ‘버린 돌’이 되실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이 그분의 영광을 보일 때가 아님을 아셨습니다. 그분은 진정한 왕으로서 백성의 허물을 스스로 담당하시는 섬기는 모습을 보이러 오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10:33-34). 예수님은 영광을 취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환호하는 무리는 예수님이 다윗 왕국의 번영을 재현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주는 왕으로 오셨습니다(10:45). 영광이 아닌 고난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 나라 회복, 이것이 메시아의 사명입니다. 반면에 무리는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건져내고 다윗의 왕국을 재건시켜 정치적 해방,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주는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들이 군중심리에 도취되어 호산나를 외쳤지만, 그런 기대감이 사라지자 불과 일주일도 못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함성으로 바뀌며 사단의 하수인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 우리의 자세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스토리를 통해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노새가 아닌 나귀를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타셨을까요? 예수님이 오시기 500년 전에 선지자 스가랴는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지 예언을 하였습니다. 스가랴는 그가 ‘겸손하여’새끼 나귀를 타셨다고 예언헸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도 겸손인데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심으로 또 한 번 겸손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지만, 지배하고 세도를 부리는 왕이 아니라 겸손한 왕, 우리를 섬기시는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은 예수님이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제자들이 하셨던 말씀(10:42-45)을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왕이 왕에 걸맞은 말을 탔다면 당연한 것이지 감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왕이 나귀 새끼를 타면 ‘감동’을 주고 ‘존경심’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사는 삶이 바로 그런 삶입니다. 자신의 권리와 권한과 능력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고 자신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의 삶의 원리를 본받아야 합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의 지위와 영광을 버리시며 겸손을 보이신 것처럼 우리도 겸손해야 합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로 모든 죄인을 섬겨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은 것처럼 우리도 사랑으로 종노릇하며 다른 이들을 섬기며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 예수님께 드려야 합니다
나귀 새끼를 끌고 왔을 때 제자들은 비록 땀에 찌든 것이었지만 주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겉옷을 벗어 나귀새끼 위에 얹어 안장을 대신하였고 예수님을 그 위에 태웠습니다. 예수님이 나아가는 길에도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깔아 놓았습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자기들의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깨달은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향하여 쏟아지는 무리의 환호성을 들으며 자기들도 한자리 차지할 것이라는 기대 속에 으쓱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것을 제대로 깨달은 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였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니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잠이 들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두려움을 인하여 다 도망쳤습니다. 그렇지만 십자가를 통한 구속이란 엄청난 사건의 배후에 이런 부족한 자들의 보이지 않는 작은 헌신들이 있어 주님의 사역을 도왔습니다. 주님은 우리도 자신의 사역에 동참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간, 재물, 또는 정성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여 주시고 오늘날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도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순종에 대하여 하나님은 반드시 대가를 지불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잠 8:17). 부족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세상적으로 볼 때는 작게 여겨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중심은 우리가 드리는 작은 헌신을 기억하시고 또한 기뻐 받으십니다. 주님께서 내가 가진 모든 소유물을 쓰실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주신 것들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며 자신을 온전히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가 쓰시겠다’할 때 나귀 주인이 나귀 새끼를 기꺼이 드렸던 것처럼 주님과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봉사의 손길을 필요로 하실 때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 예수님을 높여야 합니다
모인 무리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의 입성을 환호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 못마땅해 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높이는 찬송 소리가 듣기 싫어 바리새인들이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교만한 생각을 가지거나, 자기가 받은 은혜를 감사하지도 않고 주님을 높이지도 않을 때, 주님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법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일을 성취시키시고 그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받으실 영광을 결코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찬양해야 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 가운데 있던 우리를 예수님이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공로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해 주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사탄의 종노릇하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태운 새끼 나귀가 지나가자 앞뒤에서 사람들이 환호했습니다. 우리도 이 환호에 참여해야 합니다. ‘주님 내 삶에 오심을 찬송합니다. 우리 가정에 오심을 찬송합니다. 우리 교회에 오심을 찬송합니다’라고 하면서 환호를 주님께 올려야 합니다.

나가면서
주님이 우리를 통하여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는 배신했으나 주님은 그를 회복시켜 초대 교회의 귀한 리더로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교회의 핍박자였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그를 만나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끈질긴 사랑으로 붙드셔서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에 주님과 깊은 교제를 통하여 주님과 막힌 통로가 활짝 열리기 바랍니다. 그러려면 주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왕이요 구주시기에 주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실 때에 주저하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청지기로서 주님이 맡기신 것을 잘 관리하며 원하실 때 언제든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헌신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호산나!”하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그분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본받아 삶의 현장, 그곳이 가정이든, 교회든, 직장이든 평화의 사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묵상하고 베푸신 은혜에 감격하는 이 귀한 계절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주님의 위로와 인도하심과 복 주심을 경험하고 나누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