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5-23 18:01
Views
443

살다 보면 우리의 속을 바짝바짝 타게 만드는 일들이 종종 벌어집니다. 요즘 같은 팬데믹 상황에서 업종에 따라 고전을 하다 보니 이것을 계속 해야 하나 접어야 하나 고민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payment 할 것은 많은데 은행 잔고는 별로 없고 돈을 변통하자니 마땅치 않을 때 답답해집니다. 자신은 항상 건강한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에 이상을 느낍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식은땀이 흐릅니다. 이거 혹시 암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며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우리를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그런 상황을 만나게 될 때 과연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좋을까요? 


 


본문을 보니 그런 안타까운 상황에 있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에게는 열두 살 된 딸이 있는데 중병으로 인하여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지난 12년 동안 기쁨을 주던 딸이 죽는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힙니다. 그가 예수님 앞에 나와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바라던 대로 예수님이 함께 가시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뜻밖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가 왜 그런 시련을 당해야 하고,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을 가르치기 원하시는지 power story의 네 번째 에피소드를 살펴보고 각자의 삶에 적용하면서 주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 인생의 문제들이 해결되며 온전케 하시는 주님의 복을 받고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 엎드린 야이로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 가버나움 지역에 오셨습니다. 배에서 내리셔서 바닷가에 서 계셨는데 어떤 사람이 다가와 예수님 발아래에 엎드립니다. 회당장 가운데 한 사람인 야이로입니다. 그에게 딸이 있는데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병든 자기 딸을 살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딸아이의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아버지의 심정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차라리 딸 대신에 자기가 아플 수만 있다면 좋은 텐데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가 아마 예수님이 회당에서 말씀 전하시는 것을 들었거나 이적을 베푸신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 딸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만나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회당장’이란 한 마을의 종교적 지도자로서 회당의 모든 업무를 관할하고 마을 사람들의 신앙을 지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와 정치가 구분되지 않았던 유대 사회에서 회당장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린 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뜻으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딸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각오가 돼 있었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이것을 직역하면 ‘나의 딸이 마지막을 가지고 있다’가 됩니다. 예수님께 죽어가는 딸에게 손을 얹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이 그렇게 해 주시면 ‘그녀가 구원받아 살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구원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덧입혀지는 것이기에 수동태가 사용되었습니다. 그의 절박함과 겸손함을 보신 예수님은 그의 집으로 가십니다. 그러자 큰 무리가 따라가면서 예수님을 에워싸 밀었습니다. 사람들이 손으로 예수님을 밀었다는 것입니다. 야이로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이제 예수님이 집에 가기만 하면 내 딸은 산다. 조금 전까지 그에게 드리웠던 어두움은 사라지고 기쁨으로 충만하였을 것입니다. 자 비켜라 주님이 나가신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향했을 것입니다. 


 


여인의 등장으로 흔들리는 야이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 궁극적으로는 잘됩니다. 그러나 도중에 때로는 예상치 않은 시련이나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야이로와 함께 가시던 예수님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십니다. 예수님이 길을 멈추신다고 생각될 때가 믿는 자들에게 위기가 됩니다. 예수님이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그러자 제자들은 ‘선생님! 이렇게 예수님을 에워싸 밀며 따라가는 무리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어쩌다 손이 닿았겠죠? 갈 길이 바쁜데 빨리 갑시다.’그러나 예수님은 계속 그 자리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십니다. 그러자 행색이 초라한 어떤 여인이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 여인은 그 동안 자기에게 일어났던 모든 사실을 고합니다. 제가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았습니다. 많은 의사들에게 가보았지만 괴로움만 당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나마 있던 재산 다 써버렸습니다. 아무 효과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병세는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듣는 순간 예수님은 나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예수님이 이 근처를 지나신다는 소문을 듣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큰 무리 가운데 에워싸여 걸어가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옷깃만 만져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온 힘을 다해 예수님께 다가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더니 혈루 근원이 마르면서 저는 깨끗이 나았습니다. 지난 12년 동안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모두 이야기하려니 얼마나 시간이 걸렸겠습니까? 여인이 이야기를 계속하면 할수록 야이로는 조바심만 생기고 도리어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본문은 죽은 야이로의 딸이 살아났다는 기적 이상의 교훈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온전케 하실 뿐 아니라 야이로의 믿음을 upgrade 하기 원하셨습니다. 여인의 간증을 다 듣고 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누구에게 한 말입니까? 1차적으로 여인에게 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 옆에 누가 있습니까? 야이로가 있습니다. 전체적인 흐름으로 볼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은 사실 야이로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야이로야. 저 여인을 보아라. 우리가 걸어가고 있을 때 저 여인은 에워싸고 밀치는 무리들을 제치고 다가와 내 옷자락을 만졌단다. 저 여인은 성한 몸이 아니야. 지난 12년 동안 피를 쏟으며 몸이 망가졌어. 그러나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 때문에 나을 수 있었다. 야이로야 너 보았지. 너 들었지. 저 여인과 같은 믿음이 있으면 네 딸의 병이 나을 수 있어.’ 


 


결단의 기로에 선 야이로 


예수님께서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평안할 지어다”고 하시며 여인을 축복하실 때에 야이로의 믿음을 시험하는 결정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그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야이로가 가진 믿음이 뿌리 채 흔들리는 순간입니다. 집에서 온 사람들은 한 마디 더합니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괴롭게’는 ‘피부를 벗기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야이로가 딸이 죽어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예수님께 매달렸는데, 그 괴롭힘의 정도가 마치 예수님의 피부를 벗길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병든 소녀는 혹 고칠 수 있을지 몰라도 이미 죽어버린 상태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딸이 죽었으니 예수님을 돌려보내시고 빨리 집에 가서 장사지내자는 것입니다. 야이로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내가 좀더 일찍 예수님을 모시러 갔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나, 내가 좀더 예수님의 발걸음을 재촉했더라면 저 여인을 만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자책감이 들었을 겁니다. 당장 생명의 위협을 받지도 않는 여인을 붙들고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신 예수님에 대해 섭섭한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살리려고 했던 딸이 죽었다는 실망감과 자기 앞에 있는 저 여인 때문에 지체가 되어 자기 딸이 죽었다는 원망감이 뒤섞였을 것입니다. 이제 야이로는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 기가 막힌 상황에서 예수님을 믿고 계속해서 함께 가든지 아니면 예수님 없이 혼자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위기의 순간에 처할 때 ‘왜’하며 따지기보다 하나님께서 위기를 통하여 ‘무엇’을 가르치기 원하시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성숙해지고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오직 감당할 시험만을 허락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마련하시는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드는 야이로 


그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인해 낙심하며 믿음이 곤두박질치는 야이로를 보시며 예수님이 개입하십니다. “이 믿음이 없는 자야 내가 네 곁에 있는데도 너는 마음이 흔들리느냐”라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36절에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의 정확한 번역은 ‘있던 말을 거부(배척)하시고’입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 하는 불신앙적인 말을 거부하시고 단호하게 야이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현재 명령형입니다. 두려워하는 것을 멈추고 계속해서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네 딸이 나를 통하여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내게 오지 아니하였느냐 저 연약한 여인도 믿음을 인하여 고침을 받지 않았느냐 그러니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라고 하시면서 야이로에게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죽음이 끝이 아님을, 당신이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딸아이의 소식을 가져온 자들의 말은 야이로를 낙심시켰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야이로의 꺼져가는 믿음의 불씨를 되살립니다. 드디어 야이로가 결단을 합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자기 집으로 갑니다. 물론 예수님이 이미 죽은 자기의 딸을 어떻게 하실지 야이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붙듭니다.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질그릇처럼 깨어지기 쉬운 존재인 것을 아십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인하여 꾸짖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여전히 우리를 붙드십니다. 만약 병에 걸렸던 딸아이가 죽지 않고 예수님의 안수를 통하여 나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야이로는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예수님께 간청하면 응답을 주신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었던 딸이 다시 살아난 것은 병들었다가 나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야이로는 생명의 권세를 가지신 주님을 깊이 경험하였을 뿐 아니라 그 주님에 대하여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야이로가 예수님을 붙든 것 같지만 실상은 예수님께서 야이로를 붙들고 계셨습니다.   


 


죽은 소녀를 살리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무리와 아홉 제자들을 남겨둔 채 야이로의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집 안에 들어서서 아이가 죽었다고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며 떠드는 모습을 보십니다. 여기서 ‘보다’는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관찰하다, 마음을 써서 바라보다’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애통하는 사람들을 마음 깊이 생각하시며 묵묵히 바라보십니다. 유대인들은 누가 죽으면 직업적으로 울어 주는 사람들을 고용하여 그들로 대신 소리 높여 울게 함으로 장례식의 슬픈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운다는 것은 그 아이가 확실히 죽었다는 증거입니다. 야이로의 마음에 다시 파문이 생깁니다. 야이로의 믿음이 다시 한 번 위협을 받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말씀하십니다. ‘떠들다’로 번역된 동사는 ‘비탄하며 소리를 지르다’는 뜻으로, 본문에서는 소녀의 죽음으로 인해 큰 소리로 곡을 하며 소리 지르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죽음의 슬픔과 고통과 비탄을 잘 드러내며, 인간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깊이 있게 전달합니다. ‘잔다’는 것은 깰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잠시 후에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마치 잠자리에서 일으키듯 다시 일으키실 것을 암시합니다. 종말에는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아이가 이미 죽은 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며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야이로의 귀에 ‘떠들고 울고 통곡하는’무리의 소리와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예수님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는 둘 중의 한 소리에만 마음의 귀를 열어야 합니다. 세상은 절망스런 현실 앞에서 그저 낙담하라고 요구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삶과 생명을 모두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시는 더 큰 그림을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은 다 내어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믿지 않거나 그저 호기심으로 주변을 서성이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아무런 능력도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오직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들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십니다. 이미 숨이 넘어간 아이는 반듯이 누워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가가 ‘번역하면 내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라는 표현을 추가합니다. 이것을 통하여 마가복음의 독자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쓴 글이라면 ‘달리다굼’이란 단어를 굳이 번역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죽었던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어 다닙니다. 야이로는 자기 딸에게 ‘손을 얹어’치유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예수님은 딸아이의‘손을 잡아’고치십니다. 마가는 소녀의 나이가 열두살이라고 합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이 병을 앓은 기간과 야이로의 딸의 나이가 일치합니다. 이것은 야이로의 딸이 태어나던 바로 그해에 여인은 혈루증을 앓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일어났다’는 단어가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되어 마가복음에서 10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소녀가 다시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고 하였는데 막 16:8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죽으시고 다시 사실 것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소녀가 살아난 사실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하여 볼 때 죽었던 소녀가 다시 살아난 사건은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부활을 예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적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경계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보지 않고 기적에만 관심 갖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살아난 아이의 건강을 회복시키려 하실 뿐 아니라 이 아이가 확실히 살아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 쓰시며 영육 간에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는 욥의 고백처럼 야이로는 죽은 딸이 살아나는 사건을 통해 귀로 듣는 믿음에서 눈으로 보고 체험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power story에서 예수님이 제압하신 대상은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의 생명을 위협했던 광풍, 무덤 곁에서 한 청년을 파괴했던 군대 귀신, 한 여인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혈루증, 그리고 한 어린 소녀의 죽음입니다. 이 모든 소용돌이의 핵심에는 죽음의 권세가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권세가 예수님 앞에 굴복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아이의 손을 잡으셨는데, 시체와의 접촉은 가장 큰 부정이었습니다(민 19:11-13).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은 시체의 손을 잡아도 부정해지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죽음으로부터 살려 내십니다. 앞서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졌을 때도 예수님은 부정해지시기는커녕 도리어 능력이 나가 여인을 정결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레위기의 정결 규정을 넘어서는 신적인 능력이요, 죽음에서 생명을 살리는 종말론적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시편, 다니엘, 이사야 등에서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가 이루어질 때 일어날 일로 소개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죽은 소녀를 살리신 행위는 요한복음의 나사로 사건과 더불어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이 땅 가운데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전주곡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소녀를 살리셨더니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랐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것 본 제자들이 놀란 것과(4:41) 거라사 주민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보고 놀란 것(5:15)과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또다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죽음도 평정하신 권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서라는 믿음의 권면입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죽음도 잠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광풍이 일 때 제자들은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4:38)하며 예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일으키면서 과연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시는 분”(막 4:38)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며,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회당장 야이로나 혈루증 앓던 여인이나 모두 예수님에 대한 간절함과 사모함, 그리고 믿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예나 지금이나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에게 임합니다. 여인은 믿음이 있었기에 손을 뻗쳐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더니 그의 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아버지의 믿음을 인하여 살아났습니다. 본인의 믿음이든 가족의 믿음이든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나가면서


주님께서 가던 발걸음을 때로 멈추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기도해도 곧 응답이 오지 않는 것같이 여겨집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도는 응답하시는데 자기 기도는 안 들어주시는 것같이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달아보시는 때요,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준비시키는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백성들에게도 광야의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가던 광야길에 물이 부족하고 길은 험하고 먹을 것도 풍성하지 못했습니다. 주변에는 대적들이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공격할 기회를 노렸습니다. 그러나 40년의 연단을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정복할 만한 믿음의 큰 그릇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만하니까 그와 같은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우리에게 더 큰 복을 주기 위하여 그와 같은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보다 더 심한 질병을 앓는 분들이 계십니까? 야이로의 딸처럼 죽기 직전 아니 이미 죽어 버린 것과 같이 소망을 잃어버린 분들이 계십니까? 질병도 죽음조차도 주관하시고 회복시키는 분이 바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하신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시며 소망을 주십니다.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우리의 것으로 하는 비결이 있는데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요, 말씀의 토대 위에 계속하여 믿음을 가지는 것이요, 주님께 끈질기고 간절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야이로나 혈루증 걸린 여인이나 다같이 예수님의 발아래서 해결책을 발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문제는 없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분이기에 이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주님의 능력을 믿고 구하는 자에게 역사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나오는 자들을 여전히 회복시키시고 평안을 선포하십니다. 되살아난 야이로의 믿음을 인하여 예수님은 손을 뻗쳐 소녀의 손을 잡으시며 죽은 소녀를 일으키셨습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기도를 인하여 주님의 능력의 손이 나타나십니다. 달리다굼 일으키시는 주님의 이적을 오늘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맛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귀로 듣는 신앙에서 눈으로 보는 신앙, 성전 주변만을 맴도는 신앙에서 주님을 뜨겁게 경험하는 신앙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시련이 없을 수 없지만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일어나시고 주님의 치유와 회복과 부활의 능력을 삶의 현장에서 맛보시기를 바랍니다.