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Author
JungS. JungS.
Date
2023-01-09 08:18
Views
308
성경구절 : 계 1:1~8


1:1-8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살다보면 낙심되는 일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는데 도무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십니까? 문제는 있지만 신앙으로 극복하려고 합니까? 아니면 문제를 인하여 서서히 허물어집니까? 우리의 삶에 소망이 없다면 존재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대표적인 세 개의 덕목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이 세 덕목, 곧 그리스께 대한 충성의 표현으로서 ‘믿음의 역사’와 형제들을 향한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소망의 인내’로 묘사합니다(살전 1:3).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환경의 어려움을 뚫고 임하는 하늘의 빛을 응시하는 사람으로서 이 땅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닫힌 현실 가운데서도 열린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 전체를 언젠가는 설교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때를 기다렸는데 금년에 하게 되었습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요한계시록에 대하여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까? 무서운 재앙과 심판의 내용이 담긴 책, 아니면 종말의 시간표를 제시하는 책, 아니면 신비한 휴거론이나 도피주의적 영성을 자극하는 책? 교회사를 살펴볼 때 불건전한 종말론에 빠져 사회적인 문제까지 일으킨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은 고난의 시대에 응시할 수 있는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책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것 때문에 초대교회 많은 성도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콜로세움에서 짐승의 밥이 되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투옥되거나 사도 요한처럼 유배되거나 카타콤 같은 지하 동굴에서 몇 날이고 몇 년이고 숨어 지내야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성도들이 상실감, 두려움, 그리고 패배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혼돈과 악의 세력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두시는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강조함으로써 성도들이 어두운 현실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담대하게 나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요한이 강조하는 것은 신자들이 함께 어두움의 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계시록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그 모든 내용은 역사의 주인이요,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시록을 통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깨달으며 주님께 대한 열정을 회복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3)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밧모섬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시와 환상을 기록한 책입니다. ‘계시’는 문자적으로 ‘덮인 것을 벗겨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전에 감추어졌던 것이 이제 열리어 나타난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하면서 소유격을 사용한 것은 기원과 목적을 동시에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계시를 주셨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고 계시록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반드시 그리고 속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속히’라는 표현은 예언의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이미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그 성취는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표현이 있습니다. “already, but not yet”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한 “반드시” 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스도는 계시의 중심이실 뿐 아니라 지금도 그것을 이루고 계시며 장차 다시 오셔서 완성하실 것입니다. 계시록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시이지만 계시의 궁극적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계시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고, 그는 다시 천사에게 주셨으며, 그 천사는 그 종 요한에게 전했습니다. 1절의 주동사 “알게 하신 것이라”는 ‘무언가를 상징적으로 의미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보이시려고’는 동사는 계시록에 8회 사용되었는데, ‘환상을 보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두 동사는 ‘환상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라’는 지침을 줍니다.

요한은 자신이 본 계시를 스스로 판단해 빼거나 더하지 않고 빠짐없이 다 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에는 일곱 가지 복이 선포되는데, 그 첫 번째가 3절에 나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이 예언의 말씀’이 일차적으로는 계시록이고, 범위를 넓히면 성경 전체를 뜻합니다. 계시록은 단지 미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상황을 반영하기도 하고 현재 삶을 안내하기도 합니다.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이 하나의 관사로 연결된 것은 ‘말씀을 듣는 것’과 ‘지키는 것’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행동이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물건을 사면 매뉴얼이 따라옵니다. 매뉴얼에는 물건이 제대로 작동시키는 방법이 적혀있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대처하는 방법도 적혀 있습니다. 계시록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아주 중요한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에는 세상의 종말이 다가올 때 대처하는 방법, 무서운 심판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는 비결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록을 읽고, 듣고, 그대로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매뉴얼을 숙지하지 않고 있다가 위기를 만나면 우왕좌왕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 날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1절에 사용된 ‘속히’라는 말과 함께, 때가 가깝다는 표현도 독자들에게 종말론적 긴박감을 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을 알게 됨에 따라 소망 가운데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악의 세력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는 교회 공동체에게 반드시 속히 될 일을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이 박해와 고통의 현실 속에 있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승리 안에 초대된 인생들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킵니다.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완성될 미래가 있다는 것은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소망을 줍니다. 궁극적으로 이 계시는 시대를 초월하여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위로와 하늘의 소망과 능력을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을 통해 주시는 위로(4-6)

요한은 계시의 일차적인 대상인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의 이름으로 은혜와 평강을 구합니다. 성부 하나님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또한 역사를 완성하시기 위해 오실 분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으로 묘사됩니다. 성령님을 일곱 영으로 묘사하는 모티프는 구약 성경 스가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스가랴는 온 땅을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일곱 눈(슥 4:10)을 일곱 등잔으로 묘사했습니다(슥 4:2). 일곱 등잔이 성전을 환하게 밝히듯이 성령님은 하나님의 전과 온 세상을 두루 감찰하십니다. 성자 예수님은 세 가지로 묘사됩니다. 첫째 ‘충성된 증인’이십니다. 주님은 피 흘리고 돌아가시기까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셨습니다. 둘째,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으나 다시 사심으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 15:23). 주님의 부활은 곧 상도들의 부활을 보장합니다. 셋째, ‘땅의 임금들의 머리’이십니다. 로마황제를 ‘주’(Lord) 또는 ‘왕’으로 여기던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왕’이시라고 합니다. 주님은 부활 승천하심으로 온 땅의 통치자로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분의 피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시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을 위한 제사장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으로서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과 완성을 위하여 삼위 하나님이 함께 참여하셨습니다. 지금도 삼위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과 감사와 찬양의 근원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오심(7-8)

요한은 일곱 교회를 위로하며 “볼지어다 그가 오시리라”고 외쳤습니다. 그 오심은 현재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확실히 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심으로 이 땅에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남김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자 신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구름은 신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은밀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온 세상이 그 광경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부활로 영화롭게 되신 육신을 입고 오실 것입니다. 요한은 초림 때 주님의 모습과 비교하여 승천하신 후 재림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언급합니다. 초림 때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셨다면 재림하실 때의 모습은 영광스럽습니다. 초림하신 주님을 소수의 사람이 개별적으로 목격했다면 재림하실 주님의 모습은 모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초림의 주님을 사람들이 찌르고 거절했다면, 재림하실 주님은 그를 거절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초림의 주님의 패배를 즐거워했다면 재림하실 주님의 승리로 애곡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그분을 배반한 자들과 믿지 않던 모든 족속이 슬퍼할 것입니다. 슬퍼하는 이유는 그들이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멸망을 주목하지도 않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복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서야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깨닫고, 그분을 거절했던 것을 후회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후회는 참된 회개가 아니라 두려움에서 나온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구원의 문이 닫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재림은 주님이 이미 이루기 시작한 구속 사역의 최종적인 완성으로서 고난을 당하던 성도들에게 궁극적인 승리가 주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킵니다. 요한은 주님의 영광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승리를 다시 한 번 확신했습니다. 그 흥분을 감출 수 없어서 ‘아멘’을 반복합니다. 이 감동은 요한 혼자의 것이 아닙니다. 이글을 읽게 된 교회 공동체도 요한과 동일한 감정적 공감대를 가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의 입에서도 ‘아멘, 아멘’이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시금석은 ‘다시 오시리라’는 주님의 약속에 ‘아멘,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한에게 장차 일어날 일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장차 일어날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미래의 모든 일을 친히 계획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시기에 모든 계획을 요한에게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로 처음과 나중을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온 세계의 시작이며 끝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시작하시고, 끝내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분은 영원한 분이며 세상이 존재하기 전에 이미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분이며 장차 오실 분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은 또한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세상 권력의 한계와 대조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마 10:28). 교회는 이 땅에 구원자이자 심판자로 곧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 종말론적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소아시아에 살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안으로는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을, 밖으로는 로마 황제 숭배를 거부함으로 인한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녹록치 않은 상황에 굴복해 세상과 타협하지 않도록, 하나님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여 주시면서 위로하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계시록은 박해와 미혹에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이 땅만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도록 요구합니다. 종말론적 신앙이란 비록 땅에 살더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현재를 살아가지만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느라 고난을 겪지만, 미래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고 박해자들에게는 준엄한 심판이 임합니다. 이것이 고난에 처한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지금도 중국, 러시아, 이슬람권 등 도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에 살면서 육신적인 핍박은 받지 않더라도, 미혹의 위험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온전히 신앙생활을 하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러 모양의 고난이 닥칠 수 있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종말론적 구원을 계시하는 계시록은 우리에게 핍박을 견디는 믿음과 거짓을 분별하는 영적 지혜를 제공합니다. 본문은 우리 각자가 당하는 상황을 믿음의 눈으로 볼 것을 제안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더 이상 두려움이나 근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주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궁극적인 승리를 내다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는 자들에게 고난은 있으나 절망은 없습니다.

-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던 요한을 만나 주신 주님의 기사를 읽으면서 초대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이 절망의 땅에서도 인생들을 만나 주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환난 속에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만나 주시고 붙드시는 주님이 계심을 믿을 때, 주님이 걸어가신 그 승리의 길, 초대 교회의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간 승리의 길을 우리도 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 완전한 승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현대인은 생존은 있는데 생명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믿는 사람들도 건강의 위기, 경제의 위기, 환경의 위기, 전쟁의 위기 속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고난과 절망을 경험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계시록은 고난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가 붙잡아야 하고 전달해야 할 희망의 실체가 누구인지 알려줍니다. 주님께서 영광 중에 다시 나타나셔서 교회와 하나님의 종들을 붙드는 모습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계시록은 소망을 제시합니다. 성도들은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에 웃고 춤추는 사람들이 아니라, 웃을 수 없는 상황, 춤출 수 없는 현실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쁨과 감격에 찬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비록 현실을 바라보면 노래할 수 없지만, 광야에서도 식탁을 마련하시는 주님, 어둠과 절망의 현장 가운데서도 동행하시는 주님, 우리도 소망의 실체가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될 때 환경을 능히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고난을 뚫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주님 때문에 감사하고 찬송하게 됩니다.

-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계시록은 종말의 때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동기부여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유이며, 동기이며, 원동력이며, 목표이며, 기쁨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소망을 사모하는 심령과 거룩한 인격과 삶은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오늘의 삶은 주님을 닮아 더욱더 깨끗한 영혼과 인격과 삶으로 자신을 연마해가는 과정입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분이 나를 위해 하신 것을 믿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은 이제 내가 그분을 위해 사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누구의 손에 위탁된 것인지를 알 때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역사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신앙은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에서 무엇을 느끼는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가운데서 무엇을 바라볼 수 있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요한과 초대 교회 공동체가 둘러싼 환경만을 보았다면 그들은 불행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어느 구석에도 소망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낙심하지 않고 여전히 주님을 붙들었습니다. 우리가 만난 현실을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상관없이 주 안에서 담대하게 주님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이 영생의 복을 누리기를 원하셔서 아들과 계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성도는 그 말씀을 믿음으로 지켜 행하고 복을 누려야 합니다.

나가면서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가득한 책입니다. 계시록을 바르게 공부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더 깊이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666이나 십사만 사천이나 아마겟돈, 천년왕국에 더 관심을 가지면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제는 고난 받는 종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로 오십니다. 구원자가 아닌 심판자로 오십니다. 계시록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고 그분의 영광과 위엄이 어떠한지 알고 그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전하는 증인의 소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물론 그 사명을 감당할 때 고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을 이기게 하는 힘의 원천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이 약속으로 끊임없이 교회를 격려하고 계십니다. 이 약속을 기억하며 주신 소명에 충실한 교회에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 승리가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교회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1세기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과거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소망 중에 달려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도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금년 한해도 성령 충만, 말씀 충만한 가운데 주님을 향한 열정을 회복하여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 중에 바라보면서 충성된 증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